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루 동안 내리던 비가 딱 그치자 도로는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모처럼 갠 주말, 그 누가 떠나고 싶지 않으리.
지체와 서행을 반복하며 7시간만에 닿은 금산사는 배고픈 길이었다.
절 입구 민박집에서 밤 10시에 저녁밥을 먹기까지 우리는 흥부 자식들처럼 밥이 그리웠다.
이몽룡이 거지꼴로 월매를 찾아와 밥을 청한 뒤 '밥아, 너 본지 오래다'하고 허겁지겁 먹었다는데, 그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것 같다.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식사 후 주최측에서 마련한 짧은 역사 강의가 있었다.
최근에 나온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신정일 선생. 내일 답사에 대한 스터디로 동학혁명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쏟아놓는다.
암울했던 시대 민중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준 동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선생 얼굴 위로 문득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이 겹친다.
어릴 때부터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울분이 용솟음쳤다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셨다는 조정래 선생님.
그 다짐이 '아리랑'이 되고 '태백산맥'이 되었듯이 신선생의 역사관 또한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온 민중들에 대한 천착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재야사학자로 분류되는 그는 1년에 책을 3권이나 냈다 한다. 그 해박함과 순수한 열정이 듣는 사람을 감동케 했다.

뒷날 새벽, 호남 제일의 고찰 금산사 새벽 예불을 보러 가는 길. 몇 광년을 달려온 별빛은 동자승의 눈빛처럼 맑고 초롱했다.
이 깊은 산 속에 유폐되었던 후백제 왕 견훤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도량석이 시작된 새벽의 금산사에서 어제 밤 우리가 달려온 길이 옛날에는 얼마나 더 멀고 험하였을까 생각했다. 전조등 불빛에 구불구불 드러나는 산길을 끝도 없이 달려오면서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을 만나지 못했음을 상기했다. 과연, 왕을 유폐시킬 만큼 멀고 험한 길이다.

미륵신앙의 본산 금산사는 질곡의 역사를 힘겹게 살아온 민초들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벌판으로 달려갈 때 현대식 화포와 총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달랑 죽창 한자루 들고도 두려워 않았던 그 용기의 원천이 미륵신앙이었다.

신도들을 따라 대웅전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미륵전을 배알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 뿐인 3층 목조 법당 미륵전은 통층으로 지어진 내부가 특이하다. 무거운 기와지붕을 지탱하면서 높이를 유지하려니 대들보가 두 아름씩 넘는다.
낡은 단청이 퇴락한 고찰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듯하다. 번쩍이는 동기와에 시멘트를 처바른 요즘 절보다 얼마나 멋스러운가.

도량석이 끝난 뒤 스님은 법고를 치고 대종을 울린 뒤 목어를 때리고 운판을 울렸다. 목숨 있는 것들은 물론 무간지옥의 귀신들까지 구제한다는 저 소리.
대웅전에서는 깊은 강이 흐르듯 조용한 염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롱나무 아래서 듣는 금산사의 새벽 예불 소리는 음유시인들의 낮은 합창 같다.

미륵의 절 금산사를 둘러보고 돌아서는 발길이 어쩐지 무거웠다. 지금부터 돌아볼 곳들은 역사적 아픔이 서리서리 배인 동학 농민운동 관련 유적들이기에.
전봉준의 사진과 친필이 모셔진 구리골 동곡약방과 금평저수지 너머 동학의 격전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자신의 역사지식이 너무나 얕은 것을 속으로 책망했다.
길 양쪽 해바라기가 심어진 풍경 속으로 전봉준의 고택을 둘러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도 쪽으로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로가 참 한산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역사적인 소외가 차라리 축복으로 느껴지는 땅. 슬프게도 아름다운 전라도.
동학혁명의 원인이 됐던 만석보 터 기념비 앞에서 배들평야를 보며 대리석에 새긴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를 읽었다. 불과 1백여 년 저쪽의 피맺힌 역사가 가슴 아프기 보다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무지몽매한 역사가 더 서글퍼 눈시울이 뜨겁다.

무늬 없는 질그릇처럼 소박한 얼굴의 신정일 선생과 헤어져 우리는 연꽃축제가 열리는 무안으로 달렸다. 무안군 일로면으로 진입하는 아스팔트 위에는 흰 페인트로 '연꽃'이라는 글씨가 쓰여있어 '연꽃 즈려 밟고 가는 길'의 낭만이 벙글었다.

대개의 우리나라 축제가 그렇듯이 무안 연꽃축제도 조악한 느낌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이야 그렇다 치고 연못보다 더 넓어 보이는 먹거리장터와 거기서 울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 국적불문, 장르불문의 노래가 백련지를 뒤덮고 있다.
10만평의 못에는 드문드문 하얀 연꽃이 심청이 소복처럼 피어나고 연못가에 가시연, 개연, 노랑어리연, 수련, 물양귀비... 갖가지 물꽃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동양 최대의 백련 서식지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회산 백련지가 안쓰러웠다.

에어컨이 고장난 버스 속에서 공짜 사우나를 즐기며 우리는 다시 화순 땅을 밟았다.
'천불천탑이 천만 개의 돌등을 들고 나와 맞는다 해도,
그게 다 마음 덩어리 아니겠어?'
시인 황지우의 '구름바다 위 운주사'를 떠올리며 절 입구로 들어서는데, 풀밭 위에 편안하게 앉은 부처님, 자연석 앞에 기대 선 부처님들이 스스럼없이 나를 맞으신다. 석실에 등을 맞대고 계신 부처님 두 분은 미소까지 지으신다.

입체가 아닌 평면불상에다 원반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린 탑.
자연석을 기단으로 쌓은 탑에는 천전리 각석에서 보았던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있고 불상의 얼굴 또한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근엄한 표정이 아니었다.
학계의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작품이라고만 추정되었될 뿐 아직도 정확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다 한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화순 인근에 주둔했던 몽고군이 그들의 안녕과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석탑과 불상을 조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군데군데 일으켜 세워놓은 불상을 보며 제주 돌하루방 얘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몽고군이 지나간 자리에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은 애비 없는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성도 이름도 심지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돌에 새겨 자식들에게 묵시적으로 가르쳤다. 네 애비는 이렇게 생겼느니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부끄러운 역사가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탑을 쌓은 사람이 누구이건, 와불을 새긴 사람이 누구이건 형상을 지닌 것들은 비바람에 마멸되겠지만 돌에 새긴 그 불심만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으리.

수많은 사람들이 운주사를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너무 늦게 왔구나.
한 걸음 늦게 출발한 마라토너처럼 늦깎이 인생을 살고있는 나에게 운주사는 또 다른 비애를 느끼게 해주었다.
와불(미륵)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운주사.
늦가을 운주사에 다시 가고 싶다.
잎 떨어진 산기슭 아래 마른 풀숲에서 그때도 석불은 편안하게 웃고 계실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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