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싸지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내 마음에 불을 지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의 뫼(火旺山.757m)를 찾아 고속도로를 달리며 가슴속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성냥만 그어대면 한순간에 타버릴 정도로 내 가슴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오늘, 정월대보름. 화왕산을 태우는 불길에 가슴 속 응어리를 모두 태워버리자.
끊지 못한 인과(因果)와 애증(愛憎)을 함께.
화왕산 정상을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르는 길을 버리고 옥천리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관룡산이 한눈에 다가온다.
기묘한 바위들로 관(冠)을 쓴 관룡산,
아기자기한 그 바위 능선을 넘어가면 5만6천평의 화왕산 억새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단숨에 그를 만나기보다는 멀리서 아주 멀리서 천천히 다가가며 보고 싶었다.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던 관룡사는 불사(佛事)가 진행중이라 경내가 산만하다.
기와불사에 시주를 권하는 천막을 지나
시멘트와 모레 무더기를 밟고 약사여래불을 배알할 수 있다.
낡은 기둥과 퇴락한 단청 위에 기와만 새로 올린 모습이 한복 치마에 모자를 쓴 듯 어색하다.
가파른 오르막을 30분쯤 치고 오르니 처마 끝의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한 절벽에
작은 암자가 걸려있다. 청룡암이다.
어느 풍수가 터를 잡았는지 몰라도 '기도발' 잘 받게 생겼다.
저토록 가파른 절벽 끝에 암자를 지은 정성을 봐서라도 부처님이 돌봐주시겠지.
계룡산 모처에 가면 기도발 잘 받는 자리를 사고 판다.
벼랑 끝 앞이 탁 트이고 높다란 자리에서 기도하면 기도발을 잘 받는다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것이지 부처도 하느님도 마음에 있는 게 아니던가?
암자를 지나 넓은 바위에 서니 용선대 석가여래좌상이 건너다 보인다.
관룡산 정상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끝에 봉안된 불상은 암반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이 불상에 광배(光背)가 없는 이유는 관룡산이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란다.
기막힌 해석이요 멋드러진 풍수다.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를 지나 위험천만한 꼭대기를 넘어 관룡산 정상에 이르자
동쪽으로 화왕산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정상 부근에 널따란 분지를 두고 산 둘레는 모두 급경사 벼랑으로 이루어진 화왕산.
오늘 저녁 저기서 산정의 불놀이가 펼쳐지리라.
한발한발 화왕산을 향해 나아간다. 수만평 억새 바다에 빠지러 간다.
가슴 가득 억새를 안고 있는 화왕산성을 밟아본다.
하늘금을 이룬 산성 위를 걸으니 발길이 허공을 딛는 기분이다.
진흥왕 때 대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축성되었다는 화왕산성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내성을 축조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던 산성은 오늘날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배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산정은 잔치 분위기다.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 부럼을 나누어주는 사람, 소원풀이 짚단을 파는 사람, 달집에 부적을 거는 사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카메라의 도열이다.
달집 사르기와 억새 태우는 장면을 찍기 위해 일찌감치 산을 오른 사진작가들은
삼각대를 세우고 앵글을 고정한 채 산정을 지키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구도를 잡기 위해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아침 일찍 산을 올랐을 그들.
한 점의 작품을 얻기 위해 추위에 떨면서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은 그 열정이 부럽다.
세상에 불 구경만큼 재미진 게 없다더니, 산정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억새보다 사람 숫자가 많은 듯하다.
배바위는 물론 건너편 정상과 이어진 봉우리마다 사람들로 빼곡하다.
3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행사이니 학수고대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억새밭에 불을 지르는 것은 화왕산의 산채가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이 산에 불이 나면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하다는 전설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게는 가정의 액을 물리치라는 염원이 담겨있고,
크게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지만
감히 누가 산 하나를 태워버릴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 억새 태우기가 시작된다.
원뿔 모양의 달집을 태우고 억새밭 가장자리에 붙은 불은 삽시간에 안으로 번져나간다.
방화선 안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던 억새들이 화르르 타오르며 맹렬한 불길이 달려간다.
오랜 가뭄에 바싹 마른 억새들은 잠깐 사이에 재가 되고 요원(燎原)의 불길은 하늘로 솟구친다.
바로 그때 폭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져 오른다.
눈 앞에는 시뻘건 화염, 머리 위에는 현란한 불꽃놀이.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해발 750미터 눈 앞에서 터져오르는 불꽃놀이는 상상도 못했다.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은 억새밭의 불길을 무색하게 만들며 엄청난 밝기로 산정을 제압한다.
하늘에서는 천둥 같은 폭발음과 현란한 불꽃놀이, 땅에서는 솟구치는 불기둥...
산 전체가 화산 폭발하듯 한 순간에 타오르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아찔한 오르가즘에 도달하기까지 불과 5분.
모든 것은 순식간에 타오르고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억새밭을 맹렬하게 달려가던 불길도, 천둥같은 폭죽 소리도.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은 남아있는 불씨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도 한동안 충격 속에 멍하니 서 있다. 방금 내가 본 게 현실이었나, 착란이었나?
환장고개를 넘어 자하골로 하산하는 인파를 보며 우리는 배바위 동쪽 능선을 타기로 한다.
달이 뜨지 않으면 어떠랴,
마음 속에 달 하나 품고 배바위를 넘을 때 내 발길은 구름 위에 있는 걸.
함께 걷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와 손전등에 위안을 느끼며 걸어가는 산길.
잔설이 남은 암릉은 미끄럽고 위험했지만 야간산행의 묘미가 짜릿했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보름달이 얄미운 애인 같다.
내 품에 확 안기면 좋으련만, 올듯 말듯 추파를 던지며 따라온다.
배바위에서 버들재까지 2시간을 걸어오다 보니 건너편 자하골에는 손전등 불빛들이 정체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화왕산까지 가장 가깝다는 4Km의 그 길은 하산하는 인파로 꽉 막혔을 게다.
뒷날 얘기 들어보니 그날밤 100m 내려가는데 1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서두르지 말자. 가장 가까운 길이 때로는 가장 먼 길이 될 수도 있다.
욕심부리지 않고 느긋하게 걸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른다. 내 몸이 조금 더 고달프면 된다.
편하게 빨리 성취하리란 생각만 버리면 세상이 편안하다.
정월 대보름, 산정의 불놀이는 내 가슴에 선명한 충격으로 남았다.
누군가의 가슴에 싸지르고 싶었던 불도, 내 가슴에 지폈던 불도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맹렬하게 타올라 순식간에 꺼져버린 산정의 불꽃처럼
애증도 인과도 한 순간 재가 되는 날이 오리라. <끝>
아니, 사실은 내 마음에 불을 지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의 뫼(火旺山.757m)를 찾아 고속도로를 달리며 가슴속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성냥만 그어대면 한순간에 타버릴 정도로 내 가슴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오늘, 정월대보름. 화왕산을 태우는 불길에 가슴 속 응어리를 모두 태워버리자.
끊지 못한 인과(因果)와 애증(愛憎)을 함께.
화왕산 정상을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르는 길을 버리고 옥천리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관룡산이 한눈에 다가온다.
기묘한 바위들로 관(冠)을 쓴 관룡산,
아기자기한 그 바위 능선을 넘어가면 5만6천평의 화왕산 억새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단숨에 그를 만나기보다는 멀리서 아주 멀리서 천천히 다가가며 보고 싶었다.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던 관룡사는 불사(佛事)가 진행중이라 경내가 산만하다.
기와불사에 시주를 권하는 천막을 지나
시멘트와 모레 무더기를 밟고 약사여래불을 배알할 수 있다.
낡은 기둥과 퇴락한 단청 위에 기와만 새로 올린 모습이 한복 치마에 모자를 쓴 듯 어색하다.
가파른 오르막을 30분쯤 치고 오르니 처마 끝의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한 절벽에
작은 암자가 걸려있다. 청룡암이다.
어느 풍수가 터를 잡았는지 몰라도 '기도발' 잘 받게 생겼다.
저토록 가파른 절벽 끝에 암자를 지은 정성을 봐서라도 부처님이 돌봐주시겠지.
계룡산 모처에 가면 기도발 잘 받는 자리를 사고 판다.
벼랑 끝 앞이 탁 트이고 높다란 자리에서 기도하면 기도발을 잘 받는다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것이지 부처도 하느님도 마음에 있는 게 아니던가?
암자를 지나 넓은 바위에 서니 용선대 석가여래좌상이 건너다 보인다.
관룡산 정상에서 뻗어내린 산줄기 끝에 봉안된 불상은 암반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이 불상에 광배(光背)가 없는 이유는 관룡산이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란다.
기막힌 해석이요 멋드러진 풍수다.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를 지나 위험천만한 꼭대기를 넘어 관룡산 정상에 이르자
동쪽으로 화왕산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정상 부근에 널따란 분지를 두고 산 둘레는 모두 급경사 벼랑으로 이루어진 화왕산.
오늘 저녁 저기서 산정의 불놀이가 펼쳐지리라.
한발한발 화왕산을 향해 나아간다. 수만평 억새 바다에 빠지러 간다.
가슴 가득 억새를 안고 있는 화왕산성을 밟아본다.
하늘금을 이룬 산성 위를 걸으니 발길이 허공을 딛는 기분이다.
진흥왕 때 대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축성되었다는 화왕산성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내성을 축조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던 산성은 오늘날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배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오색 깃발이 나부끼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산정은 잔치 분위기다.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 부럼을 나누어주는 사람, 소원풀이 짚단을 파는 사람, 달집에 부적을 거는 사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카메라의 도열이다.
달집 사르기와 억새 태우는 장면을 찍기 위해 일찌감치 산을 오른 사진작가들은
삼각대를 세우고 앵글을 고정한 채 산정을 지키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구도를 잡기 위해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아침 일찍 산을 올랐을 그들.
한 점의 작품을 얻기 위해 추위에 떨면서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은 그 열정이 부럽다.
세상에 불 구경만큼 재미진 게 없다더니, 산정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억새보다 사람 숫자가 많은 듯하다.
배바위는 물론 건너편 정상과 이어진 봉우리마다 사람들로 빼곡하다.
3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행사이니 학수고대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억새밭에 불을 지르는 것은 화왕산의 산채가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이 산에 불이 나면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하다는 전설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게는 가정의 액을 물리치라는 염원이 담겨있고,
크게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지만
감히 누가 산 하나를 태워버릴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마침내 해가 질 무렵 억새 태우기가 시작된다.
원뿔 모양의 달집을 태우고 억새밭 가장자리에 붙은 불은 삽시간에 안으로 번져나간다.
방화선 안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던 억새들이 화르르 타오르며 맹렬한 불길이 달려간다.
오랜 가뭄에 바싹 마른 억새들은 잠깐 사이에 재가 되고 요원(燎原)의 불길은 하늘로 솟구친다.
바로 그때 폭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폭죽이 터져 오른다.
눈 앞에는 시뻘건 화염, 머리 위에는 현란한 불꽃놀이.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해발 750미터 눈 앞에서 터져오르는 불꽃놀이는 상상도 못했다.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은 억새밭의 불길을 무색하게 만들며 엄청난 밝기로 산정을 제압한다.
하늘에서는 천둥 같은 폭발음과 현란한 불꽃놀이, 땅에서는 솟구치는 불기둥...
산 전체가 화산 폭발하듯 한 순간에 타오르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아찔한 오르가즘에 도달하기까지 불과 5분.
모든 것은 순식간에 타오르고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억새밭을 맹렬하게 달려가던 불길도, 천둥같은 폭죽 소리도.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은 남아있는 불씨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도 한동안 충격 속에 멍하니 서 있다. 방금 내가 본 게 현실이었나, 착란이었나?
환장고개를 넘어 자하골로 하산하는 인파를 보며 우리는 배바위 동쪽 능선을 타기로 한다.
달이 뜨지 않으면 어떠랴,
마음 속에 달 하나 품고 배바위를 넘을 때 내 발길은 구름 위에 있는 걸.
함께 걷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와 손전등에 위안을 느끼며 걸어가는 산길.
잔설이 남은 암릉은 미끄럽고 위험했지만 야간산행의 묘미가 짜릿했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보름달이 얄미운 애인 같다.
내 품에 확 안기면 좋으련만, 올듯 말듯 추파를 던지며 따라온다.
배바위에서 버들재까지 2시간을 걸어오다 보니 건너편 자하골에는 손전등 불빛들이 정체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화왕산까지 가장 가깝다는 4Km의 그 길은 하산하는 인파로 꽉 막혔을 게다.
뒷날 얘기 들어보니 그날밤 100m 내려가는데 1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서두르지 말자. 가장 가까운 길이 때로는 가장 먼 길이 될 수도 있다.
욕심부리지 않고 느긋하게 걸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른다. 내 몸이 조금 더 고달프면 된다.
편하게 빨리 성취하리란 생각만 버리면 세상이 편안하다.
정월 대보름, 산정의 불놀이는 내 가슴에 선명한 충격으로 남았다.
누군가의 가슴에 싸지르고 싶었던 불도, 내 가슴에 지폈던 불도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맹렬하게 타올라 순식간에 꺼져버린 산정의 불꽃처럼
애증도 인과도 한 순간 재가 되는 날이 오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