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이 핀다. 푸른 잎사귀 사이에 숨어 있다 벌떼에게 들켜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 내미는 그 꽃을 어린 시절
고향 말로는 '감똘개'라 했다. 감똘개. 감똘개. 눈만 뜨면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감똘개를 주웠다. 치마폭이 가득하도록. 바람이
불 적마다 감똘개는 우수수 떨어지고, 나무 밑에선 벌떼가 분주히 윙윙거렸다. 기왕이면 이제 막 떨어지는 새 꽃을 줍고 싶어 치마폭을 싸쥐고
오리걸음으로 감나무 밑을 헤매던 나에게 중학 다니는 옆집 오빠는 마치 삼손 같았다. 그가 감나무 밑동을 발로 한 번 뻥 차면 우박처럼
감똘개 소나기가 퍼부었다. 내 머리 위에도 삼손의 어깨 위에도 감똘개가 어지러이 떨어지고, 벌떼들은 놀라 일제히 나무에서
물러났다. 감똘개가 소나기로 퍼붓는데 재미를 붙인 옆집 오빠는 자꾸만 나무 밑동을 차다가 마침내 제 엄마의 고함 벼락을 맞았다. "이
녀석아! 고무신 다 터진다." 오빠는 고함을 지르며 쫓아 나오는 제 엄마의 부지깽이에 쫓겨가고, 할금할금 눈치만 보던 나는 생쥐같이
재빠르게 집으로 달려왔다. 손바닥만한 쪽마루에 앉아 숨을 쌕쌕 몰아쉬고 치마폭을 벌려 감똘개를 쏟아 부으면, 꽃 속에 숨어 있던 개미들이
놀라서 기어 나왔다. 바늘에 실을 꿰고 감똘개 꽁무니를 찔러 목걸이를 만들면서, 나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감똘개 목걸이를 만들리라
싶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저마다 목걸이 하나씩을 걸고 와선 '이것 봐, 내 것이 더 길어' 하고 아우성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목걸이는 내 소원대로 기차만큼 길어지지 않았다. 감똘개를 실에 꿰는 속도가 먹어치우는 속도를 당해낼 수 없었던 까닭이다. 꽃받침을 떼어낸
감꽃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붓고 씹으면 달착지근하고도 아릿한 향기와 함께 꽃즙이 목안으로 흘러들어 코가 훤히 뚫리는 기분이 되곤 했다. 그
맛을 못 잊어서 나는 늘 더 많은 감똘개를 줍기 위해 부지런히 감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떤 날인가는 누군가 감나무 밑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버려서 어린 내 가슴을 허무하게 했다. 한쪽에 흙과 뒤범벅이 되어 있는 감똘개를 아깝고 서운한 생각에서 손으로 헤쳐 보았지만
감똘개는 이미 먹을 수도, 실에 꿸 수도 없을 만큼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궁리 끝에 나는 아끼던 새 고무신을 벗어 나무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꽃이 많이 열린 가지를 골라 신중하게 겨냥한 뒤 힘차게 고무신을 던져 올리면 아쉬운 대로 몇 개의 감똘개가 떨어졌다. 그때
구세주처럼 이웃집 삼손 오빠가 나타나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어머니의 부지깽이 앞에 한없이 무력한 삼손은 영 나타나지 않고,
고무신 던져 감똘개 따기엔 양이 차지 않던 나는 마침내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나무 밑동을 발로 뻥 차보았다. 하지만 감똘개는 날
비웃듯 잎사귀 뒤에 숨어 연노랑으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 고무신은 그만 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큰일 났다 싶은
생각에 꾀를 낸다는 것이 남아 있는 한 쪽 고무신으로 나무 위의 신발을 맞춰 떨어뜨리는 것이었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밭 매는
어른의 앉은키보다 더 작은 내 키에 비해 감나무는 너무나 높았던 까닭이리라. 이젠 감똘개를 따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무신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참새 만한 내 머리통을 꽉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또 신발 잃어버리고 왔구나 너?" 하고
어머니의 솥뚜껑 같은 손이 금방이라도 볼기짝으로 날아올 것 같아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결국 고무신 두 짝을 모두 나무 위에 올리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실직고한 뒤 자청해서 볼기를 맞았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눈만 뜨면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던 버릇은
없어졌지만, 그건 신발 때문에 혼이 나서라기보다, 그때쯤 이미 감똘개가 지고 몽당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 만한 감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름 내내 감은 나를 비롯한 동네 개구쟁이들로부터 한동안 잊혀진 채 무럭무럭 잘 컸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이 들판을
서성거릴 무렵 주먹만큼 자란 감은 내 눈에 당장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룻밤 자고 나무 밑으로 가 보면 탐스러운 감이 몇 개씩 떨어져
있었지만, 그걸로는 욕심이 차지 않아 매미채로 생감을 따서 항아리에 담갔다. 항아리 속의 감이 익을 때까지는 며칠이 걸렸으므로 성질 급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장독대를 들락거리다가 더러 항아리 뚜껑을 깨먹곤 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깨진 항아리 뚜껑을 뒤로 살짝 돌려놓고
시침을 뚝 따고 있다가, 비 온 뒷날 장독대 씻던 어머니에게 발각되면 나는 또 동네 밖으로 멀찌감치 내달아야 했다. 그렇게 많은 시련을
겪고도 감나무는 끈질기게 살아 한겨울까지 빨간 감홍시를 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감똘개 목걸이 걸고 항아리 깨먹던 내가 성인이 된 뒤
어쩌다 한 번 씩 고향집에 들를 때도 감나무는 거기 그대로 서서 자랑스런 열매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고향을 지키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고향을 말없이 지키고 있는 시골 노인네의 모습이었다. 객지로 떠난 아이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감나무는 올해도
무성한 감똘개를 피우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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