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겨울비가 내린다. 조리개를 열고 빗방울을 담는다.
1/100초, 그 찰나의 순간에 담긴 빗방울은 허공에 그은 빗금이다.
요며칠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엄마, 나 어릴 때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해서 깜짝 놀랐다.
곰같은 녀석이, 그동안 별 사고 없이 사춘기도 잘 넘겼다 싶었더니, 딴에는 외로웠나 보다.
왜 나는 혼자일까, 형이나 동생이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게 너무 궁금하더란다.
엄마가 너무 나이가 들어서 네 동생을 만들어주지 못했네, 미안하다.
사실은 엄마가 너무 일찍 철이 드는 바람에 네 동생 만드는 걸 포기했다고 말해야겠지.
험난한 세상에 던져져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야할 인간을 둘이나 만들기는 싫었어. 아니, 자신 없었어.
너희들 세대엔 혈연이나 지연보다 감성이 통하는 인간관계와 멘토, 그리고 소올 메이트가 더 중요할 거야.
형제가 많아도 끝까지 우애있게 지내지 못하면 남보다 못할 수도 있거든. 그러니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친구는 하나로 족하고 둘은 많고 셋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건 옛말이란다. 많은 친구 중에 끝까지 남는 친구가 몇은 있겠지.
너를 외롭게 한 에미가 잘못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네 동생 안 만든 걸 후회하지 않아.
잠깐 스쳐가는 이 세상. 뭔가 대단한 걸 남기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격식이나 모양에 얽매어 살고 싶지도 않아.
스물한 살의 아들은 가끔 나를 신선한 충격에 빠트린다.
생일선물로 여자친구의 엄마에게서 학생 신분에 좀 과하다 싶은 옷을 선물로 받아 왔다.
아들이 입은 티셔츠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이제 너는 그집 아들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언젠가는 여친 엄마가 두 아이에게 커플 목도리도 사주었단다. 그렇게 자상한 엄마에게 아들을 뺏기는 건 축복이다.
비만 좀 그치면 바람꽃을 찍으러 갈까 했더니 참 비도 어지간히 내린다.
가지산엔 눈이 하얗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