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쓴 단편소설입니다.
'개천예술제'에서 수석 당선한 글인데, 읽어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유치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진지했습니다. 30년도 넘어 누렇게 빛 바랜 교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 글이 실려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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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는 시골 외딴 집에서 산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 석이와 산다.
아빠는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서 그날 하루 먹을 양식을 장만해 오신다. 순이는 지금 석이와 아빠 마중을 나가고 있다.
"누나, 혹시 아버지 술 취하지 않으셨을까?"
"글쎄."
"술 취하심 큰일인데. 또 술이 막 취해서 엄마 때리면 어떡해?"
석이는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나쁜 아버지야 씨! 누난 아빠 밉지 않아?"
"안 미워."
"거짓말. 아빠가 술 취하시면 엄마 막 때리는데도?"
석이는 주먹까지 휘두르며 말한다.
"그만, 그런 말 하면 안돼."
"씨!"
석이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읍내 장터는 순이가 다니는 중학교도 있고, 고등학교도 있다.
순이네 집은 아랫마을과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휘날려갈 것만 같은 집이었다.
그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순이는 중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아빠는 술만 취하시면 엄마와 순이를 못살게 굴었다.
미운 아빠, 정말 미운 아빠다.
하지만 아직 어린 석이 앞에선 차마 아빠가 밉다는 말은 못했다.
이런 저런 생각 하면서 순이는 어느듯 장터가 가까와 온 것을 알았다.
"석아, 저기 아빠가 계신다."
순이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빠는 술집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빠, 어서 집에 가세요."
"뭘 하러 왔니? 돌아가!"
혀가 다 꼬부라진 소리로 나무라신다. 석이는 실망하여 그 자리에 퍼져앉아 울기 시작한다.
"아버지 왜 그렇게 술이 취하셨어요? 아이참! 내일 아침은 또 굶겠네."
중얼거리며 소리쳤다.
"굶어? 내가 왜 굶어. 우리 부산댁이 옆에 있는데 내가 왜 굶어. 히히히 안 그래? 부산댁!"
'아이, 저리 치워요! 술냄새 나요."
부산댁은 아버지를 떠밀어 버린다. 아빠는 술이 취하신 터라 힘없이 풀썩 넘어지신다.
"아빠!"
순이는 달려가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며
"아빠 일어나세요. 장터에서 이게 무슨 창피에요?"
그리곤 순이는 부산댁에게 소리쳤다.
"아주머니, 돈 없다고 너무 괈 ㅔ마세요. 돈이 있을 땐 막 싸고 돌더니 돈 떨어지니까 이러기예요? 왜 , 왜 약한 우리 아빨 못살게 구는 거예요?"
"흥, 약해? 얘야. 어 아버지 좀 조심 시켜라. 골좀 작작 썩이라고 그래. 나도 너 애비한테 골 썩은 것만해도 어이구... 응...."
부산댁은 도리어 순이가 못마땅한듯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순이는 할 말을 읽고 말았다.
그래서 화풀이라도 할듯 아빠를 붙잡고 세게 흔들었다.
"아버지, 지금 엄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어서 가세요. 빨리요!"
순이는 애원하듯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석이는 왼쪽 팔을 잡고 순이는 오른쪽 팔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가면서도 그냥 비틀거렸다.
마을 앞 동구밖까지 왔을 때, 아버지는 그만 물이 괸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초저녁이라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빠지고 만 것이다.
그때 저쪽에서 영자 아버지께서 걸어오신다.
석이는 얼른,
"영자 아버지,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세요."
영자 아버지는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다 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에이그, 이 친구야. 아 글쎄 왜 날마다 이 모양인가? 집에서 기다릴 마누라 생각 좀 해보게. 응? 이 사람아."
영자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아버진 웅덩이에 빠진채 꼼짝도 안하신다.
"이봐, 달삼이. 여편네가 기다린다고 했잖나."
영자 아버지는 몇번이나 말했으나 아버진 막무가내시다.
할수없이 영자 아버지와 순이는 있는 힘을 다해 웅덩이의 아버지를 끌어올렸다.
바지가 진흙 투성이었다.
순이는 영자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집에까지 부축하고 갔다.
싸리문을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뛰어나오시며,
"또 취하신 게로구나."
불평투로 말하며 같이 아버지를 부축하고 마루까지 왔다.
그러자 아버진 기다렸다는듯이 마루에 벌렁 누워버렸다.
"에이그... 원 쯧쯧..."
영자 아버지는 혀를 차며 싸리문을 나섰다.
"예, 고맙습니다... 안녕히..."
어머닌 영자 아버지에게 다급히 인사를 끝내고 마루에 누운 아버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웅덩이에 빠져서 옷이 엉망이었다.
"엄마, 아빤 참 밉다. 그지?"
엄마는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어이구,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이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엄마, 울지마."
순이도 억지로 한마디했다.

이튿날
아버지는 소나기 그친 여름 하늘마냥 엊저녁과 딴판으로 엄마에게 말한다.
"여보, 엊저녁에는 나도 술이 너무 과했나 보우. 용서하구려."
아버진 여전히 읍내 장터로 나가셨다.
아버진 이상하시다.
술이 많이 취하신 날이면 기분이 좋아져서 돈을 마구 쓰신다. 그리곤 집에 와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불을 덮어쓰고 주무신다. 그러나 술이 반쯤 취한 날이면 긴소리 잔소리 다 늘어 놓는다. 이럴 때면 엄마는 으례,
"술만 먹고 오면 글쎄 저렇다니까. 해서 안될 소린지 해서 될 소린지도 모르고... 어휴!"
"뭐? 내가 언제 잔소리했어?"
"왜 긴소리 잔소리 술만 먹으면 지랄이에요? 차라리 죽어 없어지지."
엄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린다.
"뭐? 오오라... 그러니까 넌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죽여라 죽여. 어서 죽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신다.
이럴 때면 석이는 마구 울고 순이는 말리느라 애쓰다가 아버지의 억센 팔에 맞기 일쑤였다.
오늘은 아무 이상 없으시다. 술도 취하지 않으셨다.
술이 취하지 않으시니까 밥도 많이 잡수신다.
엄마는 말씀하신다.
"그것봐요. 술을 안먹으니까 자연 밥을 많이 잡숫지 않아요. 밥을 많이 먹으면 몸에도 좋고..."
그러나 그것도 사흘이 못갔다.
아버지는 도 취하셨다. 그것도 많이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약간 취해서 돌아오셨다.
"여보, 어쩌려구 돈을 다 써버렸어요? 내일은 순이 월납금도 가져가야 해요."
"월납금? 공부도 못하는 게 학교 다녀서 뭐해?"
아버진 공부하고 있는 순이 앞의 책꽂이를 들어 뜰에 팽개쳐 버린다.
"아버지!"
찢어질듯 부르짖으며 순이는 마당으로 내려와 책을 줍는다.
"주울 필요 없다. 너같은 건 학교 다닐 필요 없어."
하시며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와 책을 박박 찢으신다.
"아니, 저이가 미쳤나? 책은 왜 찢어 책은..."
엄마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순이는 순이대로 울며 책을 줍고 어머닌 어머니대로 아버지의 팔을 놓아주지 않으신다.
"이것 놓지 못해?"
아버지의 힘은 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와 승강이를 벌이신다.
"아빠, 용서해 주세요. 아빠 엉엉..."
순이는 무턱대고 울었다.
울면 용서해주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를 사정없이 때리신다. 어머니는 울면서도 말하신다.
"월납금 안내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세상 천지에 어딨어요?"
"왜 없어? 공부만 잘해보라. 뭐라도 없는가?"
"왜 당신은 술만 먹으면 우리 가족을 못살게 굴어요? 차라리 나가든 죽든 하세요. 이젠 구역질 나요."
"아니, 뭐라고? 이년이 환장을 했군. 응?"
아버지는 더 세게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당기신다.
엄마도 이젠 더 참을수 없다는 듯 마구 아버지의 팔을 물었다.
순이도 석이도 가뜩이나 미운 아버지의 손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힘은 어머니와 석이와 순이의 합한 힘보다 몇배다 더 세었다.
아버지가 한번 발로 차버리자 석이와 순이는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악마, 악마! 왜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죽이고 나가란 말이에요!"
약한 엄마이지만 이때만은 그렇지 않으셨다.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의 눈을 쥐어박았다.
(눈을 못쓰게 해야 돼. 눈이 없으면 술이고 뭐고 못먹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그러나 그것은 코끼리 앞의 비스켓 정도, 거센 아버지 앞에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진 어머니의 손목을 비틀고 말았다.
손을 비틀린 엄마는 마치 날개 잃은 백조처럼 맥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흥!"
아버지는 거센 숨소리로 흙이 뒤덤벅 된 발로 신을 신고 나가셨다.
이튿날 아침. 집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이의 찢어진 책을 어떻게하면 좋으냐는 어머니의 흐느끼는 물음에 순이는 우선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간신히 말했다.
"엄마 걱정 마세요. 까짓거 옆자리 짝궁과 같이 보면 되잖아요."
"휴!..."
어머닌 그저 한숨 뿐이시다.
그런데도 아버진 새벽녘에야 들어와선 밥도 안먹고 읍내로 나가셨다.

아버지는 며칠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술이 반쯤 취해서 돌아오셨다. 그러나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 육손이랑 나무하러 가야겠으니 돈 5천원만 주구려."
"돈이 어딨어요?"
"거 있잖아. 여름내 채소 팔아서 모아놓은 돈."
"안돼요. 그건... 내년 여름에 장사할 밑천이에요."
"장사? 장사는 내가 할테니까 당신은 잠자코 있어. 나만 장사 잘하면 당신은 마음대로 호강할 수 있어."
"............."
어머니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돈을 내주었다.
엄마는 지난 여름 가만히 앉아 놀고 먹을 수도 없고 해서 채소 장사를 한 것이다.
피땀 흘려 모은 돈 1만원, 그 중에서 반을 잘라 아버지의 자본으로 준 것이다.
어머니는 새벽차로 떠나라고 했건만 아버지는 꼭 이 밤으로 떠나야겠다고 하시며 싸릿문을 나섰다.
내일 모레 쯤은 꼭 돌아오마고 약속을 하시고...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이 잘못이었다.
이튿날 오후 5시가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들어오신 것이다. 잔뜩 술에 취하셔서.
"아니, 웬일이에요? 여보!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다니... 그리고 나무는 어찌 됐어요?"
엄마는 다그쳐 물었으나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방에 그냥 쓰러져 주무시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순이는 겁이 덜컥 났다.
어머니는 순이더러 석이와 집을 보라 하시곤 빠른 걸음으로 싸릿문을 빠져나가셨다.
엄마는 뛰었다. 5리 되는 장터길을 빠른 걸음으로 달려 부산댁의 술집에 들어가 물었다.
"부산댁, 혹시 어제 저녁 우리 순이 아범 무슨 일 없었소?"
"아무 일도 없었어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부산댁의 살짝 찢어진 눈동자 속엔 무엇인가 알고있는 듯한 야릇한 미소가 스친다.
"내가 모를줄 알아. 빨리 대! 빨리 대지 못하겠어?"
어머니는 부산댁을 꼬집으며 마구 큰소리를 질렀다.
'아야 아야 아야... 말.. 말할게요. 놔 줘요."
"그래, 어서 말해."
어머니는 숨을 돌리며 말했다.
드디어 부산댁은 할수없다는 듯 사실대로 자백했다.
'실은... 어젯밤새도록 화투를 했답니다."
"그래서?"
"돈 5천원을 다 날리고..."
"또?"
"육손이에게 5천원을 꾸어서 그것마저 잃었어요."
부산댁은 자기가 돈을 잃은 것처럼 힘없이 말한다.
"뭐? 아이고, 아이고... 분해라. 네 이년, 네가 노름을 시켰지? 그렇지?"
엄마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부산댁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었다.
"내가 언제 시켰어? 봤어? 봤단 말이오?"
"그래, 네가 시켰어. 분명히..."
"참 아주머닌 왜 나만 보면 신경질이에요? 하지 말라니까 자꾸 하는 걸 어떡해요? 네? 절더러 어떡하냐구요."
부산댁은 오히려 제가 잘한 것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는 대꾸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 틈에 모였는지 어머니와 부산댁의 주위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있었다.
어머니는 순간 놀라서 부산댁의 술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숱한 사람들 시선이 엄마의 뒤를 쫒아오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집으로 달려온 엄마는 우선 아버지를 찾았다.
당장에라도 깨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치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있어야할 아버지는 없어지고 이불을 개어놓은 자리가 엉망이고 장농 문도 열려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집안은 온통 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순이와 석이는 멍청히 넋을 잃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아니, 이.. 이럴 수가... 순이야 아버진 어디 가셨니, 응?"
"엄마. 아버진 나가셨어. 돈 5천원 가지고..."
힘없이 말하는 순이의 눈엔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뭐? 돈 5천원을?"
엄마는 놀래서 장농 밑을 뒤져보았다.
없었다.
5000원. 그게 어떤 돈인데...
어머니는 통곡을 하시며 운다. 눈이 퉁퉁 부어 앞을 잘 보지 못할만큼 울었다.
순이도 석이도 엄마따라 울었다.
미운 아버지!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만 고개를 쳐들 뿐이었다.
다음날 새벽 1시나 됐을까?
분함을 못이겨 밤을 지새고 있는 어머니 귀에 분명히 싸릿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다.
"뭘 하러 들어오는 거예요? 나가요! 나가!"
방문을 벌컥 열며 뜰로 나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순이는 잠이 깨었다.
아버진 술이 취하신 모양이다. 거센 어조로 엄마에게 대들었다.
"날더러 나가라고? 못나간다 못나가. 나갈라문 네가 나가라!"
"내 돈 내놔요. 내 돈! 내 돈 어딨어요!"
"돈 없다."
"어떡했어요? 빨리 내놔요. 여름내 피땀 흘려 모은 내 돈."
"빛 갚아줬다. 왜?"
"뭐라구요? 아이구... 그렇게 남의 돈이 눈에 왔다 갔다 하슈? 그렇담 나를 팔아다 노름을 해요. 어서요 어서."
어머니는 마루에 있는 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쥐어주었다. 정말로 죽이라는 것처럼.
순이는 놀래 뛰어 나갔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휙 스쳐갔다.
"이게 왜 이래, 응?"
아버지는 찌를듯이 덤벼들었다.
"죽여줘요. 죽여줘요! 소원이에요! 이젠 더 이상 살기 싫어요. 어서 죽여줘요. 어서!"
어머니는 고함을 질렀다.
"이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버지는 무턱대고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날랜 칼 아래는 순이가 끼어들었다.
어머니 대신 순이가 맞은 것이다.
칼은 순이의 어깨에 내려꽃혔다.
순간, 엄마와 아빠는 다같이 놀래어 순이를 불렀다.
어깨에서 쏟아지는 빨간 피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를 뿐 순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말할 겨를도 없었다.
아버지는 순이를 등에 업고 병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울며 같이 뛰었다.
하늘은 시커먼 먹물을 부은 것같이 캄캄하다.
오늘따라 별도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길을 분간할 수 없엇다.
그래도 순이를 업은 아버진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순이의 어깨에 흘러내린 피는 아버지의 옷에도 흘러내려 온통 피가 뒤범벅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저만치 하얀 건물이 희미하게 눈에 띈다.
새까만 천지에도 하얀 물체만은 희미하게나마 나타나 있었다.
병원에 닿은 엄마는 마구 병원문을 두들기며 큰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여봐요. 의사 선생님. 급한 환자입니다. 빨리 문좀 열어 주세요."
잠시후, 병원의 불은 켜지고 의사가 졸리운 눈으로 나왔다.
"이 아이를 보아주십쇼."
"아, 아니...이 피! 어쩌다가 이렇게 됐소? 어서 들어오시오."
의사는 얼른 순이르 수술실로 옮기라고 간호원에게 명령했다.
의사는 급히 서둘렀다.
순이는 수술실로 옮겨지고 아빠와 엄마는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게 되었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살인자! 당신은 살인자예요. 왜 저를 죽이지 순이를 죽이는 거예요? 당신은 교도소에 가야 해요."
"후... 그래, 난 살인자야. 내가 잘못한 거야. 천사보다 착한 우리 순이를 죽도록 만들다니...그리고 아무 죄 없는 당신을 괴롭히고..."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난 벌을 받아야 할 인간이야. 여보 순이엄마. 내가 죽거든 순이에게 말해주오. 이 애비가 죽을 죄를 지었더라고...
엄마는 돌아앉아 흐느껴 운다.
아빠도 슬픔을 참지 못해, 아니 잘못을 뉘우치며 돌아앉아 울었다.

꼬끼오!
첫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순이가 들어갔던 수술실의 문은 열리고 의사가 한숨을 돌리며 나왔다.
"어떻겠습니까? 의사 선생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물었다.
"출혈이 매우 심하군요."
"에? 그럼 죽는단 말입니까?"
어머니가 놀래서 말한다.
"예... 그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수혈을 하지 않으면..."
"그럼, 이 병원에 피가 없나요?"
"네...우리 병원은 소규모라서..."
"큰 병원으로 옮기면 되잖습니까?"
"안됩니다. 가는 도중에 목숨이..."
"그렇다면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아닙니다. 제 피를..."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자기의 피를 뽑아달라고 의사에게 애원했다.
"두분의 의사가 그러시다면 할수없군요. 우선 혈액형을 검사하죠."
"순이는 나 때문에 죽게 됐어요. 나는 죽어 마땅할 놈이에요. 제 피를..."
"아니에요.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순이는 제 대신 죽게 됐어요. 어서 제 피를 뽑아 주세요."
'아아. 서두르지 마세요. 결과는 혈액형 검사가 결정하니까요."
의사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간호원을 따라가라고 시켰다.
"간호원! 이 사람들 혈액형을..."
"네!"
얼마후 혈액형 검사 결과는 엄마였다.
결국 어머니가 순이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셈이었다.
"간호원, 속히 수혈 준비를 해놔요. 그리고 아주머니 잠깐..."
의사는 엄마더러 저쪽으로 가라는 시늉을 한다.
"아주머니, 제 말 명심해서 들어주십쇼."
병원 모퉁이에 선 의사는 아주 심각한 태도로 말한다.
"아주머니 딸은 출혈이 심합니다. 조금만 피를 더 흘렸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어요."
"........."
"만약에 아주머니의 피를 딸에게 수혈한다면 아주머니는 피가 모자라 혼수상태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보람은 순이에게 있어요. 이제까지 저는 순이 혼자 보며 살아왔답니다. 만약 걔가 죽는다면 나도 심장병으로 죽고 말거예요. 그러니 기왕 죽을 목숨 딸에게 바치겠어요."
'아주머니. 감격했습니다. 정말 감격했습니다...아주머닌 정말 마음씨가 비단같이 고우신 분이군요."
의사는 탄복한듯 어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곧 순이의 수술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기어이 숨지셨다.
손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그리고 여보.. 순이가 깨어나도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완전히 나아 퇴원할 때, 그때 말해주세요. 이 못난 에미는 예쁜 순이 얼굴도 채 못보고 죽었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순이의 수술은 끝나고 입원실로 옮겨졌다.
순이는 정신을 차리고 부시시 눈을 떴다.
"엄마!"
"아, 순이야. 정신이 드니?"
"싫어요. 아빤 미워!"
순이는 휙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래, 이 애빈 못난 놈이야. 순이야. 이 애비가 밉지? 그렇지?"
"아...아니야. 아버지.."
"고맙다. 순이야. 용서해줘서..."
순이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나는지
"참, 아버지. 엄마는 어디 갔어요?"
"으응.. 저..집에 가셨단다."
"그럼.. 석이는?"
"석이? 아참 석이를 집에 두고 왔구나. 순이야 가만 있거라. 내 곧 집에 다녀올게."
"응..."
아버지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아버지는 선채로 말씀하셨다.
다음 순간, 순이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순이의 입원실에 들어선 사람들은 영자 아버지와 석이가 아닌가.
"누나!"
"석이야!"
순이와 석이는 마구 울었다.
'어떻게 알고 왔나?"
반갑고 기쁜 가운데도 의아한 아버지가 물었다.
"부산댁을 통해 알았지. 어제 저녁... 아니, 새벽녘이지. 자네와 자네 부인이 순이를 업고 이 병원을 향해 뛰어가더라는구먼. 자세히는 못봤지만 꼭 그것이 자네 가족 같더라고 말이야."
"으응..."
"그런데, 이봐. 달삼이 자네 부인은 어찌 됐나?"
"쉿! 애들이 들어!"
"뭐요? 엄마요? 엄마는 어디 계세요?"
눈치 빠른 순이가 얼른 대꾸한다.
"으 으응... 저..."
머뭇머뭇 대답을 못한다.
"이 사람 어떻게 된건지 자초지종 말좀 해보게."
"잠깐 나가세. 내가 얘기해줄테니.."
아버지는 영자 아버지와 함께 나가신다.
"석이야. 이리 와 봐."
방에 혼자 남은 것을 알자 순이는 석이를 불렀다.
"왜 누나?"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
"응."
"그렇다면 저 열쇠 구멍으로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지 들어봐."
"뭘 하려고 그래?"
"엄마의 소식이 궁금해서 그래."
"좋아, 누나!"
석이는 누나가 시키는대로 열쇠 구멍으로 귀를 갖다대었다.
밖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또렷이 들려왔다.
"으음.. 안됐네 그려. 일평생 순이에게 의지하며 살았는데..."
영자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쉿! 음성을 낮추게. 애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네. 순이가 퇴원한 후에 말하라고 했으니까."
"알았네."
아버진 영자 아버지와 함께 복도로 걸어 저쪽으로 걸어가시는 것 같았다.
석이는 얼른 순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되셨대?"
"주...죽었대나 봐."
"뭐 죽었어?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순이는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잠시후 문이 열리며 아버니와 영자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 아버진 우리들에게 숨기는 게 있으시죠? 그렇죠?"
"내가 뭣을 숨겨?"
"거짓말, 아버진 거짓말장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말도 안해 주시고.."
"뭐? 너희들 그 얘기 어디서 들었니?"
아버진 순이와 석이를 번갈아보시며 말씀하신다.
"그래요. 그랬군요. 역시 그랬군요."
순이는 흑흑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순이야. 진정해라. 운다고 살아오실 엄마가 아니잖아."
아빠는 순이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순이는 막무가내다.
머리 속에 가득찬 엄마 생각으로 순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칠사이가 없었다.

순이는 1주일 후 퇴원했다.
그러나 의사는 치료비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저어...선생님. 치료비는 얼마나 됩니까?"
짐을 다 꾸리고 난 아버지가 의사에게 물었다.
"입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네? 걱정을 안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주머니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씨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희생. 그것이 바로 모정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어머니. 전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아주머니의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해서 저는 입원비를 안받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에겐 굉장히 손해가 될텐데요?"
아버지는 그런 의사의 말을 한사코 거절했다.
"괜찮다니까요. 보아하니 돈도 많이 있을것같지 않으신데 그만 두시죠."
"그 그렇지만..."
"아아 괜찮다니까요."
의사는 아버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아버지와 순이는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했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순이와 석이와 아빠는 그동안이나마 정들었던 병원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병원에서 쭈욱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다.
수많은 영혼들이 잠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무덤을 향해 아빠와 순이와 석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엄마의 무덤이었다.
엄마의 무덤 옆에는 소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고,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 소나무는 아버지가 심고 비석은 의사 선생님께서 주셨단다.
"아... 고마우신 선생님..."
의사 선생님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아버지와 석이와 순이는 옷깃을 여미며 엄아의 무덤 앞에 고개 숙였다.
"고마우신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만 계신다면... 흐흑..."
순이는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비록 땅 속에 묻힌 엄마지만 순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슬퍼하실까봐 조심스레 울었다.
순이는 가지고 갔던 장미와 백합을 비석 앞에 놓고 산을 내려왔다. 아바와 석이와 다정히 손목을 잡고...

순이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비록 엄마는 안계시더라도 지금 곁에는 아빠가 계시지 않은가....그리고 석이도..)
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산 머리엔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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