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잉태한 만삭의 아침 바다.
어찌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한다.
이미 선혈이 번지기 시작하는 하늘에 빛살의 양수가 터지고 아, 드디어 일출.
숨가쁜 진통의 끝에 해를 난산한 바다는 미려하게 가공된 금속 표면처럼 눈부신 섬광을 발한다.
지난밤 거리를 내습한 어둠에 서서히 침몰하던 바다는 이 아침 저토록 생기에 찬 은빛으로 부활하고 있다.
파도의 데먼스트레이션.
항거하는 성난 군중을 이끌고 뭍으로 밀려온다. 이미 상처투성인 무리들은 모래톱에 와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바람이 분다.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당황한 바다는 곧 뒤집힐 듯 새파랗게 부어오른다. 파도는 숨을 헐떡이며 거칠게 바위를 기어오른다. 그건 마치 기관지를 앓던 내 연인의 안타까운 숨소리.
"넌 마치 리아스식 해안이군."
우리들의 사랑은 자주 암초에 부딪혔다. 그래서 마침내 보잘 것 없는 그 사랑은 난파되고 만 것이었다. 바다는 우리의 헛된 사랑을 익사시키고 깊이깊이 침묵하고만 있었다.
난파된 그 사랑의 잔해마저 파도를 타고 세월 속으로 휩쓸려 가버렸다. 바다는 이내 조용해지고 우리들의 가슴도 잔잔해졌다.
그러나 한 줄기 바람에도 잔물결이 일어서듯 옛 추억 하나가 아직도 작은 파도처럼 명치끝에 부딪쳐 온다.
오오, 그것은 지하실의 포도주처럼 내 가슴 깊은 곳에 몰래 숙성시킨 사랑이었지.
조개 속살 같은 나이였다. 그를 안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그는 나에게 늘 두려운 동경으로 다가왔다.
그는 충분히 젊었고 그 나이다운 만용을 알 때였다.
변칙적인 생활, 비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삶으로 며칠 밤새워 글을 쓰고, 한 이틀쯤은 자버리고, 그의 생각과 의지대로 인간의 습관적인 수면이나 생활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숴 버리려 했다. 그것이 그의 젊음을 핏빛 멍울 진 세월로 만든 것이다.
끝내는 한 줄의 詩시도 써내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침몰해가며 신음하는 바다처럼 그는 밤마다 무수히 앓기만 했다. 언제나 공백인 채 한 페이지의 글도 채우지 못한 그의 습작 노트는 밤새 괴로워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른 부스럼 자국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백사장에 슬며시 와서 드러눕는 물결.
한 떼의 아이들의 줄 낚시를 던지고 있다. 갯지렁이를 바늘에 꿴 그들은 낚싯줄을 빙빙 돌리다가 힘껏 바다를 향해 팔매질한다.
호기심으로 두근대는 그들의 어린 가슴.
"왔다!"
한 아이가 소리치며 늘였던 낚싯줄을 재빠르게 잡아당긴다.
생전 처음 먹이를 노획한 어린 상어처럼 그는 기뻐한다.
그러나 낚시 바늘에 딸려 나온 건 커다란 불가사리. 아이는 불가사리를 떼어 내동댕이친다.
그의 주위엔 벌써 다섯 마리도 넘는 불가사리가 노란 흡반이 달린 배를 내놓고 누워 있다. 불시에 아이의 낚시에 끌려 나온 불가사리는 숨을 할딱인다.
아이는 다시 바다를 향해 줄 낚시를 던진다.
그의 어망 속엔 눈이라도 붙어 있는 고기가 몇 마리 들어 있다.
"어제는 문어를 두 마리나 잡았어."
갯벌처럼 얼굴이 까만 아이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래, 너희들에게 바다는 아직 그의 깊은 번뇌를 말하진 않을 것이다. 우르르 소리치며 밀려왔다 번번이 절망하고 돌아가는 그 헛된 시도를, 또 스스로 참신하게 부활하는 그 바다를 알기엔 너희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어망처럼 작고 아름다워 보일 뿐이겠지.

내 눈앞에 펼쳐졌던 시정거리 삼십 리의 수평선 위로 밤안개가 서서히 다가온다.
오랜 연인처럼 어둠이 내 어깨를 마주 껴안는다. 기슭을 핥는 바닷물처럼 귓불을 간지럽히며 안겨드는 어둠을 떠밀면서 나는 불을 밝힌다.
밤은 깊어가고 이제 어둠은 세찬 파도가 되어 휘몰아친다.
갑자기 불어난 어둠의 밀물에 난 그만 갇혀 버린다. 나는 어둠의 갯벌 속에서 허덕인다. 물은 점점 내 가슴께 까지 차 오른다. 버둥거리며 겨우 그 어둠 속을 빠져 나오면 온몸은 뻘투성이가 된다.
마침내 밤은 오만스런 고집을 버리고 그의 비밀스런 몸을 나에게 열어준다.
밤바다는 그윽한 눈으로 육지를 본다.
그토록 오래 괴로워하던 바다는 이제 서서히 제 가슴을 혼자 삭일 줄 알게 된 것이다.
만 하루만에 바다로 돌아온 바다는 내일 아침 다시 눈부시게 부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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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와 태풍이 오락가락 하는 중에도 여름 하늘은 쨍하게 투명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바깥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바다로 간다. 핸드폰도 끄고 자동응답기 메시지도 지우고.
수영복을 안에 입고 겉옷을 간단하게 걸친 뒤차의 시동을 건다. 행장이라곤 수경 하나와 양파망 주머니 몇 개.
내 집에서 주전 고개를 넘는데는 십 분이 채 안 걸린다. 애초 바다 가까이 살고 싶어서 이곳에 집을 마련했었다.
고개를 넘어 바다가 보이기도 전에 벌써 공기가 다르다. 더운 여름날 바깥에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의 그 기분과도 흡사하다. 상쾌한 냉기가 묻어오는 바닷바람이 너무 좋다.
해변에 차를 세우고 겉옷만 벗으면 준비 끝. 바다에 몸을 적시며 수경을 끼고 물 속으로 헤엄쳐간다. 스노클을 입에 물고 오리발을 신을 때도 있지만, 어장을 해칠까 봐 경계하는 어민들 눈치가 보여 맨몸으로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하다.
물 속 세상은 참 신비롭다. 더군다나 수경을 끼고 보면 사물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다. 해초가 우거진 풍경에 고기떼가 유영하고 고둥들도 바위에 붙어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암초의 협곡 사이로 숨어드는 망상어, 놀래기, 볼락을 보면 갯바위에서 헛낚시를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고기도 사람 손이 닿으려 하면 순식간에 달아나고 만다.
물 속 풍경을 즐기면서 나는 주로 참고둥을 잡는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물 밖에서도 고둥을 잡을 수 있지만 알이 잘아서 재미가 없다. 한 길 이상 들어가면 제법 굵은 고둥과 성게, 전복, 앙장구(보라성게)도 만난다.
암초 틈에 교묘하게 자라는 성게를 딸 때는 좀 미안하기도 하다. 뾰족한 가시로 완전무장을 하고도 모자라 바위 틈새에 숨어 자라는 가련한 생명이라니.
양파망 주머니에 고둥을 가득 채우는 데는 한 시간도 안 걸린다. 한 번 잠수하면 몇 개씩은 건져 올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고둥이 아무 곳에나 있는 건 아니다. 해저가 모래나 뻘인 곳에서는 고둥잡이가 번번이 실패한다. 물이 깨끗해 보여도 물 속이 죽어있는 곳도 있다.
솟구쳐 올랐다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다시 곤두박질치면서 나는 바다를 온몸으로 느낀다.
뭍에서 완상하는 바닷가 아닌 물 속에서 피부로 느끼는 바다. 그 바다는 언제나 생명력이 넘친다. 긴 머리 풀어 헤친 해초며, 느릿느릿 기어가는 고둥들이며, 은빛으로 떼지어 달아나는 멸치들이며…
수심 이삼십 미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스쿠버다이빙도 좋겠지만, 그건 슈트 입고 산소통 메고 얼마나 번거로운가? 수영복에 수경 하나만 끼고 들어가면 해저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스킨다이빙은 스쿠버다이빙처럼 배를 빌려 나갈 필요도 없고 20킬로그램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는 번거로움도 없다.
바다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일조량이 적어서 해조류의 색깔이 얕은 곳보다 선명하지 않다고 하니 바다 구경은 역시 스킨다이빙이 제격이 아닌가 싶다.
수심 5미터 정도야 스킨다이빙으로 실컷 볼 수 있다. 날씨만 좋으면 수심 10미 터 이상도 깨끗하게 보일 정도로 동해안은 물이 맑지 않은가. 특히 경주 감포바다 위쪽으로는 모래알도 헤아릴 정도로 물이 맑은 곳이 많다.
동해를 지척에 두고 사는 행운으로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스킨다이빙을 실컷 즐긴다. 가깝게는 주전, 멀리는 감포 지나 오류까지 원정 다이빙을.
양파망 주머니에 참고둥을 가득 채워 돌아오는 마음은 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물 속에서 나와 잠시 몸을 말리고 그 위에 바로 옷을 걸친다. 10분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샤워가 따로 필요 없다.
자동차 시트가 좀 젖는다 한들 어떠랴. 바다를 온몸에 묻히고 돌아가는 길은 즐겁기만 한데.
젖은 머리칼로 아파트에 들어서면 이웃들이 한 마디씩 하겠지.
"진수 엄마. 또 물질하러 갔다 오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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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10분이면 동해를 볼 수 있기에 나는 자주 바다에 간다.
물옷을 안에 입고 겉옷을 걸친 뒤차의 시동을 걸 때부터 내 가슴은 벌써 두근대기 시작한다. 수초가 우거진 바다 밑에서 쏨뱅어와 참고둥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스쿠버다이버가 되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들여다 본 해저의 세계가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기회만 닿으면 바다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에서는 사물이 굉장히 커 보이고 깊어 보여서 신비스럽다. 결 고운 머리채를 늘어뜨린 해초가 바닷물에 일렁이는 모습에 눈길을 주다보면, 산발하고 다리에 휙휙 감겨오는 또 다른 해초에 당혹하기도 한다.
암초와 암초가 협곡을 이루고 놀래기와 망상어가 해초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달아난다.
다이버들은 수심 5∼10m가 가장 아름답다지만 그 정도 수심은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이고, 나는 고작 수심 1∼3m에서도 탄성을 지르곤 한다.
바위에 붙어 느릿느릿 움직이는 고둥을 잡느라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기도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다가 허기지면 고둥을 삶아 쏙쏙 빼 먹는 재미는 동심 그대로다.
생각해보면 내가 해저의 세계를 동경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가족들과 삼천포 해수욕장엘 갔는데 어쩌다가 파도에 휩쓸려 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꼬르륵 가라앉는 순간, 눈감을 사이도 없이 나는 바다 밑을 구경하게 되었다. 꼭 만화에서 본 것 같이 이상하게 생긴 해초가 물 속에서 춤을 추는 광경을.
아버지에 의해 구출된 뒤에 따개비 만한 내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화가들도 나처럼 바다에 빠져 본 게 분명해.’
그날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본 풍경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상상에서 비롯된 착시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바다만 생각하면 나는 만화그림 같은 해저 풍경을 떠올렸었다.
중학교 땐 '해저 2만리'란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해저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큼 나는 바다에 대해 외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를 알기 전에 나는 이룰 수 없는 짝사랑처럼 속으로만 앓으며 바다를 그리워했고 꿈꾸었다. 내륙지방에서만 오래 살다 보니 바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해묵은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 한쪽에 고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동해가 지척인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해묵은 그 첫사랑은 갑자기 현실로 나타나서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뜰 무렵, 미려한 광택으로 빛나는 바다를 보면서 나는 충만한 기쁨을 느꼈고, 분노하는 파도를 이끈 채 뭍으로 엎어지는 바다를 볼 때는 가슴 시린 아픔을 느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수평선이지만 그 바다 속엔 크고 작은 암초가 있고, 때로는 바위에 붙어 있는 히드라를 보지 못해 쏘일 때도 있다.
우리의 인생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지도 않았던 암초에 부딪혀 좌초당하기도 하고 숨어있던 어두운 운명의 공격을 받아 당황하기도 한다.
바다는 인생에 대한 伏線복선을 내게 늘 깨우쳐 주곤 하는 것이다.

며칠 전, 파도가 잔잔할 때를 골라 바다에 들어갔다.
물 속에 몸을 담그면 이상하리만큼 평화와 안정을 얻는 것은 모태로 돌아온 듯한 무의식 때문일까?
수경을 끼고 해저 세계를 탐사해 나가면서 낯익은 바위들 사이에 말미잘이 얼마나 컸나 성게가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다가 좀 깊은 곳에서 나는 전복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잽싼 동작으로 전복을 땄다. 전복은 슬쩍 건드렸다간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단번에 내 손안에 들어온 전복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큼 작았다.
이 먹음직스런 바다의 보물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까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직 덜 자란 전복, 그도 살려고 이 물에 태어난 목숨인데 하필이면 내가 지금 잡아야 하리? 직업적인 해녀들한테 잡히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나야 먹고 싶으면 돈주고 사면되는 일인데 구태여 그를 잡아 무엇하리?
나는 전복을 손에 쥐고 다시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여기쯤이면 사람 손길이 닿기 어렵겠지 싶은 곳에 그 전복을 놓아주고 오면서 내 마음은 너무나 가뿐하고 즐거웠다.
평소에도 나는 바다에서 얻은 것은 그냥 버린 적이 없다.
고둥을 잡아도 먹을 만큼만 잡고, 잡은 만큼은 다 먹는다.
세상의 목숨 있는 것들이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므로 먹히는 것도 그들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먹고 남을 정도로 많이 잡아서 말없는 생명들을 짓밟고 싶진 않다.
어쩌다 바위틈에서 게를 잡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꼭 당부한다.
"집에 가서 꼭 요리해 잡수세요. 죽여서 버리면 안돼요."
바위틈에 숨어드는 게를 꼬챙이로 찍어내는 사람들은 거의가 장난이다. 다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잡은 게들은 대개가 집으로 끌려가 아이들의 노리개로 구르다가 죽게 되리라.
가엾은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바위틈의 그 수많은 게들을 보호하자고 내가 어깨띠를 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나는 바다를 고맙게 생각하자고 누구에게나 말한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는 저 넓은 바다의 아량을 이해하고 마지막 식량의 보고라는 바다를 좀 더 아끼고 보호해 주자고 얘기한다.
솨르르르… 모래사장에 밀려나온 파도 한 자락이 나에게 해저의 소식을 전해준다.
해저의 계절은 육지보다 한 계절이 빠른 것 같다. 육지의 한겨울에 봄을 알리는 햇미역이 나오는 것처럼.
가을이 시작되는 뭍에 파도는 바다 속 겨울 얘기를 속살거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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