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관측상 9월 들어 최고 기온이 기록되던 요 며칠.
바다에는 짙은 해무가 끼어 서남단의 외로운 섬 홍도를 찾아가는 내 발길을 무겁게 했다.
울산에서 목포까지 찻길 6시간, 목포에서 홍도까지 뱃길 2시간 반. 지도에서의 표기처럼 홍도는 정말 아득하고 먼 섬이었다.
우리 나라 지도에서 홍도는 별도로 네모가 쳐진 안에 위도와 경도를 따로 표시한 채 안내되어 있다. 그만큼 내륙과 거리가 먼 것이다.
한반도 섬 미학의 상징성을 지닌 홍도는 한국 자연미의 영역을 바다까지 넓혀주고 있다. 발그스레한 빛깔을 띤 홍도의 해안 절벽과 120여 개의 해식동굴, 절벽 위에 기묘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절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350년 전 고씨 할아버지가 최초로 이 섬에 살기 시작했다던가.
첫날, 도착하자마자 배를 빌려 낚시를 나갔다.
홍도 2경이라는 남문바위를 통과할 때, 아치 형태의 기묘한 바위를 머리 위로 스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벅찬 희열, 혹은 자연미에 대한 경외감이기도 했다.
일행은 뱃전에서 구성진 남도 가락을 뽑아냈다. 소리로 한 평생을 살았다는 50대 여인이 뱃노래를 선창하자 문하생들이 덩달아 가사를 바꿔가며 뒤를 이었다.
한 때 영화관의 애국가 뒷배경으로 나오던 남문바위를 지나 제비바위 근처에서 줄 낚시를 드리웠다.
수심 30미터 아래서 놀던 불볼락과 우럭, 놀래기가 순식간에 미끼를 물었다. 퍼덕거리는 힘찬 몸놀림에 서남단 해저의 생명력이 진하게 느껴졌다.
다홍색 몸매의 불볼락은 날카로운 등지느러미에도 불구하고 몸 빛깔이 너무나도 예뻤다. 해저에 무리 지어 사는 그들의 세계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게 살아났다. 문득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해저 2만리'가 생각났다.
두어 시간의 낚시에 60여 수의 고기를 낚을 만큼 어황이 좋았다.
뱃전에서 즉석으로 장만한 볼락회는 어쩌면 그리도 쫄깃하고 감칠맛 나는지. 달착지근하면서도 쫀쫀한 육질이 정말 천하일미였다.
홍도의 일몰은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해는 볼락의 몸처럼 다홍빛으로 구름을 물들이며 수면 위에 마지막 빛을 던졌다.
바다는 갑자기 황금호수로 변해 반짝거리고 나는 두 눈이 멀 것 같아 눈을 뜰 수 없었다.
낚싯배를 타고 오다가 젊은 선장은 문득 먼 고깃배를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아부지, 고기 많이 잡았어라?"
선장은 바다에서 고기 잡는 그의 아버지를 본 모양이었다. 문득 바라본 그 아버지의 얼굴은 해풍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흰 이빨만 두드러지는 노인이었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부자는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근대식 고기잡이로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아들은 컴퓨터 어군탐지기로 현대식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선장실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물의 깊이와 암초의 위치 등이 그림으로 선명하게 나와 있었다.
배낚시를 원하는 손님들이 오면 선장은 그들이 먹을 만큼의 고기를 잡게 해준다. 적당한 위치에 배를 멈추고 줄 낚시를 올리세요, 내리세요 구령까지 붙여준다. 낚시 왕초보라도 몇 마리쯤 거뜬하게 낚아 올릴 수 있다.
홍도의 밤은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감미로웠다.
산을 깎아 만든 홍도 1구 마을 언덕빼기에 20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흑산초등학교 홍도분교가 있고, 그 언덕 넘어 굵은 자갈이 검게 깔린 해수욕장이 나왔다.
밤바다의 낭만은 파래 냄새처럼 싱그럽고 향긋했다. 유난히 분꽃이 많이 피어 있는 홍도. 진다홍 꽃잎은 밤이슬 아래 더욱 청초하게 느껴졌다.
해변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감미로운 파도 소리, 귓불을 간지럽히는 바람, 인적이 끊긴 해변의 적요.
이튿날, 일출을 보러 가자는 제의에 일어났으나 홍도는 완전히 안개에 젖어 있었다. 불과 2-3 미터 앞밖에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을 걸어 마을을 돌아보았다.
천주교 홍도 공소에 서 있던 마리아 상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바다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에게 신앙이란 얼마나 신성하고 절실한 것일까.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유람선을 탔다. 남문바위를 시작으로 홍도를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정도. 배를 운행하는데 통달의 경지에 이른 유람선 선장은 안내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안개가 홍도를 묵어 불고는 통 안 내놓을라 거네요 잉."
홍도가 안개에 묻혀 있다는 말의 재미있는 표현에 관광객들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장의 남도 사투리에는 섬사람 특유의 정감이 흠씬 묻어있었다. 군데군데 사진 찍을 자리에 배를 대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주기도 하고, 어떤 바위는 어떤 각도에서 보라고 상세히 설명을 덧붙였다. 홍도의 해안 절벽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모양도 다르고 감흥도 다르다면서.
동굴 입구까지 바짝 배를 들이대며 해안 절벽을 실감나게 만져볼 기회도 주었다. 해벽의 틈새에 기생하는 각종 폐류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작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동굴 주위는 수심 10미터 이상이 환하게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서 수족관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북발톱'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해벽은 홍갈색으로 시선을 붙잡고,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룬 바다와 섬사람들의 질박한 사투리 또한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승바위, 시루떡바위, 주전자바위, 기둥바위, 석화굴… 모양과 형태에 따라 전설과 이름이 붙은 홍도 33경.
유람선 선장의 구수한 안내로 홍도의 절경을 돌아보다가 선상 포장마차를 만났다. 바다 위에 배 띄워 놓고 유람선을 상대로 회를 파는 선상 포장마차는 나름대로 운치를 더했다.
목포로 나가는 배가 올 때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아서 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홍도의 비경은 물밑이 더 아름답다고 들었으니.
과연, 수초가 우거진 바다 속은 신비스러웠다.
낙엽송 우거진 숲을 해저에 옮겨놓은 듯한 바다 속. 이름 모를 해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혹은 팔을 늘어뜨리고 바닷물에 일렁이고 있었다.
초록으로 하늘거리는 해초의 둥근 잎사귀, 이끼를 등에 업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고둥… 9월의 홍도는 물밑까지 아름다웠다.
1박 2일 잠깐 보았던 홍도는, 짧았던 순간만큼 감명 깊었다.
남문바위를 통과할 때 느낀 전율과도 같은 감흥, 밤바다에 누워 듣던 파도소리, 불볼락처럼 붉은 홍도의 해안 절벽과 그 절벽에 몸을 의탁하고 비바람을 견디는 소나무.
내 영원히 잊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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