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이다. 불일폭포를 다시 만난 것이. 어쩌자고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단 말인가.
그해 봄, 결혼식을 끝내고 우리는 쌍계사로 신혼여행을 왔었다.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그때 나는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올림머리를 했었던가... 절집 앞 가난한 마을에서 첫날밤을 보냈던가.....
1,200살 짜리 느티나무가 서 있는 국사암은 단풍이 아름다운 절집이다.
봄이면 화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십리 벚꽃길이 인산인해가 되지만, 정작 국사봉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고.
국사암을 들머리로 불일폭포 보고 쌍계사로 하산하려 했는데 해가 너무 짧았다.
불일평전이 이렇게 좁았던가? 흰 눈을 둘러쓴 봉명산장도 언제부턴가 비어있고...
짧은 해를 의식하며 걷느라 옛 추억을 음미할 시간도 없었다.
섭섭한 것이 어디 이별뿐이었을까
너는 천길 벼랑 끝을 향해
떨어지기 위해 달려가고 나는
떨어지는 너를 보러 굽이, 구비 서둘러
벼랑 끝을 돌아서 갔다 우리는 서로
막다른 길에서 다시 만났다
멋모르는 나는 발끝을 세우고 걸었지만
흐를수록 힘이 세어지던 너는 그동안
떨어져 내릴 것을 준비해왔다 아아,
어쩌면 비명으로 떨어지고 있는 너를
오금 저리는 전율로 바라봐야 하다니
내 부서지는 몸에 먼저 눈을 감고 말았다
<강영환 '불일폭포 가는 길' 부분>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27년전의 새신랑은 앞 머리 훌렁 벗겨진 장년이 되어 그 옆을 지나고 있다.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게걸음으로 오르며 고소공포증을 고백하던 스물아홉의 새신랑.
불일폭포 가는 길이 변한 것만큼 그도 변하고 나도 변했나보다.
엄마 기일을 앞두고 세 동생과 조카들이 모였다. 막내외삼촌 내외가 상석에 앉았다.
한잔 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막내삼촌은 우리에게 은퇴후 진주에 와서 살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많이 보낸 우리는 유난히 외삼촌들과 정이 깊었다.
고향은 멀리서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거라지만, 피붙이가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일까.
노고단에 올라 지리산 연봉을 볼까 했더니 성삼재 가는 길이 얼어붙어 되돌아왔다.
눈 덮인 뱀사골, 달궁, 그 옆을 스쳐 지나온 것만으로 족하다.
흐린 하늘 아래 우뚝한 지리산 주능만 눈에 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