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밤 기차를 타고 새벽의 驛舍역사에 내렸을 때는 함박눈이 아카시아 꽃잎처럼 펄펄 날리고 있었다.
남도에선 귀한 눈을 실컷 밟아 보리라 작정하고 떠나온 겨울 산행. 치악산 발치 끝에 나는 섰다.
첫 버스가 오기도 이른 시각, 원주 역사에는 등산객들이 모여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따끈한 커피로 밤차에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으로 끊임없이 날아드는 눈발을 보고 섰노라니 치악산 행 버스가 왔다.
등산객으로 금방 만원이 되어 버린 버스는 얼어붙은 길을 겁 없이 달렸다.
視界시계는 30미터 정도일까. 어둠과 눈발에 앞이 흐린 빙판길을 강원도 운전사는 예사로이 차를 몰았다.
손에 땀을 쥐면서도 승객들은 군말 없이 창 밖만 보았다. 아카시아 꽃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명 속을 더듬어 산길을 오르기 전에 아이젠을 박아 신고 중무장을 했다.
예상했던 추위였지만 살 베어 가는 강원도 산골 추위는 섬뜩섬뜩 했다.
눈이 얼어붙은 위에 또 눈이 쌓여 적설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눈길을 쉼 없이 걸었다.
추위 때문에 쉬어가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쉬면 바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날씨였다.
로프와 사다리로 연결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암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밟아 나가면 바로 거기 치악산이 숨겨둔 겨울 산수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키 낮은 산죽이 눈을 둘러쓰고 속닥거리며 모여 앉은 산비탈. 벌거벗은 활엽수에 사뿐히 내려앉은 선녀 이불감 햇솜 같은 눈. 흰색 하나 뿐인데도 온 세상은 왜 이렇게 화려해 보이는 것일까.
겨울 산행의 묘미에 흠뻑 젖어 정상에 닿았을 땐 눈보라가 휘몰아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발아래 산줄기마저도 희미해 눈을 비벼 떴다.
정상 기념사진을 찍자고 카메라를 꺼내니 셔터가 얼어붙어 찍히질 않는다. 카메라를 품안에 녹여 치악산의 겨울을 담고 하산을 서둘렀다.
걸어서 내려가기보다는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는 게 안전할 듯한 하산 길은 아이젠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군데군데 사다리와 로프를 잡고 암벽등반 시늉도 내면서 걷고 또 걸었지만 바로 눈 아래 보이는 계곡은 멀기만 했다. 치악산 계곡이 얼마나 깊은지 비로소 느꼈다.
아이젠을 신고 12킬로미터의 눈길을 걸었더니 다리가 꽤 무거웠다.
겨울 산행의 묘미를 한껏 음미한 시간들은 행복했지만 추위와 배고픔은 나를 현실로 불렀다.
계곡의 얼음을 깨고 떠온 물로 끓이는 라면은 왜 그렇게 더디 익는 것일까. 발을 동동 구르며 버너 앞에 서 있다가 익지도 않은 라면을 빈속에 쏟아 붓고 나서야 사물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원주 시내로 나오는 버스 속에서는 오뉴월 촌닭처럼 졸았다.
기차 속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대여섯 시간 눈길을 탔으니 극도로 지친 데다가 갑자기 따뜻한 차안에 앉으니 염치도 체면도 없이 눈꺼풀이 내려앉는 것이었다.
차창에 몇 번이나 머리를 찧다가 벌떡 일어난 건 다른 등산객들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원주역입니다. 기차 타고 가실 거 아닙니까?"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원주역 앞에서 버스는 거의 모든 승객을 내려놓고 갔다.
울산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밤 열 시가 넘어야 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시내 관광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의견일치, 여관에 들기로 했다.
무장공비 같은 모습으로 대낮에 여관에 들어선 우리를 보고도 주인은 선선히 방을 내주었다. 타지에서 온 등산객들에게 어지간히 익숙한 모양이었다.
뜨거운 물을 욕조 가득 받고 몸을 담갔더니 커피 속의 크림이 녹듯 내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아찔한 현기증, 짜릿한 전율, 한없이 너그러운 평화가 곧 찾아왔다.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 모처럼 한낮의 숙면을 즐겼다.
기차 시간까지 자기로 했지만 눈뜨고 보니 겨우 두 시간을 잤을 뿐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눈에 젖은 옷과 배낭, 등산장비들이 어지럽게 방안에 흩어져 있었다.
모처럼의 자유, 모처럼의 무질서가 왜 이렇게 편하고 행복한 것일까.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그 작은 여관방에서 소꿉장난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만에 다시 올라탄 기차는 어제처럼 덜컹대며 어둠 속을 질주해 남하하고 있었다.
새벽에 울산에 닿아 역에 세워두었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곧장 단잠에 빠졌다. 꿈도 없이 달콤한 잠이었다.
해마다 꼭 한 번은 밤기차를 타고 치악산에 가자고 나는 약속했다. 나의 영원한 룸메이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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