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직장생활로 모은 돈을 사업이란 걸로 몽땅 날린 후 그들은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피폐한 영혼과 육신을 가다듬어 새 출발하기 위함이었다.
한숨과 울분, 원망과 회오를 걸머지고 오르는 산길은 아득한 절망이었지만, 산정에 이르러 그들이 올랐던 산길을 굽어보면 울분도 한숨도 어느새 용서로 변하는 것이었다.
폭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육신과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상처받은 영혼은 한동안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었지만 산에 다니면서 그들은 너그러운 체념을 배운 것이다.
키 낮은 산죽이 속닥거리는 오솔길도 지나고 울퉁불퉁 돌부리에 발이 걸리기도 하면서 산을 오르다 보면 억새풀이 우거진 능선에 서고, 어느새 푸른 하늘이 손끝에 닿는 정상.
고운 세월 미운 세월 다 보낸 것처럼 초연한 심정으로 그들은 말없이 마주 앉아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암갈색 커피 속으로 내려앉는 하늘엔 흰 구름이 크림처럼 녹아들고, 산새 소리도 그친 산정에는 바람만 무성하다.
"산에서는 술보다 이게 낫구려. 취하는 맛은 없지만."
위벽이 헐어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는 남편, 한때 그는 李白이백의 山中對酌산중대작을 읊으며 술을 즐기던 낭만파 애주가였다.
"여보, 미안해요. 당신이 나를 만나지만 않아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좋아하는 술을 못 먹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의 탓이다. 그녀가 남편을 망하게 했고 그녀가 그를 병들게 했다.
여고시절 친구의 남편이 믿어 보라며 건네준 어음 몇 장이 연쇄부도를 낼 줄 누가 알았던가?
늘 푼수 없는 월급쟁이 면해보겠다고 시작한 작은 사업이 생각지도 않은 일로 무너지자 그녀는 도망간 친구와 그 남편을 찾아 낯선 도시를 헤매 다녔다.
"찾아봐야 소용없어. 그 사람이 무슨 죄 있나? 그 사람도 결국 피해자야."
"그래도 그는 그 회사 자재부장이었으니 회사 사정을 잘 알았을 것 아니에요? 자금 사정이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어쩜 우리에게 믿으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분하고 억울한 것은 그들을 파산하게 만든 장본인이 그녀의 고향 친구며 여고시절의 단짝 남편이었다는 것이다.
이십여 년 쌓아온 우정이 그들의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
"잊어버립시다. 내 그릇은 사업가가 아니었던 모양이오. 내 그릇에 넘치게 욕심을 부리다 보니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오. 타고난 그릇대로 사는 게 순리인데 나는 역리로 살았으니…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가 아직 젊고 또 아이들이 어려서 그들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은 것이오."
사십대 파산은 일어서기 힘들지만 삼십대 파산은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그는 아내를 달랬다. 말이야 그렇게 하면서도 그 쓰라린 속은 어떠했을까? 아내 몰래 사다 마신 소주병이 방구석에 감추어져 있는 걸 보면서 그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산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어쩜 일시적인 현실 도피의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심정,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데 대한 막막한 불안.
그러나 한 달 두 달 산을 오르다 보니 그들은 스스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이 밟아 올라온 산길이 그러하듯이, 인생이란 아름다운 오솔길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잡목이 우거진 숲처럼 세상에는 낙엽송처럼 쭉쭉 곧은 사람들도 있고 바위틈에 휘어져 비틀린 소나무 같은 사람도 있다.
정상을 바라보고 올라갈 때는 힘들지만 산정에 섰을 땐 모든 고난이 잊혀지듯이 인생이란 여정도 끝나는 순간은 너무도 쉽고 어쩌면 아름답게 느껴질지 모른다. 저렇게 빤히 보이는 길을 그렇게 힘들게 올라왔구나 하고 깨달을 것이다.
산정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들 부부에게 지난 세월과의 너그러운 화해를 마련해준다. 그 동안 살아온 날의 흔적이 너무나 미미하지만 조바심 내지 말고 살자고 그들은 말없는 약속을 한다. 육신의 눈길은 먼 산너머에 두었지만 영혼의 눈길은 언제나 서로의 가슴속을 헤아리면서.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는 그녀의 바람막이 역할에 충실했다. 결혼하고도 한동안 아이가 없었던 그들의 가정을 두고 주위에서 수군거릴 때에도 그는 '내 집 마련해서 애 낳을 테니 두고 보라'고 웃어 넘겼고, 연상의 여자와 살면 손해 아니냐고 짓궂게 구는 친구들에게도 '정신연령이 문제지'라고 일축하곤 했다.
수저 한 벌로 시작한 살림이 일어서기도 전에 주저앉은 뒤, 몇 달간의 지옥 같은 생활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아직은 젊은 목숨, 예서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으로.
바로 그때 산이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을 산에 기댔다. 산은 너그러운 품에 말없이 그들을 안았다.
산에 다닌 뒤로 그들의 대화 속에는 원망보다 감사가 많아졌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그래도 행복이 많소. 재물은 한 번 실패했지만 우리는 아직 시간이 많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산에 오를 수 있는 건강한 육신이 있지 않소?"
우여곡절이 많은 세상살이처럼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라 그들은 정상에서 언제나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커피 속에 크림이 녹아들듯 지난 세월이 이해와 용서로 녹아드는 산정의 커피 한 잔은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준다.
내일 그들의 몫은 아마도 행복이겠지.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산이 좋아라  (0) 2005.07.14
신년여행  (0) 2005.07.14
그 새벽의 운문  (0) 2005.07.14
파래소 인연  (0) 2005.07.14
새아침 까치소리  (0) 2005.07.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