지난 봄, 백두대간 대관령 코스가 비 때문에 무산된 이후 나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드넓은 초원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 한가로이 떠 가는 구름, 진귀한 야생화...

그 사이로 걸어가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놀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내 마음의 병은 마침내 치유되었다.

해발고도 800미터에 자리한 대관령 목동의 집에서 사흘을 묵을 수 있었던 건

올 여름 가장 추억에 남는 이벤트.

전국이 열대야로 들끓고있는데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대관령에서 나흘을 보냈으니

피서치고는 멋진 피서였다.



산이라기 보다 구릉으로 느껴지는 곳에 드문드문 지어놓은 목동의 집.

목부들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일년내내 소떼(한우)를 돌본다고 한다.

초원에서 방목되는 소들은 비 바람을 견디며 자연 속에서 마음껏 풀을 뜯는다.

옆집의 목부는 50대의 강원도 남자로 아들 셋을 공부시켜 객지로 내보냈다.

집 주변에 온갖 채소를 가꾸는 목부의 아내는 장독대 앞에 천궁을 심어놓았다.

"천궁 냄새가 독해서 벌레가 안오더래요. 된장 냄새 좋아하는 뱀도 못오더래요."

독특한 강원도 사투리가 정겹다. 고랭지 배추를 한 포기 갖다주며 먹어보란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소박한 웃음. 때묻지 않은 인심이 느껴진다.



어른 4명에 아이들 5명, 대식구가 해발 8백고지에 숙소를 정하고

여행 첫날 찾아간 곳은 청학동 소금강.

평창과 강릉을 잇는 6번도로를 따라 진고개를 넘었다. 해발 960m 진고개.

여기서 1시간 30분만 오르면 노인봉, 생각같아선 혼자서 훠이 훠이 산을 오르고 싶다.

구절양장 꼬부라진 진고개를 넘어가니 길 양편으로 연보라색 벌개미취가 한창이다.

청학동 일대엔 물놀이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물을 보자 환호작약하는 아이들을 구슬려 구룡폭포까지 오르기로 했다.

송림 속에 자리한 청학산장을 지나 십자소와 연화담을 보고,

소금강 유일의 사찰 금강사 앞에서 약수로 목을 축인다.

절을 지나니 골짜기가 훤히 터지면서 군데군데 철다리가 놓여있다.

군데 군데 시퍼런 소와 작은 폭포, 물굽이가 휘돌아가는 바위...



소금강 8경에 들어가는 '구룡비폭'은 내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다.

주왕산 제2폭을 확대시킨 모습이랄까.

낙차가 크진 않지만 2단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힘차게 느껴진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일행들을 내려보내고 만물상까지 오르기로 한다.

올라가면서 보니 입구에서 구룡폭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느낌이다.

학이 노닐었다는 학유대, 구곡담, 만물상... 말 그대로 금강산 축소판이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만물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위는 단연 귀면암.

금강산 귀면암이나 설악산 귀면암보다 훨씬 잘생겼다. 특히 우뚝한 코가 일품이다.

(코가 크면 뭐가 크다더라......... 물론, 코딱지가 크겠지 ^^*)

만물상에서 백운대 지나 노인봉까지 단숨에 오르고 싶다.

대관령에서 매봉-노인봉-진고개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을 언젠가는 걷게 되리라.

이 구간은 평화로운 초원지대가 펼쳐져 백두대간 중에서 전망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산 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뛰듯이 날 듯이 산길을 내려온다.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정몽헌 회장의 자살 소식을 들었었는데

문득문득 그가 생각나 마음이 우울했다. 그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노벨 평화상, 왕자의 난, 대북사업... 등등 일련의 사건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어쩌면 한국적인 기업 환경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는지도 모른다.

기업가는 기업으로만 승부해야지 정권과 밀착하면 위험하다는 생각.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정권이 바뀌면 언제 칼을 맞을지...



여행할 땐 그 지역의 특성을 볼수 있는 장소를 골라야 하고

음식 또한 특산물이나 지역 고유의 먹거리를 맛보는 게 좋다.

여행 둘째날, 우리는 대관령의 진수를 보러 나섰다. 

우유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삼양대관령목장.

대관령 일대 600만평의 고산 유휴지를 개척해서 초지로 만들어놓은 곳이다.

목장을 한 바퀴 도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시속 20킬로를 넘을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을 이루는 목장 일대에는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발 850~ 1400m의 고원지대에 펼쳐진 초원에서는 소떼(젖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동해전망대(1,140m)에 올라서니 강릉, 주문진 앞바다가 시원하게 나타난다.

어디가 수평선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먼 바다에 뜬 배들이 하늘에 뜬 것 같다.



전망대 서쪽으로 황병산(1,407) 레이다 기지가 특이한 모습으로 서있다.

좋은 사진을 한점이라도 얻으려나 싶어 이리 저리 구도를 잡아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초지 곳곳에 무슨무슨 영화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지만, 속물스럽게 느껴져 찍기 싫다.

가을동화의 은서 준서 나무, 영화 임꺽정, 중독, 야인시대 촬영지 등등 많기도 하다.

끝없는 초원을 천천히 달리다가 역광이 눈부신 곳에서 아이들을 내리게 하고

언덕 아래에서 위로 달리도록 연출을 해보았다. 그리고 연속 셔터로 사진 몇 장.

소황병산 아래 남한강 발원지점. 그 작은 물줄기가 목장 안으로 계곡을 이루며 내려오는데

잠시 차를 멈추고 발을 담근다. 햇살은 쨍한데 바람은 서늘하게 느껴지고...

목장 구경 때문에 늦어진 점심을 횡계읍에 나와 곤드레 나물밥으로 먹었다.

강원도에서 자생하는 식물 '곤드레'는 참나물 계통이라는데 담백한 맛이 깔끔하다.

식당 주인이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인지 벽에 걸린 사진들이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 학습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한국자생식물원'을 들렀지만 아이들은 식물보다

아이스크림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야생화 이름 3개씩 외우라고 숙제를 냈더니 녀석들이,

"개불알꽃, 소경불알꽃, 매발톱..." 이런 이름만 외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 1천여 종이 자라고 있는 식물원 일대는 여름꽃들이 한창이다.

닥털을 뽑아놓은 듯한 '분홍바늘'꽃이 특이하게 기억된다.

처음엔 진분홍 꽃으로 피었다가 어느 순간 닭털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인지

전체적인 모양이 다소 엽기적이다.

하얀 두메양귀비 또한 기억에 남는다. 병약한 여인의 모습같다.

나리꽃에 나비가 앉는 모습을 포착하려고 300m 망원렌즈로 접사를 시도했으나 실패.

식물원의 그 많은 꽃들 중에 파인더에 담을만한 게 없다.

이런 걸 보고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는 게 아닌지 몰라.



올 여름 여행은 아이들을 동반했기 때문에 계곡의 물놀이가 필수였다.

수항계곡에서 두 번이나 물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여행을 만들어주려고 애썼다.

어름치, 쉬리, 기름종개 등 10여 종의 물고기가 잡히는 수항계곡은 자연이 살아있다.

어항을 놓아 피라미를 잡았다. 물살이 빨라 어지럽다.

그 빠른 물살처럼 시간은 왜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황태구이로 마지막 저녁을 먹고 나니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쉽다.

떠나기 전날 소나기 한줄기가 뿌리더니 날씨는 갑자기 초가을로 변했다.

"여기는 여름이 짧더래요. 한 보름쯤 덥다 말더래요. 이제 긴팔 입을 때 됐더래요."

목부의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 겨울, 눈이 2미터 이상 쌓이는 곳에서 목부의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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