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웰빙 바람이 불었으면>



산행에서 돌아오면서 주유소에 들렀다. 휴일 끝이라 나들이 차량이 많았는지 주유소 마당이 꽉 찼다. 엊그제 비가 내려서 자동세차기 앞에도 승용차가 줄을 섰다.
차례를 기다려 기름을 넣고 세차를 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차를 빼는데 바로 앞에서 두 여인이 삿대질을 해가며 싸우고 있다. 50대 후반의 세차장 여종업원과 30대 중반의 여성 고객.
"아줌마가 뭐야? 종업원이면 고객에게 서비스를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서비스도 오늘 같은 날은 다르지. 저렇게 차들이 밀려있는데 어쩔수 없잖아."
이 주유소에서는 고객들에게 콤프레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인은 승용차 내부 세차를 위해 콤프레샤를 쓰겠다고 우기고, 늙은 여인은 영업용으로 자신이 먼저 써야겠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내부세차 손님이 줄을 선 상황에서 늙은 여인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되건만, 젊은 여인은 허리에 손을 얹고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사장 오라고 해. 사장! 고객이 왕이라면서 고객 접대를 이 따위로 해도 돼?"
길길이 뛰면서 유료세차 고객을 위해 자신이 콤프레샤를 양보할 수는 없노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기름 넣고 가던 손님들이 차를 멈추고 기가 막혀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겉보기엔 말쑥하고 세련된 여자가 어머니뻘 되는 종업원에게 패악을 부려대는 꼴이라니. 한데, 그 남편은 한술 더 떠서 빙글빙글 웃으며 차를 닦고 있다. 마치 아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저 남자는 아마 집에 가서도 굽신거리며 아내를 여왕 모시듯 할 것이다. 요즘 남자들이(물론 일부겠지만) 허약해도 너무 허약해졌다. 과연 저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할까? 저보다 못하거나 지위가 낮아 보이면 여지없이 밟고 무시하고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엄마 밑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까?
국민소득 1만불을 훌쩍 넘어선 이 시대. 그러나 잘사는 것 보다 '제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남을 배려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잘 먹고 잘 사는 웰빙 바람보다 제대로 살줄아는 '신 웰빙'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4월27일)

<들뜬 마음을 누르고 >

직장을 가졌건 안가졌건 요즘 여성들 무척 바쁘다. 직장여성보다 전업주부가 더 바빠 보인다. 차밍댄스에다 에어로빅, 헬스, 찜질방 다니느라 설거지는 뒷전이다. 점심을 집에서 먹는 여자는 인간성이 나빠서 친구가 없거나, 아프거나,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라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주부가 드물다. 아파트 계단청소 하려고 사람을 모으면 10가구에 한두 명 나온다. 누구 엄마는 수영하러 가고, 누구 엄마는 스포츠댄스 갔단다.
내 생각이 잘못된 건지는 모르지만 요즘 우리 여성들은 뭔가에 들떠있다. 한시도 집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돈다. 이성적인 것보다 감성적인 것,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 순간순간 즐길 수 있는 일에 매료되어 시간을 보낸다. 문화센터의 수많은 강좌 중에서 인기가 높은 것은 댄스나 노래교실 같이 동적인 강좌라고 한다. 서예나 꽃꽂이 같이 정적인 강좌는 회원 숫자가 나날이 줄어 끝내 폐강되곤 한다.
나는 책 읽는 게 좋아서 모 도서관 독서회에 가입했는데 3년전이나 지금이나 회원 숫자가 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도 책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이렇게 나가다간 나중에 도서관에서도 무슨무슨 댄스 교실이 열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교실도 대중의 선호에 발을 맞추는 게 현실이니까.
머리를 쓰는 일보다 몸을 쓰는 일이 쉽고 즐겁다. 머리를 쓰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몸을 쓰면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어려운 일에 머리 쓸 것 없다. 쉽고 즐겁고 편한 일만 찾아서 즐겁게 살아보자. 이런 심리들이 알게 모르게 확산되는 조짐이 든다. 걱정스럽다.
IMF체제를 뼈아프게 겪고 아파트값 폭등을 망연자실 지켜본 뒤 여성들은 허망해진 가슴으로 마침내 자포자기를 한 것일까? 안먹고 안쓰고 아껴봤자 소용없더라. 책 몇권 읽는다고 인생이 달라지나. 오늘 이 순간 즐겁게 놀고 건강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지.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지배하게 된 건 아닐까?
여성들이여,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자. 들뜬 마음을 누르고 허망한 가슴을 잠재우고 보다 지적인 일에 몸과 마음을 던져보자. 그대들 지친 영혼이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5월11일)

<영웅은 없다>
언양 장날, 국밥집에 들렀다. 소머리국밥 파는 할머니 한숨 쉬며 하는 말,
"장사도 너무 안된대이.... 세상이 우찌 될라 카노?"
국밥집에 앉았던 손님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대통령 때문이라는 둥, 정치권 탓이라는 둥, 걸핏하면 데모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둥. 남의 탓 대기 좋아하는 사람들, 난세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누군가 영웅이 나타나 이 난국을 타개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얼마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 씨가 TV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에는 대중들에게 영합하는 지도자라 칭하는 사람들만 득실거리지 카리스마를 가진 진정한 영웅은 없다.''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나를 따르라'하는 지도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중은 영웅을 기다리는 것일까?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생각보다 어떤 특출한 사람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난세에 영웅이 출현한다는 건 전제군주시대에나 맞는 말이다. 그 시대에는 대중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영웅에게 수많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릴 수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주시대엔 영웅이 존재할 수 없다. 대중은 난세를 헤쳐나갈 영웅을 기다리지만 요즘 대중의 비위에 딱 맞는 영웅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워낙 대중들의 욕구가 다양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대중이 변해야 하지 않을까? 난세를 대통령 탓으로 돌리거나 정치권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난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남더러 변하라 하지말고 나부터 변해야 한다. 세상이 각박하고 인심이 사납다고 말하지 말고 우선 나부터 좀 너그러워져 보자. 내가 변하면 이웃이 변하고, 이웃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덥지 않은 여름이 없고 춥지 않은 겨울이 없다는데, 어느 세월인들 마냥 편하게만 살겠는가? 덥다고 아우성치고 춥다고 앙탈부리면 세상이 달라지는가?
국밥집 할머니, 장사 안되는 거 대통령 탓 아닙니다. 정치권 탓도 아닙니다. 혹시 할머니 손맛이 변하진 않으셨나요? (6월2일)

<사람도 리모델링>

십 년 넘게 한 아파트에 살았더니 어느 날부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낡은 외벽부터 유행에 뒤떨어진 실내 인테리어까지 다 보기 싫었다. 요즘 분양되는 새 아파트들처럼 실내 구조를 쌈박하게 바꾸고 싶어졌다. 3베이나 4베이로 아파트 기본 구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주방이나 욕실, 도배장판만 다시 해도 새집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일도 시작하기 전에 겁부터 났다. 1주일 동안 온 집안이 먼지투성이가 될 것이고, 소음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며 온 가족의 생활 리듬이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기술자를 불러 견적을 내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1주일에 걸쳐 온 집안을 리모델링했다. 안보이는 바닥 배관부터 눈에 띄는 도배장판까지 싹 갈아치웠다.
이웃들이 구경 와서 모두 한마디씩 했다. “어머나, 새집 같네요!” 코가 매운 방부제 냄새조차 새집 분위기로 느껴져서 싫지 않았다. 지인이 무심코 한 마디 던졌다. “사람 빼고 이 집은 모두 새것이네요.”
아, 나는 그 말에 감전된 듯 놀랐다. 집을 새로 고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일이 더 급한 일이었는데. 변화를 요구하는 내면의 소리를 엉뚱하게 바깥에서 찾다니. 아파트 리모델링으로 기분전환이 된 건 잠시고, 정작 다급한 건 나 자신을 리모델링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나이 들면 누구나 점점 고루해지고 고집스러워진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길 즐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싶은 생각으로 쉽게 편한하게 살아갈 궁리만 하게 된다. 지천명이 낼모렌데 무슨 욕심을 더 부리랴.
그러나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면서 느꼈다. 사람도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집이 낡으면 수리나 개조가 필요하듯이 사람도 나이 들면 스스로를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것을.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도 좋고,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리라는 생각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는 다르게 살겠다는 각오로 자신을 리모델링을 해야겠다.
“나는 돈 쓰는 기계예요.” “나는 이제 한물 갔는데요 뭘.” 자포하기하는 여성들이여,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리모델링 해볼 생각 없으신지? 아파트처럼 기본 골조는 못바꾸더라도 실내장식을 싹 바꿔 지금부터 새사람으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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