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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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여행기 (1)
IP : 218.53.38.250   글 작성 시각 : 2004.08.04 00:01:57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의 ‘선암사’>



지난해 초파일 무렵 영화 ‘동승’을 인상 깊게 보았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승의 해맑은 그리움을 담아낸 그 영화는
한국 전통 사찰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했다.
안동 봉정사, 승주 선암사, 오대산 월정사 등에서
사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골라 찍었다는 그 영화...
어린 스님 ‘도념’이 뛰놀던 배경 속으로 첫발을 디뎠다.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승선교)를 배경으로 고아하게 서 있는 선암사는
화려한 단청이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독특한 모습의 대들보 위로 우물 모양의 천장이 특이한 대웅전.
비바람에 씻긴 겹처마 팔작지붕은 단청이 없어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절로 꼽힌다.
대웅전 앞의 낡은 3층 석탑, 삼인당 연못, 강선루...
자연 암반 위에 쌓은 승선교는 다리 중간 아랫부분에 용머리 장식이 특이한데
전해오는 전설이 다리 모양만큼이나 이채롭다.
조선 숙종 때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려고 백일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했다고 한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는데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던 선암사는
사찰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영화 속의 배경으로 많이 나왔다.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취화선’ 에서 눈여겨보았던 배경이
선암사 일대에서 촬영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고답적인 절 풍경을 간직한 선암사도
바야흐로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 같다.
경내에 신축 건물을 짓느라 기계소리가 요란했으니...
선암사를 유명하게 한 건 해우소와 승선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우소와 무지개다리 승선교.
해우소는 그렇다 치고 승선교 앞에서는 머리가 갸우뚱한다.
한자로 풀이하면 신선이 승천했다는 뜻인데
원래 불교에서는 '신선'이라는 낱말이 없지 않았던가?
신선이나 선녀는 도교(선교)사상에서 나온 말인데
오래전부터 불교에 흡수되어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불교는 유,불,선 합작에다 민간신앙까지
흡수해서 그야말로 퓨전신앙이 된것이다.
대웅전 뒤에 산신각이 있나 하면, 용왕까지 모신 걸 보면
부처님 법이 참 너그럽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두 중생 제도를 위한 방편이겠지.



배롱나무가 유난히 많은 전라도 땅.
상사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승주에서 순천으로 나오는 길은
한가롭다 못해 졸립다.
울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다 보면
섬진강 지나서부터 차량이 확연히 줄어드는 걸 느낀다.
한적하고 조용하고 옛날의 운치가 아직 남아있는 고장,
그래서 나는 전라도 땅을 좋아한다.

순천만 갈대밭 입구에서 관리인을 만났다.
“갯벌 체험장이 어딘가요? 갯벌에 들어가도 되나요?”
아이들에게 갯벌의 생태를 보여주고 싶어서 물었더니
“갯벌 체험이니 탐사니 그런 거 안 해야 됩니다.
서해안 갯벌도 그래서 망쳤어요.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지 사람이 들어가면 다 망쳐요.“
준엄하게 나무라는 관리인의 말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순천만은 갯벌을 살리고 보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단다.
다행이다. 사람에게 즐겁다고 자연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다.

짱뚱어탕이 별미라 점심으로 청했더니
식당 주인은 올해 짱뚱어가 안 잡힌다며 울쌍이다.
뻘밭에서 자라는 짱뚱어로 매운탕을 끓이면 그 맛이 일품인데
올여름 무더위 탓인지 생태계 파괴 탓인지
짱뚱어가 통 안 잡힌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위협하는 재앙이 ‘환경파괴, 교통사고, 우울증’이라고 한다.
3가지 모두 인류를 죽음으로 내모는 현대병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짱뚱어탕 대신 장어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뻘밭에서 자라는 ‘맛’조개를 비롯해 특이한 밑반찬이
장어탕보다 더 맛있다. 힘 내자, 힘!

배를 빌려 타고 순천만 갈대 사이로 들어섰다.
15만평 드넓은 갈대밭 사이로 수로가 열리더니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엔진 소리에 놀랐는지 팔뚝만한 숭어가 물 위로 뛴다.
드문드문 드러난 갯벌엔 철새들이 한가롭게 앉아있다.
선장의 말에 의하면 한겨울 순천만은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한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온 철새들이 황금빛 갈대 위를 날아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해질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정말 좋은 그림이 되겠지!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면서 고기들이 들어왔다 나가는데
한번 들어온 고기가 나가지 못하게 함정으로 세워둔 말뚝(정치망)이
V자 형태로 줄지어 서 있다.
남해안에서 보았던 죽방염과는 다른 분위기다.
햇살은 뜨겁지만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오고 뱃전에 앉은 여심은 즐겁다.
선장의 구수한 사투리와 물을 박차고 높이뛰기하는 숭어,
내가 저를 바라보는지 저희가 나를 바라보는지 모를 철새들...
배가 여자도(섬) 근처까지 나아갔을 때 멀리 고흥 팔영산이 보인다.
닭벼슬 같기도 하고, 굴밤 맞은 머리 같기도 한 모습이 한눈에 알아보겠다.
“겨울에 한번 더 오시쇼 이~ 잘 해 드릴랑께~ ”
선장의 정겨운 인사가 아니라도 올 겨울엔 순천만에 다시 가보고 싶다.
황금빛 갈대 사이로 오밀조밀 이어지는 수로와
짱뚱어 잡는 여인의 굵은 장딴지와 철새들의 군무를 보고 싶어서.



전라남도 일대를 샅샅이 둘러보자는 계획대로 여수를 찾아간다.
다른 건 몰라도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船所)와
진남관은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선소에는 굴강, 세검정지 초석 등 거북선을 만들고 수선하던 유적이 남아있다.
나주 출신 나대용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는 거북선.
도크의 크기로 어림해 보면 배 2척 정도를 동시에 건조했을 만하다.
바다에서 육지로 오목하게 들어온 지점에 도크를 만들고
이순신은 거북선을 건조, 수리하거나 감추어두었다고 한다.
독창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로 거북선을 만들고
수문을 열어 배를 진수할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고 정주영 회장이 만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자랑하면서
우리나라의 조선능력을 세계에 과시했다던 일화가 생각나 웃었다.

돌산대교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20여분을 걸어 진남관을 찾았다.
7월말의 여수는 햇살만 뜨겁게 내리쬐고 바람 한점 까딱 않는다.
시가지에는 종려나무가 심어진 중앙분리대 화단이 특이하다.
여수는 세계적인 미항(美港)이라고들 한다.
특히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남관에 올라보면
여수항의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다.
돌산대교 너머 점점이 떠 있는 섬들과 비취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남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로
지름 2미터가 넘는 기둥이 68개나 받치고 있는 웅장한 객사다.
객사는 선왕의 위폐를 모시고 기일에 제사를 올리며
아침마다 조회를 하면서 한양 쪽으로 절을 올리던 곳이다.
옛날 관아의 중요 건물로 ‘객사’와 ‘동헌’이 짝을 이루는데
동헌이 수령(지방)의 것이라면 객사는 왕(중앙)의 것으로
앙의 직접 통치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해를 향한 암자, 향일암에서는 일출을 봐야 제 맛이다.
암자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고 뒷날 새벽 5시에 일출을 보러 나서는데
수평선에 해무가 자욱하여 장엄한 일출을 못볼 것만 같다.
신새벽인데도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데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암벽 사이를 통과하여 절집에 이르렀다.
향일암은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암 등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나는 개인적으로 낙산사 홍련암이 가장 마음에 든다.)
향일암이 속한 금오산은 ‘자라 오’자를 쓰는데
바위들이 거북등처럼 자연 문양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많다.
향일암에서 내려다보는 지형 또한 바다로 기어드는 거북 형상이다.
기대했던 만큼 멋진 일출을 보진 못했지만
여름날 아침 남해안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감명은 깊었다.
정초엔 해맞이 관광객들만 수천명씩 몰려온다는 향일암.
그래서 그런지 상인들 인심이 사납다. 관광지 인심이 다 그렇지 뭐.

어제 갔던 길을 되짚어 오늘 여수를 빠져나왔다.
벌교천에 놓인 다리, ‘홍교’를 보려고 벌교를 찾았다.
선암사 승선교와 비슷한 벌교 홍교는 옛모습에 현대식을 추가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거의 없어보이는 벌교 땅.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를 둘러보려고 관광안내소에 들렀더니
간소한 프린트물 몇 장을 건네준다.
‘태백산맥 기행로’로 이름 붙은 프린트물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활동했던 무대가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좌익이 우익을, 우익이 좌익을 사형집행하던 소화다리,
정하섭과 소화가 사랑을 나누었던 현부자집 제각,
빨치산의 시체가 효시되었던 역전...
작가 조정래는 역사적으로 가장 굴곡이 심했던 시대를 투영시키는데
벌교를 선택했고, 철저한 고증과 자료수집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한국 문단사에 큰 획을 그은 소설 ‘태백산맥’과 그 무대인 벌교.
그러나 지금도 그 소설을 두고 작가의 시선을 의심하며
소설의 무대를 복원하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단다.


순천만에서 보았던 닭 벼슬 같은 산봉우리, 고흥 팔영산 초입.
한때 호남의 4대 사찰(화엄사, 송광사, 대흥사)로 꼽히던 능가사는
인도의 명산을 능가한다 하여 이름을 바꿨다.
입구의 사천왕상부터 대웅전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득한 느낌.
활짝 열어젖힌 대웅전 안에 부처님이 깊은 상념에 잠겨 계신다.
“중생들아, 이 땡볕에 뭐하러 왔냐?”측은한 듯, 나무라는 듯, 부처님이 나지막히 말씀하신다.
능가사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30여분을 오르니 흔들바위가 나타난다.
말이 흔들바위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변심한 연인의 마음이 이럴까?
1봉부터 8봉까지 암봉마다 이름이 붙어있는 팔영산은 해발 608m로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이 많다.
웅장하면서 섬세하고, 장대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의 암릉들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발 아래를 보자니 아름다운 다도해를 놓치겠고, 수평선을 보자니 발 아래가 위험하다.
군데군데 굵은 쇠사슬과 철제 스텝이 설치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올라 우람한 암봉들이 이어지는 팔영산은
역동적인 암릉미가 월출산에 버금간다. 규모가 좀 작다 뿐이지 암릉미는 대단하다.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대마도까지 볼수 있다는데 오늘 날씨로는 어렵겠다.
나로서는 발 아래 펼쳐지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절경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전국이 불볕 더위로 난리라지만 팔영산 능선에는 바람이 달고 시원하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 서서 바람을 맞는 기분이라니!
중국 위왕의 세숫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 그 산세를 중국에까지 떨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팔영산이 되었다던가.
올라오면서 계곡에 물이 바짝 마른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산 위에서 보니 팔영산의 크고 작은 골짜기마다 저수지에 물을 받아놓았다.
팔영산은 고흥반도의 해안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8개의 봉우리를 다 밟고 탑재로 내려와 원점회귀한 시각이 오후 3시.
입구의 매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청했더니
자칭 ‘팔영산 산신령’이라는 중노인이 다가와 썰(說)을 풀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다는 그는 베트남과 사우디를 거쳐
미국에 3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에 8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배 다른 자식을 세계 각국에 흩어놓고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일까?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처럼 세계를 누비고 다니다가
십수년 전에 고국으로 돌아와 팔영산 기슭에 안착한 남자.
검붉게 그을린 얼굴과 헐렁한 런닝셔츠가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이지만
그의 삶과 생각은 코스모폴리턴 같다.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른 사람들.
세상에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좁은 우물 속에 들어앉아 손바닥만한 하늘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내 삶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비난하지 말자.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삶을 완성한다.’


한여름 등반으로 지친 몸을 잠시 쉬어보려고 보성으로 차를 몬다.
그 유명한 차밭을 일일이 둘러보기엔 시간도 짧고 시기적으로도 늦다.
봄에 새 잎이 돋을 무렵 차밭에 가면 참새 혓바닥같은 새순들이
뾰족뾰족 올라오는 모습이 정말 예쁜데...
보성군은 녹차를 아이템으로 여러 가지 관광상품을 개발해 성공했다.
전국으로 보급되는 녹차는 기본이고, 녹차를 먹인 돼지(녹돈)며
녹차를 바닷물에 우려낸 녹차해수탕 등.
여행한다는 사람치고 보성 녹차밭에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니
보성군 세수의 상당부분이 관광수입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특히 율포해수욕장에서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보성만이 눈앞에 펼쳐지는 바닷가에 녹차해수탕을 만들고
그 옆에는 해수풀장까지 갖추었는데 요즘 애들 말로 ‘분위기 짱’이다.
녹차를 우려낸 해수탕에 들어앉아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풀장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을 즐겁게 내다보기도 한다.
밤이 되자 풀장에는 라이브 공연의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면서
야간 수영을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날씬한 비키니 수영복의 아가씨, 과감한 노출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남자.
여름바다의 낭만은 파격과 자유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율포 해수풀장이
설악산 워터피아나 용인 캐러비안베이보다 낫다.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익명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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