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언덕에 소나무 한 그루. 비바람에 등이 휘고 머리칼은 땅에 닿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 나무는 오래 전부터 시름시름 앓았던가 보다.

독야청청(獨也靑靑)이 쉬운 일이더냐. 메마르고 벗겨진 나무 둥치가 눈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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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나는 황야의 이리, 달리고 또 달린다.

세상은 흰 눈으로 가득하고 자작나무에선 까마귀가 날개짓한다.

하지만 아무데도 토끼는 없구나, 아무데도 노루는 없구나! 노루에 함빡 빠져있기에 한 마리 찾고만 싶구나!

이빨로 물어뜯고 손아귀에 움켜쥔다면, 더 이상 멋진 일이 있을까. 그 귀여운 것이 정말 그립구나.

부드러운 허벅지 깊이 이빨을 처박고 새빨간 피를 실컷 빨아먹고서 밤새 고독하게 울부짖고 싶구나!

토끼라도 좋다. 밤에 그 따스한 살코기는 얼마나 달콤한 맛이던가.

아아,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모두 내게서 떠나버렸단 말인가?

내 꼬리는 이미 잿빛이고 눈 또한 희미한데 벌써 몇 년 전 사랑스런 아내는 죽었다.

이제 노루를 꿈꾸며 토끼를 꿈꾸며 달린다.

겨울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내 타는 목을 눈으로 축이며 내 불쌍한 영혼을 악마에게 팔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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