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인이십니다."
약속한 다방에 들어서자 입구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서며 나를 반겼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싫지 않은 찬사를 건성 듣는체 하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원피스 색상이 미경씨 얼굴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마치 끝없이 푸른 초원을 연상케하는 군요."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나를 바다라보았다. 마치 환상에라도 젖는듯이.
어쩌면 이 남자는 이렇게 시적(詩的)일까?
내심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나는 무뚝뚝하고 무신경한 남편을 그와 비교하고 있었다.
몇년동안 길러오던 머리를 하루아침에 싹둑 잘랐어도 모르는 남편... 사실 나는 처녀시절부터 최근까지 머리를 단 한번도 자르지 않고 길러왔었다. 물귀신이라는 별명까지 감수해가면서도 거리를 오가는 여인들이 세련된 파마스타일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건 것은 순전히 연애시절 남편의 찬사 때문이었다.
"미스하, 정말 매력적이야. 그 긴 머리카락은 마치 로렐라이 언덕의 인어아가씨 같아."
또한 남편은 오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두 부부의 얘길 했었다.
'당신이 머리를 길러야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빗을 선물하지." 하며 웃어주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긴 생머리에 신경을 써주었던 남편이 결혼 후 몇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등에 업힌 첫딸 채리가 엄마의 자랑스런 긴 머리를 자꾸만 쥐어뜯어 견디다 못해 내가 머리를 잘랐던 날도 남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나는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사람이 변햐도 저렇게 변할수 있을까 싶었다. 이미 남편은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싸느랗게 식어있는 것 같았다.
"문득 미경씨의 지금 그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납니다. 오늘은 꼭 제 스튜디오에 모시고 싶습니다."
사진작가 김민기는 열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순간 심한 갈등을 느꼈다.
촉망받는 사진작가의 모델이라니...내겐 신데렐라 얘기돠도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내겐 사랑스런 딸 채리와 남편이 있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사진모델이란 때에 따라서 과감하게 옷을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앞서 고지식한 남편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벌어질 사태에 대해 나는 눈앞이 아찔했던 것이다.
남편은 틀림없이 나를 상대로 경찰대학에서 배웠다는 유도 시범경기를 벌일 것이고, 레슬링 그레꼬로망형인가 뭔가를 하자고 들것이었다.
"부담스러우시면 그만두십시오. 참고 삼아 말씀드리지만 저는 누드 같은 건 절대 찍지 않습니다. 예술을 빙자해서 여자의 옷을 벗기는 일에 저는 결코 동의할수 없기 때문이죠."
그가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이 말했다.
아, 얼마나 고상하고도 신사적인 남자인가.
그는 지난 번에도 그런 얘길 했었지. 예술을 빙자한 상업행위를 그는 가장 혐오한다고. 그래서 그는 순수 사진작가로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고.
"스튜디오가 내키지 않으시면 어디 교외로라도 나가실까요?"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정중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일어서며 한달전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은 곗날이었다.
여고동창들 몇이 이른바 반지계를 짜서 넣고 있었는데, 근라 계를 타기로 돼 있는 명자가 한턱을 쓴다고 하여 우리는 모처럼 비싼 요리를 실컷 먹고 서투른 술도 한잔씩 했다.
서른 고개를 넘은 우리들은 이제 슬슬 살림살이에 이력도 생기고 모처럼 남편 시집살이로부터 해방된 탓인지 처녀시절 같지않게 간덩이들이 부어 있었다.
"얘, 어디 멋진 남자 없니? 내일 죽어도 좋으니 나 연애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일찍 결혼해서 벌써 학부형이 된 숙희가 말했다.
"현숙한 주부들이 이게 무슨 소리야?"
불에 달군 남비에 기름 튀듯이 혿르갑스럽게 튀어오른 건 계원중의 유일한 독신녀 혜선이었다.
"야, 이 올드미스, 아니 올디스트라고 최상급을 붙여야 마땅할 노처녀야. 너는 우리들 마음을 몰라. 여자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마음은 여린 박속 같고 연한 배 같은거야. 연애가 더디 너같은 미스들의 전용인줄 아니?"
"너도 일찌감치 결혼해서 우리 처지가 돼 봐라. 애들은 바깥으로 나돌고 남편은 마누라보다 회사가 소중하고..."
"맞다 맞어. 혜선인 아직 뭘 몰라. 감히 세상의 눈이 무서워 참고 있을 뿐이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멋진 연애를 아무도 모르게 한번즘 해보고 싶더라."
모두의 얼굴이 당근즙을 낸 것처럼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로지 남편만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던 구시대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나야 해. 우리도 우리들의 인생을 즐길줄 알아야 한다구. 왜 남편을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해? 생각해봐. 남자들은 밖에 나가면 사회활동이라는 핑계로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리낌없이 만나거든. 그런데 우린 이게 뭐니? 기껏 청요리나 시켜먹고 푸념이나 하게..."
나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기분이 느긋해셔 있어서 될 소리 안될소리 마구 지껄이고 있었는데, 직업이 형사인 남편이 출장중인 만큼 평소에 느끼던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말로는 모두 '멋진 연애'니 '여자도 인생을 즐겨야 한다'운운 하지만 실제로는 남편과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여자들이었고 또한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여자들이었다.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확 풀었다.
여자들은 끝없는 수다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웃고 떠들고 얘기하면서 어느새 생활의 먼지로 피곤했던 심신이 목화솜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
내가 2차 3차의 유혹을 어렵게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등 뒤에서 묵직한 바리톤의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 나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겠지 하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고래를 돌였다.
거기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빛 바랜 청남방과 청바지를 입고 어깨에 니콘 카메라를 맨, 한눈에 야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 남자가.
그는 나에게 처음엔 길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가르쳐준 길을 가지 않았다. 머뭇머뭇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저, 사실은 요릿집에서부터 주욱 뒤따라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잔 하실까요?"
그날 그와 나는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세련된 매너로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요리집에서 우리 옆좌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들었으며 여성이 가정에만 속박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신도 동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최근에 국내에 들어온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열띤 어조로 브레숑의 작품세계를 얘기할 때, 나는 여지껏 그 흔한 사진전시회 한번 못가본 걸 가슴 깊이 후회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것은 국내 작가들과의 작품 교류를 위해서이며 요즘 쉴새없이 작품의 소재를 찾아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정중한 어조로 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간청했다.
"미경씨는 바로 내가 찾는 이상형의 모델입니다. 희랍조각같은 단아한 옆모습, 그러면서도 표정은 아주 동양적이고 유순합니다."
나는 자신의 용모에 대해 이토록 찬미하는 사람을 일찌기 만나본적이 없었다.
남편이 나에게 찬사를 퍼부은 첫번째 남자였지만, 그가 찬양했던건 오로지 윤기나는 내 머리카락 뿐이었다. 어쩌면 남편은 나의 아름다움을 알면서도 내숭을 ㄸ러었는지 모른다. 미인이라고 추켜세우면 가뜩이나 높은 내 코가 크레오파트라만큼 될까봐 이룹러 말을 안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혼자 거울을 보면서 나르시즘에 빠져들던 처녀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나 자신이 아름다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군중 속에 섞이면 늘 자신이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나는 결코 군계일학이 될만큼 빼어난 미인은 아닌가 보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을 늘 얻곤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 사진작가 김민기나 나에게 찬사를 퍼부었으며 모델이 되어달라는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몹시 괴로운 심정으로 그에게 모델이 될만큼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늘 걸 얘기할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결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에 와서 가장 이상적인 여인을 만난 것을 추억하고 싶으니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을 만나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나는 쉽게 그와 약속했다.
그가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의 시한부 모델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날밤 나는 집으로 도아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몰래 어떤 비밀이 생겼다는 것이 나에게 터질듯한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친구들이 그토록 동경하던 '아무모 모르는 연애'의 기회가 바로 나에게 와주다니..그것도 상대가 시시하고 평범한 남자가 아닌 예술가라니... 그야말로 영화나 소설이 한편 전개되는 것만 같았다.
그가 떠나고 나면 우리의 연애는 완전법죄가 될 것이며, 나는 늘 세상에 완전법죄란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남편의 코를 면전에서 납작 누를 수 있는 것이다.
결혼 후 남편이 불철주야 골몰하는 것은 자신의 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의 완전범죄자도 허용치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이었다.
"기껏 남의 뒤나 미행하고 죄없는 사람을 몰아세우는 주제에."
나는 남편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형사라는 직업이, 또 그 천직을 위해 평생을 바칠듯 투지에 불타는 남편이 너무나 못나게 보였다.
아아, 나는 왜 그렇게 서둘러 결혼을 했을까. 연애다운 연애 한번 못해보고 단지 인어아가씨 같다는 남편의 감언이설에 홀딱 넘어가 결혼을 하다니...
나 자신의 경솔함과 남편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암세포처럼 자라나 내 머리는 터질듯이 답답했다.
이럴때 나의 위안은 사진작가 김민기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와 약속한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고 마침내 그와의 밀애를(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그런 밀애가 아닌, 신체적인 접촉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음을 맹세한다.) 즐기게 되었다.
몇번 만나는 동안 그는 나를 모델로 몇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인물을 클로즈업시키지는 않았다. 불가피하게 인물이 강조되는 씬에는 옆얼굴을 찍거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내리도록 했다. 그는 내가 정면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이런 나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여전히 나에게 무관심했으며 한밤중에 전화 받고 뛰어나가느 버릇하며 신문 사회면을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도 여전했다.
"사건 사고의 연속이로군. 하루도 범죄가 없는 날이 없어."
남편은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시부렁거리며 신문을 읽다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잽싸게 출근을 했다.
시경국장의 표창까지 받은 남편은 직무상으로는 아주 예기하고 날카롭다는 평판을 받고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아면 곤두세웠던 신경스위치를 죄다 끄는 사람이었다. 말 시키는 것도 귀찮아 하였으며 그저 충직한 동물처럼 주는 밥 얻어먹고 밖으로 나돌기에만 바빴다.
"오늘도 철야근무야. 요즘 제비족 일제소탕령이 내렸어."
연일 밤 새우고 들어오기가 미안했던지 남편이 스쳐가는 투로 말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평화로운 가정을 쑥밭으로 만들기 전에 나가봐야 겠어. 당신 심심하면 친정에나 다녀오지."
건성 말하면서 남편은 대문을 나섰다.
나는 남편이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당신은 내가 친정밖에 갈 데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천만에요!)
나는 오늘도 사진작가 김민기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약속시간 삼십분전, 나는 서둘러 샤워하고 머리를 만지고 귓볼에 살짝 오데코롱을 뿌렸다.
"아니, 유부녀가 그게 무슨 옷차림이냐. 애 에미가 쯔쯔..."
시어머니의 마땅찮은 잔소리를 귀 밖으로 들어며 나는 집을 나섰다.
사진각가 김민기. 오늘은 기어이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겠노라고 나는 전화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번만이라도 꼭 스튜디오를 방문해주십사는 그의 간청을 강경하게 뿌리쳐왔지만 생각해보니 지나친 사양은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았다.
그리고 제한된 실내에서 외간남자를 만난다는 게 꼭 무슨 부도덕한 사건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지레 겁을 먹고있는 내 옹졸함으로부터 이젠 스스로 벗어나고 싶었다.
"여자는 절대 값싸게 굴면 안돼. 남자가 오란다고 그의 숙소나 직장으로 불쑥 찾아가는 건 요조숙녀가 취할 행동이 아니야."
하고 처녀시절에 엄마가 일러주던 말씀이 어쩌면 걸혼 후에도 나의 의식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껏 나는 그에게 한껏 값비싸게 대우 받았고, 그럼으로써 이젠 적어도 당신을 믿습니다 하고 그의 앞에 자신있게 나서고 싶었다.
아니아니, 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오늘 내가 그를 찾아가는 것이 처음이자 마직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용기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는 어차피 떠날 사람. 설사 나의 방문이 조금은 부도덕하거나 불미스럽게 여겨질지라도 그는 곧 이 땅을 떠날 사람인 것이다.
서로의 기억 속에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고, 우리의 만남은 완전한 비밀로(남편의 표현대로라면 완전범죄가 되겠지만)간직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 얼마나 가슴 뛰는 만남인가.
고국에 있는 동안 김민기 그의 임시숙소이며 스튜디오로 쓰고 있다는 Y호텔 1243호실.
한다발의 후리지아를 들고 나는 방문 앞에 멈추었다.
똑똑똑...
노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렸습니다."
하고 나를 반긴 사람은 사진작가 김민기가 아닌 내 남편 이형욱 형사였다.
"부인께선 어쩌다가 이런 고단수 지능범에게 걸려드셨습니까? 이 자는 예술가를 사칭해서 유부녀를 농락하는 직업적인 제비족입니다. 피해자 진술서를 받도록 부인도 이 자와 함께 경찰서로 가실까요?"
남편의 맞은 편에는 사진작가 김민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고, 그의 발 밑엔 여러 장의 여자 사진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내 손에서 후리지아 꽃다발이 떨어진 것과 남편의 손바닥이 뺨으로 힘차게 날아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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