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10분이면 동해를 볼 수 있기에 나는 자주 바다에 간다. 물옷을 안에 입고 겉옷을 걸친 뒤차의 시동을
걸 때부터 내 가슴은 벌써 두근대기 시작한다. 수초가 우거진 바다 밑에서 쏨뱅어와 참고둥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스쿠버다이버가
되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들여다 본 해저의 세계가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기회만 닿으면 바다에 들어가곤 한다. 물 속에서는
사물이 굉장히 커 보이고 깊어 보여서 신비스럽다. 결 고운 머리채를 늘어뜨린 해초가 바닷물에 일렁이는 모습에 눈길을 주다보면, 산발하고 다리에
휙휙 감겨오는 또 다른 해초에 당혹하기도 한다. 암초와 암초가 협곡을 이루고 놀래기와 망상어가 해초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달아난다.
다이버들은 수심 5∼10m가 가장 아름답다지만 그 정도 수심은 산소통을 메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이고, 나는 고작 수심 1∼3m에서도
탄성을 지르곤 한다. 바위에 붙어 느릿느릿 움직이는 고둥을 잡느라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기도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다가 허기지면 고둥을 삶아 쏙쏙 빼 먹는 재미는 동심 그대로다. 생각해보면 내가 해저의 세계를 동경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가족들과 삼천포 해수욕장엘 갔는데 어쩌다가 파도에 휩쓸려 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꼬르륵 가라앉는 순간,
눈감을 사이도 없이 나는 바다 밑을 구경하게 되었다. 꼭 만화에서 본 것 같이 이상하게 생긴 해초가 물 속에서 춤을 추는 광경을. 아버지에
의해 구출된 뒤에 따개비 만한 내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화가들도 나처럼 바다에 빠져 본 게 분명해.’ 그날 내가
바다에 빠졌을 때 본 풍경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상상에서 비롯된 착시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바다만 생각하면 나는 만화그림 같은 해저 풍경을
떠올렸었다. 중학교 땐 '해저 2만리'란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해저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큼 나는 바다에 대해 외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를 알기 전에 나는 이룰 수 없는
짝사랑처럼 속으로만 앓으며 바다를 그리워했고 꿈꾸었다. 내륙지방에서만 오래 살다 보니 바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해묵은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
한쪽에 고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동해가 지척인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해묵은 그 첫사랑은 갑자기 현실로 나타나서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그는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뜰 무렵,
미려한 광택으로 빛나는 바다를 보면서 나는 충만한 기쁨을 느꼈고, 분노하는 파도를 이끈 채 뭍으로 엎어지는 바다를 볼 때는 가슴 시린 아픔을
느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수평선이지만 그 바다 속엔 크고 작은 암초가 있고, 때로는 바위에 붙어 있는 히드라를 보지 못해 쏘일 때도
있다. 우리의 인생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지도 않았던 암초에 부딪혀 좌초당하기도 하고 숨어있던 어두운 운명의 공격을 받아 당황하기도
한다. 바다는 인생에 대한 伏線복선을 내게 늘 깨우쳐 주곤 하는 것이다.
며칠 전, 파도가 잔잔할 때를 골라 바다에
들어갔다. 물 속에 몸을 담그면 이상하리만큼 평화와 안정을 얻는 것은 모태로 돌아온 듯한 무의식 때문일까? 수경을 끼고 해저 세계를
탐사해 나가면서 낯익은 바위들 사이에 말미잘이 얼마나 컸나 성게가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다가 좀 깊은 곳에서 나는 전복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잽싼 동작으로 전복을 땄다. 전복은 슬쩍 건드렸다간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단번에 내 손안에 들어온 전복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큼 작았다. 이 먹음직스런 바다의 보물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까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직 덜 자란 전복, 그도 살려고 이 물에 태어난 목숨인데 하필이면 내가 지금 잡아야 하리? 직업적인
해녀들한테 잡히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나야 먹고 싶으면 돈주고 사면되는 일인데 구태여 그를 잡아 무엇하리? 나는 전복을 손에 쥐고
다시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여기쯤이면 사람 손길이 닿기 어렵겠지 싶은 곳에 그 전복을 놓아주고 오면서 내 마음은 너무나 가뿐하고
즐거웠다. 평소에도 나는 바다에서 얻은 것은 그냥 버린 적이 없다. 고둥을 잡아도 먹을 만큼만 잡고, 잡은 만큼은 다
먹는다. 세상의 목숨 있는 것들이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므로 먹히는 것도 그들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먹고
남을 정도로 많이 잡아서 말없는 생명들을 짓밟고 싶진 않다. 어쩌다 바위틈에서 게를 잡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꼭
당부한다. "집에 가서 꼭 요리해 잡수세요. 죽여서 버리면 안돼요." 바위틈에 숨어드는 게를 꼬챙이로 찍어내는 사람들은 거의가
장난이다. 다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잡은 게들은 대개가 집으로 끌려가 아이들의 노리개로 구르다가 죽게 되리라. 가엾은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바위틈의 그 수많은 게들을 보호하자고 내가 어깨띠를 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나는 바다를 고맙게 생각하자고 누구에게나
말한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는 저 넓은 바다의 아량을 이해하고 마지막 식량의 보고라는 바다를 좀 더 아끼고 보호해 주자고
얘기한다. 솨르르르… 모래사장에 밀려나온 파도 한 자락이 나에게 해저의 소식을 전해준다. 해저의 계절은 육지보다 한 계절이 빠른 것
같다. 육지의 한겨울에 봄을 알리는 햇미역이 나오는 것처럼. 가을이 시작되는 뭍에 파도는 바다 속 겨울 얘기를 속살거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