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 주말, 느닷없이 함박눈이 내린다. 예년 이맘때면 남쪽 꽃소식이 사람들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울 텐데
갑작스런 함박눈이라니. 겨우내 눈은커녕 얼음 구경도 못하다가 봄의 초입에 만나는 눈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축복처럼 눈을 둘러쓴
상록수들. 잎을 잃은 활엽수 가지마다 사뿐히 내려앉은 눈은 섬세한 실루엣으로 되살아난다. 눈에는 사물의 형태를 완만한 곡선으로 마무리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철조망 가시 위에도, 고층 빌딩의 첨탑 위에도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둘러주고 있다. 나는 차체에 소복하게 얹힌 눈을
털어 내고 불국사로 향한다. 무한대의 공간 속으로 가벼이 흩날리는 눈은 가속도가 붙을수록 눈보라로 휘몰아친다. 온 누리를 바느질감처럼
하얗게 누벼 박는 눈, 먼지처럼 무게 없는 몸들이 이 세상을 가볍게 유린하고 있다. 질주하는 차창 넘어 가난한 산야가 은백으로 뒤덮이는
광경이 한 눈에 잡힌다. 메마른 들판에, 초췌한 밭두렁에 봄눈은 은총처럼 퍼부어 내린다. 과수원에는 철모르는 배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 눈 내리는 날의 불국사를 보고 싶었다. 올 겨우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나 싶었는데, 겨울의 끝 거의 잊어버린 시점에서 함박눈 속의
불국사를 찾게 되다니. 불현듯 잊어버린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이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황폐 위에 함박눈처럼
그리움이 퍼부어 내린다.
'나, 여태 사랑을 잊고 살았네. 포기하고 살았네. 겨우내 숲 속의 오두막에 갇혀 나도 몰래 자폐를 앓고
있었네. 계절조차 잊어버린 가슴에 오늘 아침 문득 함박눈이 쏟아졌네. 뜨거운 사랑처럼. 쏟아지는 그 사랑의 맹세처럼.'
체념한 지
오래인 옛 연인이 나타나듯 눈은 내 가슴으로 느닷없이 쏟아져 내렸다. 준비도 예감도 없이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이며 나는 황홀한 충격에
빠진다. 하얀 주단을 밟고 불국사 경내를 걷는다. 다보탑보다 세 배쯤 키가 큰 소나무가 등에 구름 같은 눈을 얹고 기와지붕을 넘어
본다. 기와의 곡선 따라 부드럽게 쌓이는 눈이 친근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경내를 걷다가 문득 화들짝 핀 설중매를 만난다. 봄이
오리라는 예감으로 온 몸을 열어버린 가여운 목숨. 연분홍 꽃봉오리가 벌어지며 머금는 그 신비로운 미소는 눈 속이라 창백하기만 하다. 시한부
목숨을 각오한 설중매의 장한 사랑이 느껴진다.
'다시 내 가슴에 사랑을 담을 수 있었으면. 알 수 없는 열정으로 마음 설레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가슴앓이를 할 수 있었으면. 오랜 자폐를 털고 내 마음에 의심 없는 사랑 하나 키울 수
있었으면.'
춘설(春雪)은 중년(中年)의 사랑을 부추긴다. 알 수 없는 연애감정이 솟구쳐 올라 눈발처럼 가벼이 공중에 뜨는
가슴이 된다. 이젠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새삼스럽게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꿈꾸는 세계가 이 세상 어딘가 에는 있을
것 같고, 내가 기다리는 아름다운 인연도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대상 없는 그리움으로 마구 설레는 가슴. 문득,
오랫동안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어두운 색상의 의상들도 갈아입고 싶다. 예쁜 속옷도 사고, 귀여운 액세서리도 마련하고 싶다. 여태 부려보지 못한
감정의 사치와 허영을 오늘 마음껏 누리고 싶다. 스스로 쌓은 금욕의 성을 소리 없이 무너뜨리면서. 오랜 칩거로 나의 겨울은 너무나
황량했었다. 옷자락을 꼭꼭 여미고 가슴속의 화산을 숨긴 채 근엄한 금욕주의자의 얼굴로 살아왔다. 겨우 불혹의 나이에, 종착역을 눈앞에 둔
밤열차를 탄 듯 피곤한 기색으로. 살아갈수록 감동이 엷어져서 안타깝다. 사물을 보는 눈이 왜 자꾸만 시큰둥해지는 것일까. 눈
내리는 풍경 하나에도 가슴이 설레던 내 여린 정서는 세월의 풍화에 마멸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나이 들수록 마음 한 구석에 사랑 한 조각
담기 어려워지는 것은 점점 작아지는 마음그릇 탓일 게다. 내 마음에도 사랑보다는 미움과 원망이 아직 더 많다. 사소한 일에도 서운해
돌아서서 입술을 무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너에게 얼마나 많이 주었는데, 너는 내게 돌려줄 줄 모르냐고 책망했었다.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주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거늘, 나도 몰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서운했었다. 영지에 고인 맑은 물처럼 영혼의 때를 벗고
싶다. 하지만 벗고 싶으면서도 벗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살고 있다. 五官오관은 열어 놓고 마음은 닫아 놓은 도시인에게 사랑은 얼마나
아득한 것인가. 그러나 오늘, 나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겨우내 기다리다 지쳐서 이젠 잊어버린 함박눈이 3월의 초입에 예언처럼
내리듯이, 새로운 사랑을 가슴에 품고 싶다. 황량했던 지난겨울은 잊어버리고, 누군가에게 봄눈처럼 느닷없이 즐거운 충격으로 다가가고 싶다.
잊었던 그리움으로 안기고 싶다. 아, 아. 그러나 봄눈은 이내 그치고 말았다. 폭설로 내리쏟던 그 사랑의 맹세가 뚝 그치고 말았다. 지상을
하얗게 뒤덮어 오던 분분한 낙화가 멈추어 버린 것이다. 눈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설레는 발걸음이 분주하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다.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눈 쌓인 풍경과 함께 필름 속에 정지된다. "빨리 찍어요. 눈 녹기 전에." 서둘러 사진을 찍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아, 그래. 봄눈은 이렇게 서글픈 것이다. 긴 겨울 마음놓고 나뭇가지에 앉아 멋 부리는 여유는 없는 것이다. 햇볕이 나면
한 순간에 스러질 안타까운 목숨이 아니었던가. 속절없는 사랑, 헛된 맹세처럼 봄눈은 화려하게 찾아왔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 다시
시작한다면, 아마도 내 사랑이 그러하리라. 잊었던 그리움으로 다가와 영혼을 뿌리 채 흔들어놓고, 햇볕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봄눈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가버리겠지. 중년의 사랑은 춘설처럼 안타까운 것, 느닷없이 찾아왔다 짧은 순간 사라지고 말 것만 같다. 겨우내 기다린
눈을 봄의 초입에 맞는다. 이 즐겁고 황홀한 충격처럼 어떤 사건에 빠지고 싶다. 누군가에게 매료당하고 싶다. 마음의 빗장을 풀어 그를
맞이하고 싶다. 이제 눈은 오지 않으리라고 포기한 그 순간에 내린 봄눈처럼 그렇게 그가 내게로 오리라. 흠뻑 눈을 맞고 설해목으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봄눈 속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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