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 慕情(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을 20대에 처음 보았다.

학생 신분으로는 볼 수 없는 영화여서 주제곡만 알고 지냈는데

정작 영화를 보면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특히 마지막 장면, 언덕 위에서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을 보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냉정하게 보면 미망인과 유부남의 통속적인 러브스토리에 불과한데도

당시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에 감정이입(感情移入)되어 손수건을 적셨다고 한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했거나, 지금 사랑하고 있거나, 못다 이룬 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손수건의 주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비약일까? 

동서고금을 통해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영화나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표현은 반드시 결혼을 의미하는 건 아니고, 제도권 내에서 용인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뜻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부적절한 것과 상통한다.

그러나 영화나 소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그 사랑이

현실에서는 왜 그렇게 유치하고 추잡하게 변하는 것일까.

서로 간섭하고 얽어매고 의심하고 그러다 끝내 헤어진다.

희생과 배려가 없는 한 대개 1년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사람만의 관계로 좋게 끝나면 다행인데 삼각관계와 맞바람까지 가다 보면

수채 구멍보다 더러운 냄새를 피우게 된다.

평생을 통해 한 사람만 사랑하다 죽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명언처럼 사랑은 영원하되 상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며칠을 살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게 훨씬 행복할 수도 있다.

기존의 가족관계나 사회 질서를 무시하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용기는 얼마나 대단한가.

요즘같이 드라마도 불륜을 조장하는 분위기에 남의 연애를 매도하면 모자란 사람이 된다.

우리 모두 장담할 수 없다. 언제 어느 때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단, 외도를 하건 연애를 하건 배우자가 알면 끊어야 한다. 그게 예의다.

배우자가 알고 난리법석을 피우는데도 외도를 계속하는 사람은 강심장이거나 철면피라고 생각한다.

그건 배우자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다.

다년간 카운슬러로 일하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상담의 절반이 외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식생활만 서구화되는 게 아니라 의식도 급격히 서구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프랑스는 대통령이 내연의 처를 두어도 지탄받지 않을 정도로 개방된 문화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조만간 그런 문화가 될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 만난 이루어질 수 없는 커플을 보고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나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 있으면 언제라도 가라. 내 재산 다 줄게.

그렇지만 다른 남자도 별수 없더라 하고 돌아오는 건 절대 용서 못 한다. 알았재?”

옆에서 깔깔대며 웃던 친구가 갑자기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 남편도 혹시 바람피우는 거 아닐까? 꺼진 불도 다시 봐야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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