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고 등산을 간다. 문법상 어색하긴 하지만 나로서는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일을 감행한 셈이다.
새벽의 미명을 달려 김해공항에서 제주행 첫 비행기에 탑승했다. 3월 1일부터 한라산 백록담 일대가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다니, 묶이기 전에 가서 백록담을 한 번 보고 오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당일치기로.
한라산 성판악에서 시작된 산행은 '정상 부근의 일기가 고르지 않으니 중간에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엄포 때문에 다소 불안했다. 제주 공항에서는 해맑아 보이던 하늘이 성판악 부근에서는 눈을 풀풀 뿌리고 있었다.
잘 닦인 등산로는 지루할 정도로 완만했지만, 육지와는 다른 식물분포가 호기심을 자극해 심심찮았다. 분재꾼들이 탐을 낸다는 주목 군락이 그 특유의 검붉은 몸매를 눈 속에 드러내고 있었다.
성판악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온통 눈밭이었다. 특히 진달래 대피소 일대의 설경은 장관이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얼굴을 때렸지만 그 칼날 같은 바람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록담 정상을 1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부터는 바람의 강도가 엄청나게 세졌다. 세찬 눈바람이 휘몰아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示界시계는 온통 하얀 눈바람과 안개. 발 밑을 보고 부지런히 걷지만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한 발 내디뎠다가 오히려 한 발 물러섰다. 그야말로 바람이 냅다 불어 제쳤다.
눈인지 우박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체가 세찬 바람과 함께 얼굴을 때려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한라산 바람은 무시무시한 칼부림이었다. 추워서 몸은 벌벌 떨리고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인간이 자연의 힘을 이기기가 이토록 힘들다니.
나는 문득 오성찬의 단편 '한라산'을 떠올렸다.
제주인의 가슴에 정신적인 지주로 솟아 있는 한라산. 그 산이 아름답기 이전에 얼마나 자연 자체의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천연의 목장, 한라산에서 자신이 기르던 소를 찾아 헤매는 '센오서방'을 통해 작가는 제주인의 자연에 대한 도전과 끈질긴 생명력을 은유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소년시절을 테우리로 한라산 기슭에서 보냈던 추억을 빚은 서사시 같은 소설.
잃어버린 소를 찾아 한라산 전역을 헤매며 천신만고를 겪는 센오서방.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한 태상박이는 어느 눈 오는 겨울날 스스로 집을 찾아 들어온다.
줄거리의 재미보다는 한라산을 둘러싼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소떼들의 자연에 대한 순응, 목동들의 질박한 삶 등을 통해 시적인 운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초여름 파종 끝의 맑은 날, 시원한 고목 풍개나무 밑에서 마을 장정들이 시뻘겋게 장작불을 피워놓고 낙인을 달군다. 엉덩이에 낙인을 찍고 귀표를 하여 上山상산에 올려보낸 소들은 9월 들어 꼴을 베게 될 때까지 드넓은 초원에서 야생되는 것이다.
석 달 가량을 야생의 상태로 지내게 되는 소를 가을에 주인이 되찾으러 올라가 보면, 소들은 추위에 털이 한 뼘씩은 자라 있고 살도 포동포동 쪄있지만, 더러는 무리에서 벗어나 밀림으로 행방을 감춘 놈도 있고 백록담 서벽쪽으로 길을 들어 목숨을 잃은 놈도 있다.
백록담 서벽의 단애는 너무나 세찬 바람 때문에 적설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놀랍게도 거기까지 올라와 죽은 소의 뼈다귀가 얼어붙은 땅에 박혀 있다.
왜 그 소는 거기까지 올라가서 죽었을까 하는 의문은 몹시 문학적이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그 산꼭대기의 빙하에까지 올라와서 죽은 짐승에 대한 의문을 삶의 의문으로 도치시키는 부분을 떠오르게 한다.
센오서방은 몇 달 동안 태상박이를 찾아 산 속을 헤매는 동안 사람의 능력이 참으로 하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대한 산, 광활한 밀림, 이 모든 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섭리, 여기에는 뭔가 사람 힘이 못 미치는 멀고 높은 것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는 밀림 속을 혼자서 헤매고 있을 때 등뒤에 문득문득 거대한 존재의 눈길을 느낀다. 넓은 산 중 어딘가에 돌아다니고 있는 태상박이와 센오서방의 어긋나는 발길, 그 어긋남마저 거대한 존재의 눈길이 지켜보는 듯하다.
센오서방이 관목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산비를 흠뻑 맞아 기진 하며, 백록담 서북벽 무너진 벼랑에서 죽을 뻔 하는 등 그의 소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하는 모습은 인간 한 평생 헤쳐나가는 고난과 역경의 은유로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오성찬의 '한라산'을 통해 나는 문득 사찰의 대웅전 벽화로 자주 볼 수 있는 심우도를 떠올렸었다.
그 그림에서는 소를 사람의 본성에 비유하고 있는데, 심우도 속에서는 거칠고 사나운 소를 잘 다스려 소의 등에 피리를 불며 가는 것으로 본성을 깨닫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심우도에 비유한다면 센오서방이 찾아 헤맨 소는 그의 본성이었던 것이다.
한겨울 눈보라 속의 한라산 정상에서 나는 왜 센오서방이 떠올랐던 것일까? 잃어버린 소를 찾아 산 속을 방황하며 그가 겪은 자연재해가 갑자기 엄청난 실감으로 다가왔다. 대단한 위력으로 불어제치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백록담 정상을 밟았다. 하지만 백록담은 어이없게도 짙은 안개 속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악천후였다.
백록담을 들여다보겠다고 목을 뺐다가, 그 막막한 안개에 그만 자라목이 되었다.
바람이 등을 떠밀어 내려오는 길은 두어 번 넘어졌다. 아픈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얼어 있었다.
군락을 이룬 주목 위에 하얗게 눈이 쌓여 멋진 설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라산만이 갖는 설원의 비경이 거기 있었다. 눈이 쌓일수록 아름다운 나무가 주목이었다.
하산하면서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저 깊은 산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또 다른 센오서방과 또 다른 태상박이가 있을 것 같아서. 나 또한 겉모습만 다른 또 하나의 센오서방 같아서.
부산행 마지막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제주 시내에서 사우나를 했다.
얼었던 몸이 뜨거운 도크에 들어가니 온몸이 진저리쳐졌다.
아, 이 노곤한 행복. 백록담의 짙은 안개가 사우나 도크에 가득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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