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어떤 감동. 나는 그런 마음의 동요를 매혹이라 부르고 싶다.
한 폭의 그림, 한 곡의 음악, 혹은 한 편의 영화나 책이 매혹일 때도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숨을 탁 막히게 할만큼 매혹적일 때도 있다.
스물 다섯 살 때 처음 가 본 제주 성산포 앞 바다는 거대한 자력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일출봉의 분화구 안에 무성하게 피어있던 원추리 꽃과 세찬 바람에 드러눕던 키 큰 풀들을 잊을 수가 없다.
스메타나의 '몰다우강'을 처음 듣던 날, 나는 목이 메어와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슬픈 그 선율에 매료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허밍은 언제나 '몰다우'였다.
"저 옷 좀 봐!"
도시가 밤화장을 시작하는 시각, 번화한 거리 어느 옷가게 앞이었다. 쇼윈도우 안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버렸다. 흑백의 대비를 멋지게 디자인한 그 한 벌의 옷에 매혹 당해 나는 밤잠을 설쳤다. 돈이 모자라 그 옷을 내 것으로 하기까지 안절부절하며 며칠을 보냈다.
나는 미스코리아나 영화배우 누구에게 매혹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단 한 번 어떤 얼굴에 홀딱 반해버린 경험이 있다.
양초처럼 하얀 얼굴에 검고 커다란 눈을 가졌던 그 사람은 입사시험 때 면접을 담당했던 모 회사 사원이었다.
"입사 후 어느 파트에 근무하고 싶습니까?"
무슨 대답인가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단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를 바라보는 그 형형한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속처럼 신비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신비의 눈동자는 한 달도 못돼 서울사무소로 발령이 나버렸다. 나에겐 아무런 귀뜸도 없이. 알고 보니 사생활이 무척이나 복잡해 이혼하고 서울로 도망갔다는 후문이었다.
첫눈에 매혹 당한 나의 짝사랑은 너무도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한 때 나는 이문열의 소설에 매료당했고 또 한 때는 조용필의 목소리에 반했으며 언젠가는 한 점의 그림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그런데 매혹이란 감정은 아주 강렬하지만 지구력이 약하다는 걸 나는 차츰 깨달았다.
쉽게 뜨거워진 양철이 빨리 식어버리듯이 첫눈에 매혹 당한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미운 정 고운 정 들며 사귄 사람에게서는 매혹을 느낄 수가 없다. 때론 권태롭고 증오에 가까운 감정도 느끼며 멀리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참신한 매력으로 다가온 사람에겐 당장에 포로가 된다.
너를 위해 내가 무얼 어떻게 더 해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감정은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한 때 그 앞에서 못이 박힌 듯 서 버렸던 한 벌의 옷은 이태를 입지 못했고 나의 허밍도 '어두운 숙명'으로 바뀐 지 오래인 것처럼.
세상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이웃에 함께 살게 되어서 , 취미가 같아서, 혹은 자녀들이 같은 반 친구라서… 그 많은 만남 중에 나는 첫눈에 혹하는 사람보다 오랜 세월 사귀면서 정이 깊어지는 사람을 갖고 싶다.
총명하고 활달하고 아름다운 매력에 순간적으로 반하기보다 마음 깊은 곳 정을 줄줄 아는 사람의 끈끈함을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는 사람은 많아도 친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떤 이해관계로 맺어져 있거나 겉치레 사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난히 '계중'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저런 핑계로 모임을 만들고 함께 어울려 놀면서 행여 자신이 무리에서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혼자 외톨이가 되면 사회에서 버림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많은 사람들이 또 많은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지고 우애를 나누는 것이 가끔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저들은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좋아할까? 불의의 사태에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건성으로 친하는 백 명의 친구보다 진실을 나눌 수 있는 한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일생 동안 한 명의 진실한 친구만 있어도 인생에 성공한 거라고 한다. 열 명, 스무 명의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이 나는 부럽지 않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보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가 약간 괴팍하다고 해도, 그의 외모가 형편없다 해도, 그가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나는 첫눈에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보다 오래 지켜볼수록 정이 가는 사람을 사귀고 싶다. 나도 누구에겐가 그렇게 다가가고 싶다.
'평생 친구 단 한 명'은 매혹적인 대상이 아니다. 은근하고 면면하게 이어지는 사이. 질화로의 숯불처럼 속으로 뜨거운 사이다.
나는 평생친구 단 한 명을 가졌으므로 친구 많은 사람이 부럽지 않다.
내가 가장 외로울 때 찾아갈 수 있는 사람. 내가 상처받아 괴로워할 때 기꺼이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 그걸로 나는 만족한다. 모난 내 마음을 다 헤아리고, 인간관계에 실패가 많은 나를 그녀는 잘 위로해준다.
25년 동안 쌓은 우리 우정에는 때로 시기 질투도 있었고 환멸도 있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원망한 적도 많았다. 서로에 대한 독점욕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친분을 허용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지나치게 집착하고 집요하게 서로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묵은 정이 좋다'는 걸 서로 깨달았다. 첫눈에 매혹되는 새 사람보다 미운 정 고운 정 쌓인 우리 둘이 가장 좋은 파트너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성격이 모난 사람을 듣기 좋게 '개성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아마 개성이 뛰어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직언을 서슴지 않는 급한 성격하며, 섣불리 마음을 다 열었다가 번번이 상처받곤 하는 감수성하며.
평생 친구 단 한 명은 그런 나를 다 이해한다.
그녀와 나는 결코 첫눈에 매혹되지 않았다. 연륜을 쌓아가면서 오래 사귀다 보니 그녀처럼 예쁜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중년여인의 잔주름 잡힌 얼굴이 갈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일 게다.
한 때 불같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열렬하게 미워하면서 돌아서기도 하고, 내 것 네 것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 소 닭 보듯 스치는 모습도 본다.
인간관계가 늘 좋을 수만은 없지 않는가. 그래도 나는 가끔 허망하고 쓸쓸하다. 나를 스쳐간 인연들이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요즘 어떤 일에도 쉽게 매혹 당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도 그렇고 사물을 대해도 그렇다. 젊은 날 뜨거운 가슴이 있을 땐 화르르 타오르던 감정이 나이 들어감과 함께 차분하게 가라앉는 탓일까?
덤덤한 일상을 보내면서 문득문득 내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끔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다.

'名色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아침 까치소리  (0) 2005.07.14
감똘개 필 무렵  (0) 2005.07.14
봄눈  (0) 2005.07.14
사양  (0) 2005.07.14
내 마음의 금봉암  (0) 2005.07.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