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앞에 갑자기 떠난 여행길에서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뺀다는 건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대문으로 들어서는 나그네가 귀찮았을텐데도 그는 손우산을 만들며 우리를 반겼다.

정원이 아름다운, 90년 된 양조장- 정도로 알고 발을 들였다가 집 주인의 삶과 인품에 홀딱 반했다고나 할까.

생전 누구와 말다툼 한번 안해본 듯 선량하기 그지없는 얼굴, 넉넉한 풍채가 첫눈에도 살가웠다.

들이붓듯이 내리는 비 때문에 정원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나직나직 들려주는 오병인(해창주조장 대표)씨의 이야기는 참행복의 의미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술이라면 뭐든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좋아했던 오병인 씨는 10년전 해창막걸리와 처음 만났다.

속이 보대끼지 않고 담백한 맛에 앉은자리에서 말술을 마셔도 끄떡없더란다.

이후 서울에서 해창막걸리를 주문해 마시면서 단골이 되었다가 2007년 주조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해남 땅에, 단지 '막걸리' 하나 보고 귀농을 결행한 것이다.

물론 마을 앞을 흐르는 강과 너른 들, 그리고 해창의 고택들도 마음에 들었지만.

 

수풀 우거진 800평 정원 속의 일본식 이층집에서 부부는 새벽 다섯 시부터 고두밥을 찐다.

해남 쌀로 고두밥을 짓고 15일간 자연발효시켜 탄생하는 술이 ‘해창막걸리’다.

막걸리를 팔아 돈을 벌 요량이었다면 인공첨가물을 넣어 빨리 그리고 많이 생산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부부는 돈보다는 전통과 맛을 선택했다. 제대로 된 술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하나로-

실제로 한달 매출이 1천만원 정도라고 하니, 시쳇말로 막걸리 팔아 밥 먹고 살기 녹록찮겠다.

 

젖은 날 찾아온 게 미안해서 빨리 자리를 떠나려는 우리에게 주인은 꼭 술 맛을 보고 가란다.

운전 때문에 못 먹는다고 사양했더니 막걸리 한 병을 쥐어준다. 내미는 돈은 기어이 받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도시의 삶을 버린 그의 용기가 부럽고 눈부셔 자꾸만 뒤돌아본다.

흠뻑 젖은 정원의 감나무 아래 나란히 놓인 막걸리 주전자가 눈에 와 박혔다.(9/23)

 

 

 

 

 

 

 

 

 

 

 

 

'여행은 즐거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남이섬  (0) 2015.10.29
인왕산 맛보기  (0) 2015.10.22
남도 3일  (0) 2015.09.25
자존심 마을  (0) 2015.08.25
강원남도의 선물  (0) 2015.08.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