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댐 상류 용화마을로 가면서 그 소식을 들었다.

"노대통령이 자살했대요!"

"무슨 말이에요? 농담? 아니, 거짓말이죠?

운곡지 근처에 차를 세우고 들머리를 찾아 올라가는데 알수없는 울분이 솟구쳤다.

 

 

 어찌하여 이 나라는 전직 대통령마다 총 맞아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단 말인가.

참담하고 부끄럽다. 비통하기 이를데 없다.

 정치후진국을 면치 못하는 나라가 경제적인 위상만 높아지면 뭘 하나?

불로서 불을 끌 수 없건만 끝없는 보복으로 정적을 잔인하게 징벌하는 권력이라니!

 

 

 저 멀리 운무 속에 솟은 보현산도 영천댐의 조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로 쭉쭉 뻗은 떡갈, 신갈, 졸참나무 숲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줄도 빽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믿었던 사람이 비수를 날리고, 온 가족이 언론에 끌려나오는 수모를 당하면서 그는 얼마나 참담했을까.

 

 

큰꽃으아리 지천으로 피어있는 숲이 마냥 아름답다는 생각도 할수 없었다.

굽힐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이, 휘어질줄 모르는 그 성격이, 결국 극단의 승부수를 두었구나.

그는 특유의 정면돌파 기질로 적들의 허를 찔렀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막다른 절벽에 몰아놓고 칼을 겨누는 상대를 향해 그는 보란듯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개인의 비극이라기보다 역사의 비극이고 나라의 비극이다.

 

 

그대 이름이 정향이라지? 5월의 숲에서 귀한 숙녀를 보고도 나는 감흥이 없네.

오래 전 막내동생이 술에 취해 울부짖던 노래가 떠오르네.

"돈도 빽도 없는 놈이 어디서 무엇을 하나?"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를 개사해 동생이 목청껏 불러제꼈던 그 노래.

그렇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때는 희망이었던 그 남자가 가버렸다. 모든 걸 혼자 다 안고...

<사람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을 완성한다.>

  

 

자꾸 눈물이 날것 같아 이리저리 꽃에만 눈길을 주었다.

산앵도나무에 앙징스런 꽃들이 달려있다. 네살짜리 아이의 이빨만큼 작고 어여쁘다.

기룡산(騎龍山, 963m) 정상 부근에서 회무침 파티를 벌이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아마 이들 중 몇몇은 내 마음 같을 것이다. 울분과 비탄을 내색하지 않고 즐거운척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얼음을 채운 횟감을 2시간동안 어깨에 메고 산을 올라온 북극성 님, 그의 수고로 13명의 미각이 행복했다.

나 하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해진다면 살아볼만한 세상이 아닌가.

 

 

기룡산 아래 묘각사는 불보성지(佛寶聖地)로 알려진 곳.

산 아래 용화마을은 미륵불이 계시는 용화세상을 의미하고

주변 지명에도 정각동, 삼매동 등 북국토를 표현한 마을 이름이 많다고 한다. 

묘각(覺)은 보살의 수행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 즉 번뇌를 끊어버린 깨달음의 경지를 뜻한다.  

하산길에 불쑥 나타난 묘각사는 절 뒤의 소나무 한 그루가 인상 깊었을 뿐,

천년고찰의 흔적이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아 허무했다. 

 

 

 

사심없이 두 손 모을 수 있는 마음이 보살이라고 나는 믿는다.

 

 

쪽동백나무에 줄줄이 피었던 꽃들도 지고, 팥배나무 속눈썹같은 꽃술도 지고

숲 속엔 고광나무 저 혼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너도 소식 들었던 거니? 

말할수 없는 울분과 참담함을 너도 그런 얼굴로 내색하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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