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호랑이가 칵 씹어 뱉다 목에 걸릴 넘."
순천을 지나 벌교로 들어서면서 나는 문득 죽산댁이 남편에게 패악 부리는 소리를 들었다.
빨치산에 미쳐 집안일은 내몰라라 하는 남편 염상진을 향해 구정물 퍼붓듯 마구 욕설을 퍼붓던 죽산댁.
그녀는 투항을 거부하고 자폭해버린 남편의 목을 치마폭에 감싸안으며 울부짖었다.
아이고메, 광조아부지...
차창 밖에 보이는 풍경이 모두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다.
산기슭을 하얗게 뒤덮은 꽃이 신기해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쩌~기 허어~컨 넘은 배꽃이고, 삐~런 넘은 복사꽃인개비오."
흰꽃은 배꽃, 붉은 꽃은 복사꽃이라는...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다.
울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순천까지 3시간 여. 하동을 넘어서자 눈에 띄게 차량이 줄어들더니 전라도에 들어서자 도로가 한산한 느낌이다.
국토 난개발에서 살아남은 고장 전라도. 상대적 소외가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졌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국도를 달리며 생각한다. 지금쯤 우리 동네는 꽃그늘 아래 오가는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을텐데.
작천정, 혹은 쌍계사, 진해나 경주의 그 숱한 인파들은 벚꽃보다 화려하고 요란하겠지.
오래된 항아리를 수집하는 친구 따라 문득 길을 나선 3월의 끝날. 무작정 나선 길은 벌교-보성-장흥까지 돌아오자는 계획으로 합의를 보았다.
태백산맥의 현부자집을 찾느라 진트재를 두 번이나 넘나들고 뻘 밭에서 자란다는 짱뚱어탕으로 요기한 뒤 다다른 곳이 보성 차밭.
봇재에서 굽어보는 차밭과 저 멀리 저수지의 풍경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
누가 이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해 차밭을 만들고 방풍림을 조성했을까? 녹차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차밭은 점점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맞은 편 산도, 저 건너편 산도 차밭으로 변모하고 있다.
차나무에는 연초록 새순들이 이제 막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데 머지않아 인근 부녀자들이 몰려들어 차잎을 따기 시작하리라.
곡우 이전에 딴 차를 '우전'이라 하여 최고로 치는데 올해는 4월 20일이 곡우다.
보리밭 고랑처럼 경사진 산비탈에 재배되고 있는 차나무들은 능선을 따라 굽어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햇볕을 많이 받은 쪽은 새순이 올라와 연두빛이 완연하고, 다른 쪽은 작년에 깎은 머리모양 그대로다. 막 이발을 마친 소년같다.
햇볕을 따라 성장하는 식물들처럼 사람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건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줄도 아는 것이다.
승용차 뒷좌석에 겨우 들어가는 항아리 2개를 사 가지고 순천만으로 차를 몰았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군데군데 뻘투성이의 여인들이 삶을 기워나가고 있다. 그들에게 갯벌은 생활의 터전이고, 삶의 전장이다. 수평선까지 아득하게 밀려나가는 바닷물을 낭만적으로 바라볼 정신적 여유는 없으리라.
광양으로 나오다가 문득 매화마을에 들러보기로 한다. 옥곡에서 매화마을까지 길 양편으로 온통 매화나무다. 봄 한철 매화로 뒤덮인 산간마을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렌다.
섬진강을 굽어보는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는 1500개의 항아리들이 사람을 압도한다.
매실의 효능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에게 매실 찌꺼기를 사료로 먹였더니 얼마 후부터 알을 낳더라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세포 부활에 뛰어난 효능이 있는 매실을 엑기스, 술, 차 등으로 상품화하는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나선 김에 하동 쌍계사까지 다녀오려다가 강변을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쌍계사 10리 벚꽃길은 여고시절 아름다운 추억이 묻혀있는 곳. 털털거리는 버스 타고 화개에 내려서 타박타박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춤추듯 떨어져 내리던 꽃잎. 아름드리 벚나무 고목들은 해마다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많은 꽃을 피웠는데...
'토지'의 무대 평사리 최부자집도 생각나고, 태백산맥 염상진의 아픈 세월도 생각게하는 봄날의 여행.
박경리의 토지가 허구인데 비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철저한 답사와 고증의 산물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고 생각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각은 이미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를 넘기고 있었다.
고속도로변, 조팝나무가 하얗게 흔들리는 모습이 경이로워 차를 멈춘다. 라일락도 피고, 등나무 꽃도 보랏빛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바라본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자적 흘러간다.
"안타까워 말아요. 흐르는 강물처럼... 사는대로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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