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때, 가끔 등산지도를 펼쳐 본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백두대간의 큰 줄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아직 밟지 못한 미지의 산들이 많은 것에 즐거워진다. 언젠가는 그 산들을 다 밟아 보리라는 소망이 남아 있기에.
한 장 한 장 지도를 넘길 때마다 생강나무 새순처럼 터져오르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더워진다.
눈 덮인 소백, 비로봉에서 연화봉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걷던 하얀 능선길. 억새꽃 바다를 유영하듯 걸었던 사자평고원. 물푸레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가야산 홍류동계곡.
등산지도를 펼쳐 놓고 나는 어느새 산을 오르고 있다. 손가락으로 내가 올랐던 코스를 짚어가며 추억을 되새김질한다. 여기 이쯤에서 점심을 먹었던가. 이 계곡엔 유난히 두릅이 많았었지. 연달래 필 무렵이 참 좋았어.
산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도 기억에 떠오른다.
하산 코스를 물어오던 사람, 물이 있느냐고 묻던 사람,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달라던 사람. 번화한 도심에서 다시 만난다면 알아보지도 못할 얼굴들이건만 함께 산에 서 있다는 느낌만으로 친밀감을 느꼈다.
국토의 7할이 산이라지만 아직 못가본 산이 더 많다. 단 한 번밖에 못가본 산도 있고, 해마다 꼭 한 번씩은 가게 되는 산, 또 유난히 자주 밟게 되는 산도 있다.
명산이라고 이름 나지 않아도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산길이 있다. 빤한 등산로보다 오솔길이 많은 코스, 또는 岩稜암릉을 오르내리며 정상에 이르는 릿지. 짙푸른 폭포 한 자락 가슴에 품고 있는 계곡…
등산지도를 뒤적거리던 내 손길이 어느새 설악산에 멈추었다.
봉우리 위에 줄지어 솟은 바위 빛깔이 모두 눈빛이라 이름하여 雪嶽설악. 산악인 김장호 씨의 말처럼 설악은 그 이름부터가 속세에 묻힌 입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잇소리 ㅅ으로 시작되는 상쾌한 첫소리에 ㄹ을 달아 밝은 모음 ㅏ에 이어 붙이고, ㄱ받침으로 명쾌하게 끝맺는 발음, 설악.
순결한 흰눈의 이미지로, 혹은 한줄기 청량한 바람으로 다가오는 설악은 이제 더 이상 隱者은자의 산이 아니다. 우리 나라 사람 중 이 산자락에 발 디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므로.
그러나 설악은 나에게 가슴 깊은 상처 하나로 남아 있다. 산행의 겉멋에만 젖어 대자연을 두려워할 줄 몰랐던 나에게 설악은 천둥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3박 4일의 휴가를 산에서 보내기로 하고 등반계획을 짰던 그 해 여름.
雨期우기의 하늘은 산 초입에서부터 잔뜩 흐려 있었지만, 우의와 텐트, 비상식량을 잔뜩 짊어진 우리들은 산행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너무 젊었고, 그 나이다운 만용을 부릴 때였다.
내설악의 탕수동 계곡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대승령에 올랐다. 어린 죽순 같은 연한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설악산 서북릉의 우람한 산세를 가슴 가득 안아보리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죽순 같던 비가 장대같이 자라났다. 어찌할까, 돌아서기엔 너무 먼 길. 더군다나 하산지점인 천불동에는 다섯 명의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장기산행에 미숙한 처녀 둘을 이끌고 폭우 속을 강행군했던 가이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우리는 가이드의 심정을 헤아릴 만큼 철이 들지 못했다. 아니, 산을 제대로 몰랐다는 게 옳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대청봉을 밟았지만, 가슴속에는 아무런 감흥이 솟구치지 않았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비안개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視界시계 제로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포가 그런 막막함일까?
무너미 고개를 넘을 때 날은 이미 어둑해졌는데, 하산코스라 길은 미끄럽고 불어난 물이 발 밑을 휩쓸고 지나갔다. 바위 벼랑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통과하면서,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았다. 운명에 몸을 맡기고 탁류 속을 더듬어 간신히 길을 찾아 나아갔다.
세찬 빗줄기가 조금 수그러들 무렵 양폭산장까지 내려왔다. 이곳에서 비에 젖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말리고 하룻밤 묵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산장지기가 없지 않은가?
가이드는 산장지기가 비선대에 내려갔을지도 모르겠다며 길을 재촉했다.
그 사이 비는 그쳐 있었으나 날씨는 완전히 어두워져 랜턴을 켰다. 계곡의 물은 엄청나게 불어나 폭포 소리를 냈다.
"어, 너 본 지 오랜만이구나."
도중에 산장지기를 만났다. 그는 지게를 받쳐두고 잠시 땀을 훔치고 있었는데, 길쭉한 물건 하나를 지게 위에 실어놓았다. 종이 포대 두 개를 양쪽에서 엉성하게 덮어씌운 물건이었다.
"너, 내 뒤를 따라 오너라. 다른 사람이 내려오면 얼른 앞으로 보내고"
가이드에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린다고 느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가 이끄는 대로 하산 길을 서둘렀다.
귀면암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명한 달이 떴다. 장마비가 그친 사이, 해맑은 달이 구름을 헤치고 얼굴을 내민 것이다.
산장지기가 귀면암에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쉴 무렵,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게에 덮어씌운 포대가 바람에 펄럭 하고 날아가는 순간, 우리는 보고 말았다. 달빛을 받아 창백하리 만치 하얗게 빛나는 여자의 두 다리를.
"아, 아, 아저씨. 저 저게 뭡니까?"
기겁을 하고 묻는 우리들에게 산장지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종이 포대를 주워 여자의 다리를 감쌌다.
"며칠 전에 설악산에 놀러왔던 아가씨가 급류에 휘말려 실종됐는데, 사람들이 이틀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다더군. 오늘 낮에 내가 계곡을 뒤져 찾아냈지. 이 아가씨 가족들이 지금 설악파크에서 기다리고 있어."
스물 한 살 아리따운 나이의 처녀 시체를 지게에 실어 놓고 산장지기는 어두워지기만 기다렸다 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시신을 덮을 것이 없어 종이 포대 하나는 머리 쪽에서 아래로, 또 하나는 다리 쪽에서 위로 씌워 중간을 칡넝쿨로 묶었는데 포대 하나가 바람에 날리는 바람에 다리가 그만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다. 구르면서 발을 헛디디면서 산길을 벌벌 떨며 내려오는데, 뭔가가 자꾸만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는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
비선대에서 우리는 무너지듯 쓰러져버렸다. 빗속의 장거리 산행에 체력은 극도로 소모되고, 거기다 죽은 여자의 다리를 본 충격으로 넋이 반쯤 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비선대에는 몇몇 등산객이 묵고 있다가 우리를 구해주었다. 우리는 밤새 헛소리를 지르며 앓았다고 한다.
뒷날 아침 깨어났을 때, 나는 산장지기가 가장 궁금했다.
그는 지난 밤 혼자서 시체를 짊어지고 설악파크로 내려갔단다. 아가씨를 가족에게 인도하고, 한밤중 다시 비선대로 돌아와 술 한 잔 얻어 마신 뒤 양폭산장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산에서 사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종족이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산짐승들처럼 숲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생각하며 자연과 동화되어 사는 사람들. 세상의 어떤 것들도 그들을 산 아래로 불러 내릴 수 없으리란 걸 느꼈다.
산을 단지 낭만으로 생각하고 찾는다면 큰 오산이다. 자연이 숨기고 있는 오묘한 매력과 더불어 크고 작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 여름의 설악에서 나는 대자연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했었다.
겉멋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산에 오르면 사람의 인격처럼 山格산격이 느껴진다. 그리고 산행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가파른 산길을 힘들게 올라 정상에 서면, 힘든 만큼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인생살이 그런 것 아닌가? 고통이 클수록 그 뒤에 오는 기쁨이 큰 법. 나는 산을 오르며 서투른 나의 인생살이를 뉘우치곤 한다.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고 생각하는 마음, 언제나 내가 준 것만큼 받으려고 하는 마음, 모두 산에 가서 버리고 돌아온다.
등산지도를 펼쳐 들면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산길, 산길들.
하얀 능선에 서서 지나온 나의 발자취를 바라보듯, 내 인생도 어느 시점에선가 지난 세월을 눈물겹게 바라볼 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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