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위에 세월의 눈금을 매겨 놓고 사람들은 새해가 왔다고 기뻐한다. 날마다 뜨고 지는 해가 오늘따라 새로울 것도 없건만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새해 첫날의 일출을 보려고 제주도로 날아가고, 설악산을 오르고, 석굴암으로 달려간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제주 앞바다의 해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도 아니고, 대청봉의 풍광 또한 어제와 달라질 것은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사람 마음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아니, 달라지고 싶을 뿐이다.
가장 구체적인 새해의 모습은 새 달력과 새 가계부와 새 수첩일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없다면 무엇으로 새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시간의 단위로 새해가 밝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고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를 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비록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지라도 결심하고 계획하는 순간만은 진지하다.
신년 벽두에 한 해의 라이프사이클을 그려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희망적으로 보인다.
묵은 수첩의 주소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다 보면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롭다. 작년 초에 적었던 이름이 1년 사이에 이름이 희미해진 사람, 한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던 사람… 그러나 어느새 묵은 수첩에 전화번호로만 남아 있다.
거미가 자신의 체액으로 거미줄을 짜듯이 우리는 인연의 그물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그 인연의 거미줄에 얽혀 울고 웃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새해 새 수첩에 옮겨 적은 이름들을 보며 곰곰 생각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심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일까? 수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새 수첩에 변함없이 옮겨 적을 수 있는 이름이 얼마일까? 그들의 수첩에 내 이름은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누구에겐가 의미 있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누군가의 이름을 내 수첩에도 영원히 남겨 두고 싶다. 이 세상에 와서 그런 참인연 하나쯤은 맺어두고 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1월 1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 첫 출발을 뜻깊게 시작하고 싶어서 정초에는 언제나 산에 가리라 계획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지리산 눈등반이나, 향적봉에서 남덕유산을 잇는 능선 종주는 얼마나 장쾌할까.
그러나 번번이 나의 1월은 전혀 뜻깊지 않게 시작되곤 한다. 고작해야 묵은 수첩의 전화번호를 새 수첩에다 옮겨 적는 걸로 시작되는 소시민적인 새해 아침. 묵은 가계부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새 가계부를 펼친다. 호화찬란한 표지 그림처럼 일년의 내 살림살이가 마냥 풍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만 올해도 예년처럼 치열한 숫자와의 전쟁이겠지…
단 한 번 기억에 남는 1월 1일이 있다.
신혼 초, 집도 차도 없을 때였다. 남편은 50cc짜리 스쿠터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주전에서 정자를 거쳐 경주에 이르는 해안선을 달렸다. 엷은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는 수세미로 닦은 양은 냄비처럼 빛났고 푸르게 얼어붙은 하늘엔 간간이 구름이 흘렀다.
그런데 추령재를 넘을 때부터 흐려지던 하늘이 어느 샌가 눈을 뿌리기 시작해 우리가 통일전 앞에 이르렀을 땐 흰눈이 도로포장을 하고 있었다. 남산 팔각정 전망대까지 눈 덮인 산길을 오르며 나는 가슴에 차 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잎 진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순백의 精靈정령들.
아, 瑞雪서설.
어쩐지 올해는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고 나를 위해 축복된 시간이 마련될 것만 같다. 알 수 없는 희망이, 가능성이, 꿈이 보이는 듯도 했다.
오래오래 눈 속에 서 있다가 하산할 때는 구르듯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겨울 해는 짧아 어느새 눈바람 속으로 어둠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날씨 때문에 직선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얼마쯤 달리다 보니 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조금 더 달리니까 금방 또 비로 바뀌는 것이었다. 화려한 눈의 세계에서 한순간 빗속으로 急轉直下급전직하 미끄러진 느낌이었다.
온몸은 차가운 빗줄기에 흠뻑 젖었고 시린 손과 다리는 이를 딱딱 마주치게 했다. 남편의 등에 찰싹 붙어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보려 했지만 바람까지 합세한 겨울비는 살 속으로 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흠뻑 젖은 채 반쯤 얼어서 집에 돌아온 우리는 연탄 아궁이를 활짝 열어 놓고 뜨거운 물을 있는 대로 뒤집어썼다. 그 날 이후 만 사흘을 둘이 꼼짝 않고 드러누워 앓았더니 옆방에 세 든 사람들이 연탄가스 마신 줄 알고 구급차를 불렀다.
신년 벽두에 앓아 누웠던 그 해는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적금이 끝난다든지, 몇 년 후엔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겠다든지 하는 작은 꿈에 큰 희망을 가졌으므로, 다음 해 또 다음 해를 기다리는 기쁨도 컸다.
열 일곱 살 땐 도저히 내가 스물 다섯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는데 나는 어느새 중년에 들어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적금 타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매사에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고 모험이나 도전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었다.
가끔 가난했던 시절의 사랑이, 꿈이, 희망이 절실하다. 뭔가 모자랐고 늘 허기졌던 젊은 시절이 차라리 치열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된다.
일생을 가난하게, 모자라게 허기져서 사는 것이 영혼의 富부를 위해서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부질없는 욕망에 들떠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면 안타깝고 서글플 때가 있다.
올해도 묵은 수첩의 이름들을 새 수첩에 옮기는 것으로 새해가 시작될까. 가계부의 화려한 겉표지에 주눅들며 한 해가 지나갈까.
아니지, 올해는 정말 겨울 지리산엘 가는 거야. 눈 덮인 능선을 따라 노고단의 운해를 보고 반야봉의 낙조에 물들어 보자.
가난했던 시절 차가운 겨울비에 뼈 속까지 적시면서도 사랑 하나로 가슴이 훈훈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그래 올해는 꼭 가는 거야.
눈 덮인 산으로.
무구한 영혼들이 하얗게 기다리는 그 곳에 가서 내 눈을, 내 마음을 헹구고 와야지. 올해의 시작은 어쩐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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