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산성 아래 나리꽃 저 혼자 붉다.

이런 풍경 하나로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가 상쇄된다.

저 산성마저 없었더라면, 머나먼 길이 얼마나 억울할 뻔했나.

 

 

산 위에서는 동강을 보았고 하산해서는 남한강을 보았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던 동강은 댐 건설을 반대하던 환경단체들이

동강 홍보를 위해 레프팅을 시작하면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급기야 똥강이라는 오명까지 썼는데...

 

 

여름산으로 오르기엔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계족산(鷄足山890m).

육덕(肉德) 좋은 아낙처럼  푸짐한 남한강이 발치에 있건만 산이 높지 않으니 계곡도 물도 볼품없다.

  

 

 그래도 숲 속에서 온갖 여름꽃을 만나 큰 위안이 되었다.

백선 무리를 그렇게나 많이 보기는 처음이다. 더군다나 벌레 먹지 않은 싱싱한 꽃을!

사진에 실패한 이유는 어이없게도 가이드를 자청하는 쌀집아저씨 때문이었다.

혼자 걷고 싶어 일행을 앞질러 나갔더니 기어코 뒤따라와서는 바싹 붙는다.

 

 

 

 "아저씨, 저 사진 찍으면서 천천히 갈테니까 먼저 가세요."

"여자 혼자 가는 거 절대로 못봅니다.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산악회가 책임져야 하거든요."

아... 씨... 좀 내버려두지 젠장!!! 과잉친절이 얼마나 상대방을 괴롭히는지 모르고...

옆에 지켜서 있으니 사진이 되나. 그래서 내가 포기했다. 나만 포기하면 세상이 편하다.

 

 

새벽 일찍 혼자서 안내산행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니나노판인줄 몰랐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노래방을 돌리는가 싶더니 맨 뒷좌석에서는 아침부터 술판이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오늘 하루가 심상찮구나 생각했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관광버스 업계도 번창할 것이고...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정안산성.

 둘레 770여m에 폭 4m, 성벽 최고높이는 무려 11m를 넘는다.

성곽은 동남쪽 높은 곳에서 서북쪽 낮은 지대를 향해 사다리꼴로 내리뻗은 모습이다.

이 석성의 존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왕검성'이라고도 부른다.

 

 

급경사지를 활용해 성 외벽은 수직으로 높게 쌓고, 안쪽은 낮게 쌓았다.

서문 일대를 제외하고 성벽들은 견고한 모습으로 고답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저 성벽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으리,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으리.

  

 

  축복
                             도종환

이른봄에 내 곁에 와 피는 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였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였다
그 절망 아니였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당금질이였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읽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던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기대하고 갔던 산이 참 보잘것 없을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견고한 산성 아래 지천으로 피어있는 나리꽃만 아니었다면 오늘 산행은 꽝이었을 게다.

초록 숲 사이로 걸어가는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산을 사랑하겠지.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 것. 내 생각이 언제나 가장 옳다고 우기지 말 것!

 

 

여기가 북문이었나, 서문이었나? 저 멀리 계족산 정상.

 

 

 그나마 고마운 건 옆자리에 앉은 여인네였다.

한국 100대 명산을 밟고 있다는 그 여인은 50대 중반의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날렵하게 잘 걸었다.

"나 혼자 차 타고 오기 어려우니까 아무 산악회라도 오는 거지요. 음주가무는 나도 질색입니다."

둘이 화장지를 말아 귀마개를 끼우고 소음을 견뎌냈다. 전우애 비슷한 걸 느꼈다.

 

 

하산해서 핸드폰을 켰더니 오랫만에 반가운 문자가 들어와 있다.

<노을 보며 바닷가 퍼질러 앉아 이슬 내려 젖은 옷 달빛에 말려가며 술 한잔 하고 싶소. 그대랑>

두어달 전 만난 뒤로 소식이 없었던 친구, 많이 바쁘다더니 왠일일까?

<계족산에 왔다우. 영혼이 고독하면 산으로 가라 하길래 ㅎ>

장난스런 내 회신에 이어진 그녀의 답신은 그러나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육신마저도 고독하면 어디로 가야지요? 그대 시간 나는 날 불러주오.>

 

 

아, 나는 이런 솔직함이 너무 반갑다.

누군가에게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될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조만간 그녀와 함께 먼길을 떠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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