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야, 쓰레기차 왔다."
새벽의 미명 속에서 갑자기 삼베폭을 찢어내는 소리.
달콤한 잠의 늪에 흠씬 빠져있던 나는 잠에 젖은 채 허우적 허우적 이불 속에서 기어나왔다.
"어째서 넌 날마나 깨워야만 일어나냐? 내 목에 피 올라오겠다."
반쯤 감긴 눈으로 쓰레기통을 더덤는데, 아침마다 꼭 그 시간에 재방송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쓰레기통 위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두고봐라. 두고봐. 내가 이렇게 백수건달로 천덕꾸러기 취급은 받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청소차 뒤에 줄을 서면서 나는 이빨을 뽀드득 갈아부쳤다.
그래, 오늘이다. 오늘이야말로 어머니와 누이를 깜짝 놀라게 해줄테다. 그동안 나의 무능력과 무기력에 대한 온가족의 우려에 대해 내 오늘 감쪽같은 보상을 해주리라.
아아, 얼마나 고난에 찬 세월이었던가. 육순을 바라보는 노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이 누이 저 누이 용돈 받아가며 전문대학이라도 다닐 땐 그래도 좋았다.
졸업하고 내리 몇달을 놀기 시작하니 집안 분위기는 서서히 변해갔다. 어어, 이게 아닌데... 싶어셨겠지들.
누이들의 눈빛에서 실망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도 1년을 더 유유자적하고만 있었더니 온 집안의 탄핵이 퍼부어졌다. 나에게 붙여진 백수라는 별명도 그때 얻게된 것인데, 뼈 있는 농담 쯤으로 가볍게 받아넘겼던 그 백수가 어느새 내 진짜 이름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어머니의 입에서마저 이젠 자연스럽게 백수야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누이들의 말인즉 이 집안에서 내가 필요한 건 쓰레기 비울 때 밖에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깐 쓰레기 비우는 일이사 여자들도 할수 있으니 염려말고 하루빨리 집을 떠나라는 주장이었다.
사내대장부답게 산천을 누비고 다니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한 마디로 탁 트인 남자가 되어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참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누이들.
아버지도 안계신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 뿐인데 날더러 집을 나가라니... 그럼 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낮에도 사방에 늑개가 우글거리는 세상에 과년한 처녀가 셋이나 사는 집을 비무장지대로 그냥 두고 떠나다니...겨우 늙은 호랑이 한마리로 울타리를 지키게 놔두고 말이다.
누이들은 나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머니까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셨다.
내가 얼마나 어머니와 누이들을 사랑하는지, 호시탐탐 어진 양들을 노리는 늑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런 불타는 사명감 내지는 집안 유일의 남자로서 책임감 때문에 나는 이 좁은 땅덩이를 떠날수 없었고 따라서 취직자리가 서뜻 나서지 않았다. 오랜 기간 나는 고심했다.
누이들을 지키며 아울러 나 자신에게도 의미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그 끝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작가가 되는 길이었다.
작가가 되면 이 집안을 떠나지 않고도 일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알고보니 작가란 직업은 인류문화에 이바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정신노동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학서적을 높이 쌓아놓고 탐독을 거듭했따. 그리고 그것을 토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간 누차에 걸친 누이와 노모의 독촉, 단도직입적인 멸시까지 참으며 오늘날까지 내가 이 집안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나의 작가로서의 야망이 무엇보다도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1년여 동안 나는 펜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마침내 살을 저며내는 고통 끝에 한 작품을 얻기에 이르렀다.
열흘 전에 나는 산고를 치르며 낳은 아들을 신문사에 보냈다. 우체국 여직원의 존경스런 눈길을 느끼며...
신문사의 발표 날짜를 감안한다면 분명 오늘 안으로 당선자에게 개별통지가 와야 한다. 나는 벌써 당선소감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어쩌면 인터뷰를 위해 신문사에 직접 가봐야할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심장이 약하시니까 갑자기 놀래드리면 안되겠지. 아...마음 약한 누이들은 그동안 나를 구박한 게 얼마나 마음에 걸릴까?)
내가 라즈니쉬니 크리슈나무스티를 읽을 때
"백수, 형이상학적으로 즐기시네!"
하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던 셋째 누이는 얼마나 속이 아플까?
용서하자.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도록 하자.
오늘 내게 배달될 신춘문예 당선 통보야말로 오늘날까지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백수 이미지를 한순간에 뒤엎을 것이다.
하루종일 내 신경은 대문 밖으로 쏠려 있었다.
"양말용 씨, 당선 전보입니다."
골목 어귀로부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배달부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만 같다.
(일백만원의 상금은 고스란히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적지 않게 신세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순간 나는 갈등을 느껴야 했다.
그들이 내가 당선된줄 알면 감꽃에 벌떼 달려들듯 모려올텐데... 그래, 은혜를 저버리면 안되지. 최소한 그들을 위해 맥주파티 정도는 열어주어야 할텐데... 나는 점점 심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냐, 신세진 이웃이냐.. 그때였다.
"양말용 씨, 양말용 씨 계십니까?"
갈등의 크라이막스 부분에서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닷없는-이라론 했지만 사실 얼마나 저 목소리를 기다렸던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참아야 해. 작가란 모름지기 감정의 표현을 절제할줄 알아야 하니까. 나는 최대한의 무표정을 가장하고 밖으로 나갔다.
"양말용 씨 되십니까"
어? 그런데 그는 가끔 보이는 배달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점프 차림의 해말간 청년이었다.
그 순간 번개처름 스치는 생각.
(아, 그렇군. 신문기자로군. 신문사에서 시일이 급하니까 특파원을 보낸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렇게 마당에 서 있게 할수는 없다. 주머니엔 달랑 담배값 밖에 없지만 어디 분위기 있는 다방에라도 가서 차를 마시자로 해야 겠다.
"제가 양말용입니다. 필명은 양현석이지요. 잠깐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 밖으로 나가실까요? 다방에라도..."
그의 얼굴에서 언듯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 알고 있습니다. **신문사에서 오셨죠?"
너같은 애숭이 기자쯤이야 첫눈에 알아본다는 듯이 나는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저, 사실은..."
그는 갑자기 굳어지는 듯했다.
"아, 잠깐 잠깐.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 서서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우리 밖으로 나갑시다. 제가 좋은 곳을 안내하죠."
그의 눈동자가 넘점 확대되는 것 같았다.
햇병아리 기자라 할수없군. 하지만 최대한 잘 보여야지.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내 첫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그럴싸하게 나가야 할텐데.
"아, 저는 시간이 없는데요. 다른 집에 또 가봐야 하니까요."
청년이 멎적어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집? 아니 신춘문예 당선가가 나말고 또 있단 말입니까?"
"네?"
그와 나의 열띤 눈길이 마주쳤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저...뭔가 잘못 알고 계신가 봅니다..."
내 얼굴을 살피며 그는 가엾도록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저... 저는 이번에 **신문사 지국에 입사한 수금사원인데요. 이 댁에 신문대금 3개월치가 밀렸다고 해서... 저.. 그걸 받으러 왔을 뿐인데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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