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이틀째를 맞은 고래박물관을 찾아간다.
도로표지판에 고래박물관 가는 길을 표시해놓아 반갑다.
2차선 길 좌우로 한쪽엔 고래고기 파는 낮은 집들이,
반대편엔 고래박물관이 우뚝 서있어 이채롭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발길 닿기가 힘든 장생포,
고래박물관 덕분에 나는 오늘 191번째 유료관람객으로 장생포에 왔다.

살풍경한 공장 건물들이며 길가의 낡은 집들이 쇠락해가는 장생포를 실감케 한다.
부흥을 꿈꾸기엔 너무 늦었다는 느낌,
옛날의 영화를 돌려달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고래박물관의 압권은 아무래도 브라이드 고래뼈 표본.
죽은 고래를 2년동안 모래 속에 묻어 살을 발라낸 뒤
고열의 물에 담가 기름을 빼고 고래뼈를 조립했다고 한다.

길이 12.4m의 거대한 고래뼈에 압도되어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는 내 가슴이 콩당거린다.
장생포 앞 바다에서 금방이라도 귀신고래가 물 위로 솟구칠 것만 같다.
영상관에서 보는 귀신고래의 유영 장면과 울음소리는 왠지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고래 울음소리가 어쩐지 사람과 비슷하다.
억눌린 슬픔을 호소하는 듯한 울음소리.
돌아가야 할 바다를 잃어버린 고래의 울음소리다.
오츠크해에서 1만7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동해로 회유해야할 귀신고래는
지구 환경의 변화로 어디선가 길을 잃고 말았다.

영상관을 나오면서 왠지 미진한 생각이 든다.
시설에 비해 자료가 빈약한 느낌이랄까?
짧은 영상을 연속으로 돌리며 귀신고래를 그리워하는 게 최선일까?
다큐멘터리가 없으면 ‘모비딕’이나 ‘프리윌리’같은 고래 관련 영상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잠시 둘러보고 가는 박물관이 아니라 오래 감상하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박물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고래를 소재로 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 같다.

또 박물관 한 켠에 고래 관련 서적(소설, 시집, 동화 등)을
전시해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근래에 나온‘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처럼 대중적인 책도 좋고
전국 시인들이 참여한 ‘고래시집’도 괜찮지 싶다.
고래가 인간과 얼마나 밀접한 동물인가, 우리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를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녹슨 작살과 함께 염분에 얼룩진 항해일지에는
00시 고래 발견, 00시 명중, 금일 0마리 포획 등의 글씨가 눈에 띈다.
포경을 생업으로 삼았던 선원들의 글씨엔 굵은 땀방울이 느껴진다.
반구대 암각화에 각인된 사람과 이 항해일지를 쓴 사람 사이엔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
그 맥이 장생포의 역사이고 울산 역사의 한 부분이다.
고래도시 울산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고래 수염 좀 봐라. 저게 진짜 맛있는 건데...”
“저 사진 속에 있는 남자가 지금 환갑이 넘었지. 장생포 떠난 지 오래야.”
관람객들 대부분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개관한 지 이틀째이니 아무래도 인근 주민들이 먼저 와보는 것 같다.
고래잡이가 성행하던 시절, 집채만한 고래를 깨고 마을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진을 보며 웃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은
박물관 옆에 붙박힌 제6진양호처럼 전시용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테라스로 나가 장생포 앞바다를 조망하고 나오는데
박물관 마당에 우뚝한 시비(詩碑) 하나가 눈에 확 띈다.
장생포청년회가 자랑하는 노영수 시인의 장생포타령이 비문으로 새겨져있다.
문학 경력이 일천한 탓인지
나는 그 詩가 장생포를 대변하는 명작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겠다.

더군다나 웬 시비가 그렇게 크고 위풍당당한지,
왜 하필 그 장소에 서있는지 생뚱맞은 느낌이 든다.
복원된 제6진양호 뒤에 초라하게 서있는 ‘극경회유해면’ 표지석을 보니
두 비석이 서로 바뀐 느낌이다.

“뭐, 한번쯤은 와볼만하네...”
고래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말은 대개 이 정도다.
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 두세 번 올만한 가치는 못 느낀다는 얘기다.
박물관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좀 더 다양한 자료와 볼거리를 만들어
시민들이 자주 찾고 또 오래 머물수 있는 고래박물관이 되었으면 한다.

(2005.6.4 경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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