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시작한 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오고 가는 등산로에서 서로 마주치면 '수고들 많으십니다' 잠깐 인사하고 헤어지는 그 짧은 인연. 처음 만나도 낯설지 않고 왠지 정이 가는 얼굴들은 번화한 거리에서 스치는 옷자락과는 정감이 사뭇 다르다.
그를 본 것도 산행 중의 숱한 인연처럼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스치고 지나가면 얼굴조차 잊어버릴 사람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다.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우리들은 간월산 정상을 거쳐 하산 길 파래소 폭포 아래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 폭포에서 땀을 식힌 뒤 배냇골로 하산하자는 게 우리들의 계획이었다.
폭포의 물이 너무나 짙푸르다고 붙은 이름, 파래소에서 우리 일행은 배낭을 풀고 등산화를 벗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십 미터 넘는 낭떠러지를 흘러내린 물이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 밑에 서 보았다. 머리 위로, 등줄기 위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시원하다기보다 아플 지경이었지만, 고통과 함께 오는 짜릿한 쾌감에 몸을 맡기는 것은 분명 즐거운 경험이었다.
폭포 둘레는 백 미터쯤 될까.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푸른 물은 한순간 나를 섬뜩하게도 했지만 물밑 세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이기진 못했다.
준비해간 수경을 쓰고 파래소 위를 유영하면서 물밑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햇살이 맑은 물 속으로 그대로 꽂혀들고 있었다. 시계는 수심 3∼4미터 정도로 아주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햇살이 물 속에서 회오리처럼 둥글게 돌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물 속을 가늠하면서 파래소를 유영하다가, 또 폭포의 물을 등줄기로 맞다가 물 속에서 나왔을 땐 7월의 햇살이 설핏 기울고 있었다.
젖은 옷을 숲 속에서 갈아입고 하산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득 그가 나타났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검게 그을려 번질거렸고 떡 벌어진 어깨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넘쳤다. 산소통을 메고 올라온 걸로 봐선 스쿠버다이버인 듯했다.
"혹시 물 좀 남은 거 있습니까?"
숨이 턱에 닿아서 그가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가파른 산길을 15킬로그램이나 되는 산소통을 메고 왔으니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숨이 가빴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수통의 물을 건네주었다. 그는 단숨에 물을 들이키고 맨몸으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더위와 흐르는 땀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사람 몇 명이 수중 촬영장비들을 가지고 파래소로 왔다. 그들은 모 방송국 여름 특집물 제작팀으로 수중생물의 서식상태를 찍고 있다고 했다.
슈트를 입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그와 카메라맨을 보면서 우리는 하산을 서둘렀다. 며칠 후 그들이 찍은 파래소의 깊은 물 속을 텔레비전에서 감상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들이 찍은 파래소의 비경에 앞서 나는 그들의 사고 소식을 먼저 듣고 말았다. 바로 그날 밤 아홉 시 지방 뉴스를 통해서였다. 처음엔 실종으로, 다음엔 사망으로 보도된 뉴스를 보고 나는 물 속에서 전류를 만진 것 같았다.
사건 발생 시간은 우리가 하산한 직후, 그들은 두 번째 잠수에서 더 이상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파래소 폭포 아래는 소용돌이가 심해 해마다 익사 사고로 한두 명씩은 꼭 목숨을 잃어왔다고 아나운서는 말했다.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던 바로 그 사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땀을 흘리던 건강한 남자가 죽다니. 갑자기 소름이 끼치고 식은땀이 흘렀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을 얻어 마시며 고맙다고 씨익 웃던 그 잘 생긴 웃음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서른 아홉, 하필이면 나와 똑 같은 나이였다니…
울부짖는 그의 아내와 그의 영정이 차려진 빈소를 보았다. 바로 어제 보았던 그 얼굴이 영정으로 모셔져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스쿠버로 단련된 그 건장한 체격도 죽음 앞에선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파래소 수중 촬영은 그날이 처음도 아니었고 그는 며칠째 수중 촬영을 돕기 위해 물밑에 들어갔다는데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에 사고를 당할 게 뭐란 말인가?
푸르디푸른 나이에 그의 명이 끝이라는 아무런 암시도 없이 그렇게 허무하게 갈 수 있는 것일까? 누군들 자신의 삶이 끝나는 순간을 알 수 있을까만, 그 가파른 산길을 목이 타도록 걸어 올라와서 물 속에 잠기고 말다니, 운명의 시나리오라면 너무나 잔인한 게 아닐까.
나는 며칠을 악몽 속에서 보냈다.
내가 유영하던 그 물 속에서 두 남자가 죽었다. 아마 한 사람이 위기에 처하자 다른 사람이 구해주려다가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렸는지도 모른다. 햇살이 회오리처럼 휘돌아 들어가던 물 속. 아, 그것이 바로 소용돌이였구나.
머리 속에는 그들이 죽음 직전에 본능적으로 저항했을 상황이 상상되어 괴로웠고 어쩌면 나도 그 물 속에 잠길 뻔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나를 섬뜩하게 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심연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짙푸른 물 속을 겁없이 헤엄치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아, 우리들 인생엔 얼마나 많은 복선이 숨어있는 것일까. 물에 익숙하던 다이버가 물 속에서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함정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일까.
바로 눈앞에 닥쳐온 운명의 칼날을 보지 못하고 그 가파른 산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땀 흘리며 올라왔던 그의 수고로움은 얼마나 헛되고 무모한 것이었던가.
나에게 물을 청해 마시던 그 건강한 얼굴, 불과 몇 분 뒤로 다가온 죽음을 모른 채 물 한 모금이 다급했던 그. 나 또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언제 어디에 인생의 암초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장 눈앞의 갈증을 씻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건 아닐까?
세상살이 너무 가까운 것만 보고 살면 먼 데 있는 것이 안 보이는 법일 진데.
그날 이후 당분간 산행을 쉬고 있다.
겁 없이 오르내리던 산길, 멋모르고 뛰어든 파래소 폭포의 짙푸른 물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마지막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파래소에 가라앉아 버린 그 젊은 혼이 나를 자꾸만 붙잡고 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인생엔 생각지도 않은 복선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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