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는 벽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고 말했다.
철컥, 한밤의 적막을 가르는 그 소리가 내 가슴에도 철컥 내려앉았다. 그 막막한 고독을 누군들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경을 카메라로 찍는 그녀.
파인더에 담긴 벽지의 사방연속 무늬가 그녀의 심사를 닮았다.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막막한 외로움. 한밤에 빈 벽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그녀는 심장을 관통하는 고독을 찍고 있는지도 모른다.
십 수 년째 산에 다니고 있는 그 남자는 배낭 속에 항상 2인분의 간식과 식수를 가지고 다닌다.
늘 혼자 다니면서도 여분의 음식을 갖고 다니는 그는 하루 종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빤한 등산로보다 길 없는 길을 개척해 다니기 때문에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서 빵을 먹고 있는데 산새 두 마리가 음식 냄새를 맡고 그의 곁에 다가왔다.
겨울이라 먹을 것이 없었던지 새들은 그가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를 금방 먹어치우고 할금할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빵을 잘게 부수어 손바닥에 올려놓았고 새들은 아무 의심 없이 손바닥에 내려앉아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었다.
새들의 발은 따뜻하고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났다. 빵 부스러기를 다 먹는 동안 그는 새들과의 소통을 느꼈다.
그들에게 나누어줄 것이 있다는데 작은 기쁨을 느꼈다. 함께 나눌 대상이 사람이길 바라면서 늘 여분의 식량을 가지고 다니던 그 남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산새들과 먹이를 나누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야영을 자주 다니는 내 친구는 걸핏하면 비박산행을 떠난다.
2박3일 지리산 종주는 보통이고, 달 좋은 밤이면 근교 산에 텐트 치는 일이 허다하다.
가끔 비박클럽 회원들과 함께 야영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회원들이 젊고 건장한 남자들이라
행여 노약자 취급 받을까봐 똑같이 무거운 짐 지고 똑같이 악코스를 주파한다.
어느 날엔가 억새꽃 만발한 능선에서 하룻밤 묵고 하산하면서 그녀는 악을 쓰듯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 산길에는 아무도 없는데 억새꽃은 흐드러져 바람에 풀풀 날리고...
견딜 수 없이 눈물이 나서, 눈물을 이기려고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구상에 하나 뿐인 자신의 존재가 문득 낯설고 무서워지더란다. 누군가 딱 한 사람만 저랑 똑같은 사람이 있다면 울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소설가 김연수의 문장이 떠오른다.
한밤에 홀로 셔터를 누르는 여인도, 여분의 식량을 갖고 다니는 산꾼도, 야영에 미친 내 친구도
누군가에게 건너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상대가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사실이랄까.
아무에게나 닿을 수 있는 인연이라면 그렇게 고독한 놀이를 오래 계속하진 않을 것이므로.
한밤에 벽을 보고 셔터를 누르는 여인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 깊은 슬픔과 절망을 어느 정도는 가늠하기에.
산새들과 소통하는 산꾼도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십 수 년동안 산에 다니며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으므로.
야영에 빠진 친구를 이해하는데도 별 문제가 없다. 단지 나는 그들과 똑같지 않을 뿐이다.
이해는 하지만 동화될 수 없는 현실. 외로움의 본질은 거기 있는 게 아닐까. 남과 다르다는 것.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
그걸 부인하고 싶지만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더 고독하고 가슴 아픈지도 모른다.
<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팅스 블루 >
소설가 김연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지 못한 채,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누군가를 향해 혼잣말처럼 소설을 쓴다고 했다.
빈 벽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여인도, 산새와 소통하는 산꾼도, 야영에 미친 내 친구도
어쩌면 그 심연 앞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방백(傍白)과도 같은 독백을.
김연수 식으로 말하자면 언제부턴가 나의 독백은 사진이 된 것 같다.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의 몰두와 숨을 참는 고통이 감미롭기까지 하다.
이른 새벽 혼자 바닷가를 서성이며 칼바람에 자라목이 되면서도 좋은 프레임을 찾고 또 찾는다.
원고지에 글을 쓰듯 사각의 프레임에 피사체를 담으며 충만감을 느낄 때도 있다.
퇴고를 거듭해야 완성되는 한 편의 문학작품처럼 사진도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완성된다는 걸 깨달았다.
완성된 그 사진이 아무에게도 감흥을 줄 수 없을지라도, 한밤에 셔터를 날리는 여인처럼 나는 내일 새벽에도 길을 나서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