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걸쳐 책장을 비웠다.
삼십 년 가까이 끌고 다니던 책을 다 버렸다.
일부는 이웃에, 또 일부는 지인들에게, 나머지는 재활용센타로 보냈다.
버린 것들 중에는 소녀시절부터 갖고 있던 책과 스크랩북, 습작 노트들도 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문장,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습작노트를 버리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내 죽은 다음 불에 태우라고 유언하고 싶던 애착의 덩어리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다니. 무상(無常)한 세월이 나를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일까.
한글을 깨친 이후부터 나는 활자중독에 빠져 지냈다.
재래식 화장실을 쓰던 시절, 뒤 닦으라고 잘라둔 신문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으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석박사가 되고도 남았으리.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며 나는 남루한 현실을 잊기 위해 책을 도피처로 삼은 것 같다.
만화책이건 잡지건 닥치는대로 읽어치우며 상상 속에서 활개쳤다.
열등감을 몽상으로 상쇄시키며 성장해온 나는 현실감이 떨어져 어른이 된 후에도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걸 자주 느꼈다.
식구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어도 나만 따로 떨어진 듯한 느낌,
군중 속에 스스럼없이 끼어들지 못하는 이질감.
여기가 내가 있을 곳 맞나?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낯선 혹성에 떨어진 지구인처럼 나는 두렵고 외로웠다.
고립감을 이겨내려고 읽어치운 책들, 휘갈긴 글발들이 족적처럼 서가에 쌓여갔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 또 버렸지만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었다.
9년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올 때 책을 한 수레쯤 버렸는데, 다시 그 만큼이 쌓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이사 갈 걸 생각하면 책부터 걱정이 되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알아서 해주겠지만 그걸 정리해서 다시 꽂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나이는 먹어가는데 껴안고 갈 것들이 저리 많아서야 되겠나.
문득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책을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책도 없애고 짐도 덜어내고 집도 줄이자.
이건 이래서 못 버리고, 저건 저래서 못 버렸던 책들, 손때묻은 스크랩북, 메모장까지 다 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진작 버리지 못한 게 어리석게 느껴진다.
사람의 생각이란 이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 그 생각이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머리맡에 책이 없으면 불안했던 나날들,
그건 지적(知的) 허영이거나 분리불안증(Separation Anxiety)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천 권이 넘는 책을 버리고나서 새삼 느끼는 건 ‘진짜 인생은 책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좁은 우물 속에 살면서도 책을 통해 나름대로 많은 인간 군상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기실 내가 제대로 간파한 사람도 없었고, 내가 마음 내려놓을 만한 곳도 없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헛방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