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에게 가는 꿈을 오래 전부터 꾸어왔었다.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산정에 서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그러나 남들이 흔히 가는 길로 가서 그를 보고 싶진 않았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로 은밀히 그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를 보러 가는 길은 만만찮게 먼길이었다. 승용차로 밤길을 달려 6시간 여. 문경새재, 이화령을 넘어 풀벌레 소리만 자욱한 만수봉 아래 도착한 게 새벽 1시. 참숯 같은 어둠만 자욱한 산기슭에 차를 세웠다.
늦여름 밤하늘에는 정신 맑은 별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너무 깨끗하고 맑아서 이승과의 거리가 더 멀어 보이는 별. 쏟아질 듯 제 자리에 붙박인 별떨기 아래 지상은 막막한 어둠이었다.
차 속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으나 아무리 잠을 청해도 의식은 점점 명료해지기만 했다. 차문을 닫아도 풀벌레 소리는 통곡처럼 들려오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발치에서 훔쳐보듯 나는 가슴 설레며 그의 발아래 숨죽이고 누워 있었다. 이제 곧 그의 아름다운 아미와 건장한 어깨를 보게 되리라.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밤을 새운 터라 몸이 찌뿌둥했지만 수풀 향기를 맡으면서 어느새 몸과 마음이 청신해지는 걸 느꼈다.
알싸한 새벽 공기 속으로 이슬 맞은 나뭇잎 냄새가 물씬 풍기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감미롭게 다가왔다.
잠든 숲을 깨우기 미안해서 조용조용 말을 아꼈다. 묵묵히 발 아래만 보며 랜턴이 비추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만수봉 능선에 올라서기까지 두어 시간.
능선에서 일출을 보기 직전에 나는 그의 모습을 먼저 보았다. 충주호를 배경으로 의연히 솟아있는 그 멋진 봉우리를!
수반 위에 완벽하게 올려진 자연석 수석 한 점, 명품 神仙圖신선도 한 폭이 내 눈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충주호의 안개는 월악을 더욱 신비하게 감쌌다. 호수라기보다는 늪, 늪보다는 구릉 같이 월악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윽고 일출, 그러나 해는 순식간에 산 위로 솟아올라 나를 허망하게 했다. 구름 사이로 못이긴 척 뭉그적대다가 한순간 훌쩍 하늘로 떠오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잠시인 것일까. 절정이 아주 잠깐인 것처럼. 그 짧은 순간의 일출을 보기 위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돌부리에 넘어지면서 허위허위 달려오는 게 인간의 모습인가?
월악 영봉을 바라보며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행복했다.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한 보람이 있었구나. 수많은 암릉을 거느리고 아름드리 소나무를 암릉 사이에 키우면서 월악은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수봉에서 언뜻 보기에 두어 시간이면 정상으로 갈 것 같았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낙타의 등처럼 커다란 암릉이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아무리 걸어도 정상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의 완강한 등처럼 근육질이 두드러진 암릉에는 짙푸른 소나무 군락이 멋을 더할 뿐.
만수봉 암릉 코스는 군데군데 길이 지워져 보이지 않고, 시그널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짧은 내 다리로는 오르기 힘든 암벽도 몇 차례나 만났고 90도 가까운 수직벽을 로프에 매달려 내려와야 했다. 발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믿을 거라곤 나 자신의 의지와 체력 뿐. 외로울 틈도 고뇌할 틈도 없는 그 팽팽하고 긴장된 순간을 나는 끔찍이도 사랑하는지 모른다.
만수봉 릿지를 통과해 월악산 산불감시초소에 이르기까지 단 한사람의 등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헤치고 나온 길에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길이 워낙 좁고 험해서 보통 사람들은 다니지 않는다는 거였다.
암벽등반을 하는 일행에게서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며, 나는 비로소 난코스를 주파했다는 걸 실감했다.
40미터 짜리 자일을 어깨에 걸머진 클라이머들이 오늘의 클라이밍을 계획하며 루트를 읽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 깡마른 몸매에 근육만 유난히 발달한 팔과 다리, 거미 같은 몸으로 날렵하게 바위를 타는 그들에게 산은 어떤 의미로 존재할까?
월악을 보기 위해 만수봉을 넘어온 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나. 지쳐 쓰러질 듯, 몇 번의 위험을 넘어 온 그 곳에 바로 월악산 영봉이 있었다. 만수봉 릿지의 그 험난한 길이 없었다면 그를 만난 것이 참으로 시시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높이 150미터, 둘레 4킬로미터의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월악산 영봉.
그러나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문지르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한 시간을 허둥대며 올라서야 그를 만났다.
바라볼 땐 바로 눈앞이었지만 등산로는 돌고 돌아가는 길, 인생의 굴곡이 이만큼 인가 싶었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명예도 눈앞에 빤히 보이지만 내가 닿기엔 이렇게 먼 것이 아닐까.
월악산 정상에는 9월의 따가운 햇살이 있었다.
발아래 충주호의 아름다운 정경이 놓여있고 저 멀리 소백산 천문대가 아스라이 보였다.
식수가 모자라 목이 갈라 터지는 것 같았지만, 그 남자에게 안긴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아득한 수직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황홀한 현기증을 느꼈다. 여기 이 자리에서 한 발만 자유롭게 내디딜 수 있다면 나는 이 남자의 품에 영원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뒤돌아보아지는 그의 모습.
오만한 남자의 콧날처럼 수직으로 솟은 월악의 암봉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문신을 새겨놓았다.
아무도 저 남자를 범할 수는 없으리라. 뭇 사람들이 얼씬거려도 진실로 저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리라.
만수봉 암릉을 타고 월악 영봉까지, 7∼8 시간은 족히 걸었다. 가이드 산행에서 자주 이용하는 코스를 버리고 굳이 난코스를 택한 보람이 있었다. 어렵게 만난 만큼 나는 그에 대한 사랑이 더 애틋해졌다.
새벽 4시에 산행을 시작해 송계리로 하산하니 오후 3시 30분, 만 12시간을 산에 있었던 셈이다.
농수로에 발을 담그고 앉아 즉석 팥빙수를 먹었다. 따가운 9월의 햇살이 등뒤에 따끔거렸다.
충주에서 수안보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만수봉 주차장에서 내렸다. 나의 아반떼는 주인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수안보-단양-죽령을 넘어 영주-안동-영천 쪽을 택했다. 영천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건천-경주를 통과하는 동안 파죽지세로 퍼부었다.
떠나기 전에 세차하면서 앞 유리를 왁스 걸레로 스쳤는데, 그게 잘못이었는지 와이퍼가 지난 자국마다 얼룩이 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밤길, 길도 까맣고 대기도 까맣고… 미혹한 중생이 죽음을 향해 돌진하듯 나는 달렸다. 중앙선도 보이지 않고, 빗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을 감각 하나에 의지해 차를 몰았다.
새벽 1시 도착. 배낭을 풀 사이도 없이 간단하게 샤워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남자를 잊을 수 없다.
만수봉 능선에서 보았던 그 남자의 위용을 잊을 수가 없다.
충주호에 잠겨있는 거대한 암봉, 월악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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