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斜陽)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신도시에 서커스가 들어왔다.
왕복 8차선의 넓은 도로 양편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布陳포진하고, 사이사이 꽤 넓은 땅이 아직 공터로 남아있는 곳. 곡마단은 이 공터 한 가운데 천막을 쳤다.
原木材원목재로 천막의 골조를 만드는 단원들의 모습이 며칠 전부터 눈에 띄었지만, 사람들은 설마 그게 서커스 천막일까 싶었다. 이 도시에 보기 흔한 모델하우스겠지 생각했다.
서커스 천막은 빨강 파랑 원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도 현대식 최신공법으로 건축된 고층빌딩 앞에는 왠지 기가 죽어 보인다. 천막밖에는 '세계적 수준의 70년 전통 서커스단'이라느니 '신비의 기예, 환상의 묘기 국내 최초 공개'글씨들이 깃발과 함께 나부끼고 있는데도.
추석을 앞두고 신도시에 들어온 서커스단은 공터에 집을 지어놓고 이 도시 전역에 초대권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우편함에 한 장씩 들어있는 초대권을 가지면 반값에 서커스를 볼 수 있단다.
하지만 신도시의 젊고 세련된 주민들은 서커스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쾌적한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으로 즐기는 '세기의 마술'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하는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구경 갔던 장터의 서커스단을 생각하며 나는 어느 날 곡마단 구경을 나섰다.
매표구 앞에는 귀여운 피에로 대신 덩치 큰 사내가 새치기 손님을 지키고 있다. 머리 위에서는 외나무다리에 묶인 원숭이들이 길 가는 아이들을 부르고 있다.
천막을 밀치고 들어서니 훅 끼치는 땀 냄새. 9월이라지 만 계절은 아직 여름을 벗어나지 못해, 관객들은 땀을 흘리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러는 웃통을 벗고 더러는 부채를 부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서커스단의 레퍼토리는 별로 변한 게 없다.
마술사의 손장난에 '이번만은 속지 않겠다'고 두 눈 번쩍 뜨고 지켜보는 마술도, 강아지 몇 마리가 재롱을 부리는 동물묘기도, 줄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걷는 외줄 타기도. 다만 변한 것은 어른이 되어버린 내 시선 뿐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 서커스가 들어오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어른들을 졸라 서커스를 보고 온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자랑이 대단했었다.
허리를 뒤로 젖혀서 발이 머리에 닿도록 몸을 구부리던 서커스단의 소녀는 밥 대신에 식초를 먹고산다고 했다. 말 안 듣고 말썽 부리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말했다.
"서커스단에 잡아가라고 할 테다."
그럴수록 서커스 구경은 우리들에게 더욱 신비하고 기괴했다. 까마득한 공중에서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본 뒤, 이부자리에 오줌을 싼 아이도 있었다.
어린 눈에는 그토록 높아 보이던 무대, 아득한 공중 어딘가에 매달려 있던 외줄, 하늘을 나는 듯하던 공중곡예.
그러나 오늘 내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낮고 후줄근하고 조잡해 보인다. 엉성한 그물하며, 얼기설기 설치한 나무 기둥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하다.
팽팽한 긴장으로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옛날의 객석은 맨땅이었지만 관객들은 진지하게 서커스를 지켜보았다. 손에 땀을 쥐면서, 때로는 짧은 탄성과 함께 요란한 박수를 아낌없이 쳐주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객석은 산만하고 무질서하다. 접는 의자 하나에 천 원씩 내고 앉는 자리, 관객들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서커스를 즐기고 있다.
외줄을 타던 사람이 중심 이동을 잘못해 휘청거려도, 공중비행하던 사람이 그물 위에 떨어져도,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다.
감동과 환상이 사라진 시대.
하긴 이즈음 우리들은 얼마나 큰 사건 사고로 충격에 대한 면역이 되었는가? 수백 명의 목숨이 한 순간에 매몰되어 버린 현장을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본 우리들이 아닌가? 그에 비한다면 곡예사의 실수는 자동차의 접촉사고처럼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덤블링하는 소녀도, 아크로바트하는 소녀도, 그 옛날엔 참 앳된 나이였는데, 오늘 소개되는 여인은 아무리 봐도 나이 사십은 되었겠다. 아마 어릴 때부터 이 바닥에서 자라온 여자일 것이다.
무대에서 묘기를 부리고, 천막에서 먹고 자고, 그러다가 어떤 남자와 사랑도 했겠지. 어쩌면 아이도 낳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공중그네를 탔다. 남자 단원과 함께 하나의 그네에 발을 같이 얹었다. 둘이 서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장난기가 조금씩 담긴 표정이다.
휘청, 하고 남자가 일부러 줄을 퉁기자, 금방 중심이 흐트러진 여자가 남자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린다. 객석에서 키들거리는 웃음들.
옛날 곡예사는 기예에만 몰입했지만 현대의 곡예사는 코미디 연출도 해야 하나 보다. 서커스 천막 입구에 현수막으로 내 걸린 선전 문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재미없었다면, 웃지 않았다면 입장료 환불해 드립니다'
그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 곡예사는 재주를 부리는 도중에 익살스런 몸짓으로 관객들을 웃겼다.
그러나 그 웃음은 조금쯤 눈물겨웠다.
3부로 나누어서 마술, 동물묘기, 공중곡예를 펼치는 곡마단은 무대가 바뀌는 사이사이 책받침도 팔고 카메라도 판다. '동동구리무'를 팔던 그 전통은, 이제 컴퓨터가 내장된 전자동카메라를 세금만 받고 파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온몸을 구부려서 조그만 유리상자 속에 들어갔던 소녀가 곡예사들의 묘기가 조악한 색채로 코팅되어 있는 책받침을 객석 사이로 다니면서 팔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커스의 하이라이트는 공중곡예. 어린 내 눈에 까마득한 높이로 느껴졌던 허공에서 곡예사들은 그네를 탄다.
한 사람이 천장 가운데 매달린 그네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리자 맞은편에서 또 하나의 그네를 탄 사람이 몸을 날린다. 찰나, 두 사람은 신뢰의 눈빛을 주고받은 뒤 한 순간 허공에서 하나가 된다.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여지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위험한 묘기. 그러나 이 긴장된 순간마저도 곡예사들은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했다. 두 개의 그네에서 마주 날아오던 상대편의 바지를 훌렁 벗겨버리는 것이다.
관객들의 폭소로 사기가 치솟는 곡예사들. 천막 안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비로소 돈이 아깝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이다.
워낙 크고 많은 일에 놀라봐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웬만한 일로는 크게 놀라지도 웃지도 않는다. 공중그네를 놓쳐 그물로 떨어지는 곡예사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그가 익살스럽게 그물 위를 걸을 때도 많이 웃지 않는다.
서커스는 하루종일 연속공연이라지만, 신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천막 앞을 지나쳤다. 이제는 흘러간 서커스 따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10년만에 고향을 찾아왔다는 서커스단의 선전도 아랑곳없이 공터에 세워졌던 천막은 공연기간이 끝나기 바쁘게 헐리고 있었다.
곡예사와 후견들만도 열댓 명은 넘을 텐데, 그 많은 식구들 밥은 굶지 않는 것일까? 저 많은 장비와 비품을 끌고 내일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흙바닥에 앉았다가 옷을 털고 나가버리면 그만인 손님들.
그러나 천막 아래서 자고 먹는 사람들은 천막과 함께 유랑하며 언제까지나 서커스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오랫동안 그들의 울타리였던 무대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어져서. 혹은 그들의 피 속에 스며있는 보헤미안 기질 때문에.
서커스가 떠난 자리는 황량한 공터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구경하던 서커스는 꿈과 환상과 놀라움을 주었지만, 그 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 구경하는 서커스는 왠지 쓸쓸하고 서글펐다.
기우는 햇살이 그러하듯이,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슬프다.
한 때의 인기를 누리며 세간의 화제로 떠돌던 곡마단도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70년 전통이라고 아무리 우겨봐도 서커스를 부흥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
곡마단은 떠났지만 내 마음 언저리엔 울긋불긋한 천막이 아직 남아있다.
한 때는 그리도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곡마단 나팔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다시 한 번 그 소리에 가슴 설레며 천막 주위를 서성대고 싶다.
아직은 꿈이 있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어디엔가 실존하는 것으로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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