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 새벽 한 시, 운문재를 넘었다. 깊은 어둠이 웅크린 산길을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에 의지해서.
구비구비 돌아가는 운문재는 상처 많은 젊은 날처럼 울퉁불퉁 비포장 길이었다. 평탄한 길만 달려온 인생에도 가끔은 이렇게 느닷없는 비포장도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불빛에 잠깐씩 몸을 보여주곤 달아나는 나무들, 어둠 속에 그들을 남겨놓고 달리는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운문사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떤 유혹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 비구니처럼.
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邪離庵사리암을 올랐다.
숲으로 들어서자 알싸한 수풀냄새가 와락 안겨왔다. 캄캄한 어둠, 손전등도 없이 산길을 걸었다.
발끝으로 더듬어 걷는 더딘 걸음 사이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의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이 깊은 어둠 속에 깨어 있게 하는 것일까? 간절한 염원, 아니면 회한의 눈물일 수도 있겠지.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
사리암에는 끊임없이 나반존자를 외는 신도들이 백 배, 삼백 배, 천 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석가부처 열반 후 미륵부처가 출현하기 전까지 이 세상을 주재한다는 나반존자. 그는 열반을 하지 않고 살아서 미륵불을 기다리며 현존한다고 한다.
젊디젊은 여자가 연꽃 같은 절을 올린다. 등에 업힌 아이를 내려놓고 간절하게 올리는 그녀의 기도는 무엇일까?
현세에 이루기 힘든 소망을 신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나도 불현듯 그 무리에 끼고 싶다. 막막한 절망을 만날 때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일까. 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구원이요 희망인지도 모르는데.
운문사 새벽 예불을 보러 캄캄한 어둠 속을 달려오면서 내내 생각했다. 적막한 밤길을 헤매는 짐승처럼 내 영혼은 외로움에 지친 것이 아닐까. 어딘가 깃들 곳을 찾는 젖은 날개의 새처럼. 행복한 일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 나는 이 밤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일까?
3시에 시작되는 운문사 새벽 예불을 보았다.
2백 명이 넘는 학승들이 모여 올리는 예불, 그 장관을 기대했으나 어쩐 일인지 비로전에는 비구니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운문사의 새벽 예불은 2백여 비구니들의 염불 소리가 비감 미의 극치를 이룬다고 했는데… 스님들의 무반주 합창 염불은 기대만큼 장엄하지도 비감하지도 않았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처럼 조금은 스산하고 쓸쓸하게 들렸다 고나 할까.
새벽 예불 전의 도량석을 보지 못했다. 비구니들이 법당과 탑 주위를 줄지어 도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사리암에서 내려온 시간이 좀 늦었던 탓일까?
제 키의 두 배가 넘는 커다란 법고 앞에서 천천히 북을 울리기 시작하는 비구니.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無念無想무념무상의 표정을 본다.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북소리는 時空시공을 초월해 울려 퍼진다.
북소리가 잦아들고 大鍾대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속세에서 산사의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왠지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긴 여운이 끊길 듯 말듯 다시 울리는 종소리는 지옥의 중생들을 건지기 위함이라 했다.
곧 이어 물 속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목어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 날짐승의 제도를 위해 운판을 치는 쟁쟁한 소리…
비로전에서는 쇠북이 울리고 스님들의 독경과 목탁소리가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먼 숲에서는 피울음 우는 소쩍새 소리, 개울가에는 저 혼자 깊은 밤을 흘러온 시냇물의 쓸쓸한 독백. 5월 산사의 신 새벽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보일 듯 말듯 어둠이 내주는 자리로 돌아오는 새벽빛은 아직 검푸렀지만 운문사의 새벽 예불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활짝 열린 문밖으로 나왔다.
엉덩이가 푸짐한 여인이 편하게 앉은 모습 같은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뒤돌아보았다. 저 소나무가 같은 자리에서 수백 년 동안 들어온 스님들의 염불소리. 그 염불에 영험이 있다면 이제 나무도 인도 환생할 때가 되지는 않았을까?
절 집 아래 가게 주인을 깨워 칼국수를 시켰다. 부수수 눈 비비며 일어난 노파는 잠 속의 도솔천을 떨치고 금방 고해의 현세로 돌아왔다.
밤이슬을 맞으며 서성인 탓인지 몸이 추웠다. 따끈한 국물이 빈속에 들어가자 설탕이 녹 듯 온 몸이 나른해졌다.
새벽 미명 속을 달려 다시 운문재를 넘었다. 맑은 공기가 그리워 차창을 내리는 순간, 명랑한 웃음 같은 새소리가 차안으로 흘러들었다.
문득 차를 멈추고 숲의 소리를 들어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 새들이 둥지에서 칭얼대는 소리, 아카시아 꽃잎 벌어지는 소리, 연달래 피는 소리.
이 많은 소리들이 그 어둠 속에 깃들어 있었구나.
태화강을 끼고 차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커다란 홍시감 하나가 대밭 위로 불쑥 떠올랐다. 잘 익은 홍시감은 터질 듯 터질 듯 위태하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도 잠시, 해는 금방 눈부시게 창공으로 떠올라 나를 허망하게 했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잠시 잠깐 우리들 눈앞을 스쳐갈 뿐인가.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운문사 새벽 예불은 나에게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2백여 비구니들의 무반주 합창 염불의 비감 미는 상상 속에 살아 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운문사에 가리라. 내 상상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그 깊은 밤, 불전에 엎드려 비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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