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에 섞여 살기가 피곤할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가식도 겉치레도 필요 없는 곳, 산에 가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산은 말없이 나를 안아주고 위무해주는 나의 오랜 연인,.그는 온 몸을 열어 나를 반기면서도 아무 것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단풍을 즐기려는 인파가 북적대던 산에 겨울이 오면 숲 속은 어느새 적막함이 감돈다. 잎을 떨군 나무는 알몸으로 서서 긴 고독을 견디고, 계곡의 물소리도 저 혼자 쓸쓸한 허밍으로 흘러간다.
겨울 저녁, 어두워지는 산그림자를 보면 왈칵 치미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바람 부는 이 저녁, 저 혼자 서서 외로움을 안으로 삭이고 있을 산. 문득 내가 달려가 안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겨울 산을 자주 찾게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짧은 겨울해라 먼 산은 가지 못하고 대개 영남의 알프스가 겨울철 나의 산행지다.
홍류폭포를 지나 가파른 산길과 암벽, 게다가 칼등 같은 능선이 하계로 몸을 던지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는 신불산, 억새 우거진 간월재로 공 구르듯 굴러 내리고 싶은 간월산. 통도사를 품에 안고 병풍을 둘러치듯 지키고 선 영취산, 아우 같은 산들을 거느리고 의연히 솟아있는 믿음직한 가지산. 마음 넓은 사나이 같이 넉넉한 운문산. 드넓은 사자평의 억새 밭에 달이 뜰 때면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숨쉬는 재약산, 사자봉.
신년 초 한 차례 눈이 내린 뒤, 영취산 시살등을 탔다. 깎아지른 암벽을 등지고 앉은 백운암에서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라 능선에 서자 매서운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얼어붙은 눈길을 헤치고 시살등을 타면서 눈 위에 새겨진 짐승의 발자국을 보았다. 일행 중 나이 드신 분이 호랑이 발자국이라 했다. 호랑이는 외발자국이라면서, 호거산에 가끔 호랑이가 나타난다던데 하셨다.
시살등, 얼마나 기막힌 이름인가. 시살은 활矢시의 겹친 말이며 등은 물론 비탈을 뜻한다. 화살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능선을 밟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 넘어 산… 마치 우리네 인생살이를 보는 듯 하다. 이따금 눈부시게 빛나는 한 줄기 강은 희망처럼 질기고도 가냘프다.
하산 길은 등산로를 버리고 잡목 숲으로 들어섰다. 백련암 쪽으로 막연하게 방향을 잡고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무릎까지 차는 낙엽 위를 죽죽 미끄러지며 기분 좋게 스키를 탔다.
낙엽 위에 눈이 쌓인 곳도 있었지만, 얼어붙은 눈은 낙엽 사이로 스며들지 않아 낙엽은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서 계곡에 수북이 쌓인 낙엽, 산비탈을 타고 구르다 구르다 낮은 구릉에 쌓인 낙엽. 길 없는 길을 찾아 헤매는 중생처럼 나는 숲 속을 방황했다. 낙엽 스키를 타며.
입은 옷 그대로 신은 신발 그대로 낙엽 위를 미끄러지며 타는 낙엽스키는 겨울산행의 매력이다.
가을 낙엽은 아직 물기가 덜 말라서 스키를 타기엔 마땅찮지만 한겨울 마를 대로 마른 낙엽을 밟고 내려가면 스키 타듯 저절로 미끄러진다. 그래서 붙인 이름 낙엽 스키, 이 낙엽 스키를 타 본 사람만이 겨울 산행의 진정한 묘미를 알 수 있으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밟아 오르건 말건 언제나 듬직한 어깨로 버티고 선 산에서 나는 사나이의 의지와 고독을 느낀다. 모든 고난을 안으로 삭이고 의연하게 서 있는 남아다운 남아…
그러나 어쩌다 산의 겉모습에 반해 무모하게 덤벼든 사람들이 조난을 당하는 경우를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너그럽고 과묵한 산이지만 한 번 요동치면 사람의 목숨쯤이야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가지산 쌀바위 아래서 작은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 가면서 따끈한 약차 한 잔을 마시고 가는 곳. 산이 좋아 산에서 산다는 그에게서 동화와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산. 움막 속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우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문을 밀치고 나가 보면 산토끼며 노루, 산돼지까지 몰려 석남사 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운문산 쪽은 인가가 없으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짐승들은 밤을 이용해 재를 넘어가는 것이다. 인가가 있는 곳을 찾아 밭에 남아있는 푸성귀라도 뜯어먹기 위해서.
쌀바위 고개를 넘는 짐승들은 움막집 산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 또한 아무 사심 없이 짐승들을 본다. 만약에 그가 살의를 품거나 해코지할 마음이 있으면 짐승들도 그렇게 태연히 그를 스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고픈 짐승들의 동냥길을 딱한 듯 굽어보는 산사람의 눈빛은 얼마나 따뜻한 것일까?
한낱 미물들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랑의 눈길을 알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주고받는 정을 왜 모를까?
그런데도 인간세상에서는 언제나 다툼이 잦다.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해 안달하고, 진심으로 주었다면서 나중에 돌려 받을 것을 계산한다. 그래서 언제나 서운하고 사랑보다는 증오를 품기가 쉽다.
어두워지면 재를 넘는 산짐승들.
그것을 바라보는 산사람의 어진 눈빛.
그들의 교감처럼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겨울산은 침묵 속에 더욱 깊고, 얼음장 아래 냇물은 여린 목소리로 흐른다. 조금은 쓸쓸한 허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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