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H박사의 강의를 들었다.

웃음 띤 얼굴로 강의를 시작하신 그 분은 자신의 이력을 재미있게 말씀하셨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돈이 없어 중학교도 겨우겨우 다녔고,

단지 학비가 안 든다는 이유로 농고로 진학했다고 한다.

“그 학교는 내가 입학할 때 생겼다가 졸업할 때 없어졌어요. 졸업생 13명!”

방청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똥통학교라고 손가락질 받던 농고를 졸업하고도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

사범대학을 다닌 그는 우여곡절 끝에 Y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등학교는 어딜 나오셨나요? 물론 명문이겠죠?”

하고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름도 없는 학교와 동창생도 없는 자신이 서글펐다고 한다.

명문 따지고 인맥 따지는 세상에 줄도 빽도 없이 명강사로 이름을 얻은 오늘날,

출신학교 일화를 얘기하는 그분의 얼굴 어딘가에서 살짝 비애가 느껴졌다.

살아오는 동안 숱하게 부딪혔을 그의 출신성분은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

“시골 농고 출신이 출세했어!” 사람들은 야비하게도 그런 말을 할 것이다.

명문 출신이 아니지만 명강사로 명예를 얻은 그를 보며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출신 학교 이름 하나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혹시 내가 H박사처럼 출세를 했더라면 출신학교를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개차반처럼 살아도 명문학교를 나오면 한번쯤 뒤돌아보는 세상,

출신성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나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뒤늦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간판 자체에 매달리는 이들이 이외로 많다.

공부에 한이 맺혀서, 혹은 학문 자체가 좋아서 전력투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 목적없이 우리 사회의 학력 인플레에 기여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장래 무엇이 되겠다는 희망도 분명치 않는 석․박사가 뭐 그리 대단할까.

진짜 알맹이는 실력이다. 어느 분야에 일가견을 이룰 수 있는 그만의 실력.

그것이 노래건, 그림이건, 학문 그 자체건.

으리번쩍한 간판 없이도 전국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H교수처럼

진심을 다해 열성을 쏟고 그 분야에 매진한다면 성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성공이 곧 행복은 아니겠지만, 꿈을 이루었다는 데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수많은 석․박사들이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세상.

그들을 양산해낸 사회적 비용은 언제 어떻게 회수할 수 있을까.

학벌이나 출신성분보다 실력이 빛을 발하는 시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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