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시내에서 남목고개를 넘어올 때 나는 가끔 경탄에 빠질 때가 있다. 미끈한 고층아파트 숲과 조화를 이룬 빌딩들. 마골산 아래 포근하게 안겨있는 남목 일대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래, 참 아름다운 곳이다. 20년 전을 돌이켜 보면 황홀할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답다. 나는 고갯마루에 차를 멈추고 신도시로 변해버린 남목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그리고 70년대 말의 방어진을 눈물겹게 추억하기 시작한다.

꽃으로 치면 봉오리였을 나이에 나는 울산에 첫발을 디뎠다. 소문으로만 듣던 공업도시 울산, 그것도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방어진에 내 작은 보금자리를 정했다. 전신주에 다닥다닥 붙은 '달셋방 있음' 광고를 보고서.
주욱 늘어선 열 한 칸의 방.
때가 잔뜩 낀 반투명체의 유리와 엉성한 합판 조각으로 만든 문 위에 페인트로 써 놓은 아라비아 숫자. 그걸 보지 않고도 나는 정확하게 여덟 번째 칸 내방 앞까지 단숨에 와 멎었다. 처음엔 그리도 낯설던 일렬횡대의 가옥구조가 두어 달만에 아주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왔어예? 아까 주인 할매가 이걸 주던데…"
바로 옆방 7호실에 세 들어 있던 여자가 손바닥만한 흰 종이를 건네주었다.
‘오물세 8호실 540원.’
개발새발 써 놓은 것이 한글을 겨우 깨우친 주인 할머니의 글씨임이 틀림없었다. 그 육중한 몸으로 한 방 한 방 찾아다니며 이걸 나눠주었겠거니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어코 절간 변소 같은 변소를 푸긴 펐구나. 加減乘除가감승제에 둔한 할머니가 각방 앞으로 오물세 540원을 분배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 고심했으리라.
나는 외투를 벗어 던지며 두 평 남짓한 나의 소왕국으로 入室입실했다. 내 작은 왕국과 인접한 방들도 하나같이 똑같은 크기를 가진 友邦우방들이었다.
나의 왼쪽 옆방 7호실에는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사는 전라도 부부가 세 들어 있었으며, 또 다른 옆방 9호실에는 마치 용접이 잘못된 철판처럼 우글쭈글한 얼굴을 한 총각 둘이 살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양쪽 두 개의 벽을 무사 통과해 들려오는 각종 소음 때문에 처음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살다 보니 그까짓 소음공해쯤이야 아주 너그럽게 봐주는 여유가 생겼다. 따라서 처음 그 작은 방에 들어와서 느꼈던 암담함은 시간과 함께 사랑과 평화로 바뀌어갔다.
공업지대의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울산, 그것도 방어진은 정말 인구의 과밀도 지대였다. 집은커녕 방 한 칸 얻기가 비오는 날 별 보기보다 힘들었다.
방을 구하다 구하다 못해 이젠 그저 바람과 추위를 가릴 곳만 있다면 다리 밑이라도 좋겠다 싶어졌을 때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내가 세 들어 있던 방이었다.
애초엔 평범한 가정집의 앞마당이었던 것을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급작스럽게 인구가 불어나자, 이 집주인 할머니가 채송화 맨드라미 피어있던 마당을 확 밀어붙이고, 거기 무려 열 한 칸의 방을 만들었던 것이다.
방 하나에 몸 돌릴 곳도 제대로 없는 부엌이 딸린, 합해서 두세 평되는 방들은 삽시간에 타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주인집 할머니는 늘 술독에 빠져 사는 그의 아들과 단 두 식구인데, 몸집이 지나치게 좋아서 유방이 마치 젖먹이 어린애를 가진 여자의 그것처럼 컸다.
할머니는 '객지에서 돈 벌러 온' 세입자들의 방을 들여다보길 좋아했다.
"이거 묵어봐라. 쪼끔이다. 엊저녁에 영감 제사 지냈능기라."
어느 날 그녀는 대바구니에서 떡 두 조각을 내놓으며 말했다. 할머니는 1호, 2호, 3호 차례차례 똑같은 말을 하면서 똑같은 양의 떡을 나누어주었다.
일찍 혼자가 된 할머니는 정 붙일 데라곤 없는 분이었다. 죽은 남편이 물려준 거라곤 아들 하나와 집 한 채가 전부였는데, 혼자 어떻게 먹고사나 막연했던 청상과부에게 남편이 물려준 집 한 채가 그야말로 그녀의 노후를 먹여 살리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다달이 열 한 칸의 방에서 나오는 사글세를 몽땅 걷어서 노름판이나 술독에 처넣기가 일쑤였고, 동네 싸움은 도맡아 하는 건달이어서 할머니는 퍽 속을 앓는 모양이었다.
장가라도 들이면 나을까 하고 서둘러 결혼을 시켰더니 반년도 채 못 가서 제 여자를 두들겨 내쫓아버렸다는 것이었다.
"3호실 큰애기가 와 안 오제? 혹시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있능가?"
할머니는 몇 호실에 누가 어떻다는데 대해 소상히도 알고 염려하곤 했다. 그녀에겐 마치 열 한 개의 방에 든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혈족이나 되는 양 애착이 가는 모양이었다.
7호실 내외가 혼례도 못 올리고 사는 걸 딱하게 여겼는지 내년 봄엔 꼭 결혼식을 올리자고 본인들보다 먼저 서둘렀던 할머니다. 꼭 그녀의 친자식이 혼기를 놓치고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처지이기나 한 듯이.
우리, 1호부터 11호까지의 방에 세 들어 있는 사람들 모두는 그래서 주인할머니와 어느 듯 집단 대가족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처음 내가 이 집단 대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나서의 일인데, 고향을 오가며 혹은 휴가를 떠날 때 주인 할머니께 문안을 여쭙는 것이 이 집의 전통적인 불문율인 줄 알았을 때 내심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도회지 생활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 할머니가 그저 집주인이라는 것밖에 전혀 타인이라는 느낌으로 제대로 인사도 없이 지냈던 것이다.
"이놈의 세상, 망할 세상. 죽자고 일해서 뉘 좋은 일 시키겠노?"
옆방에 세든 총각들은 밤에 가끔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보나마나 그들의 방엔 소주병이 두어 개 나뒹굴고 있을 터이고… 나는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높여 벽을 치며 통곡하는 두 젊음을 눈감아 주는 체 했다.
참 지독하군. 오늘 월급이라도 받았던 게지. 세상에 가장 불쌍한 것은 돈 될거라곤 그의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배운 것 없이 그저 매일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나가는 그들에게도 생에 대한 애착은 많을 것이다.
시끌짝한 소리를 듣고 달려온 할머니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총각들을 달랬다. 방탕한 아들이 어머니의 품안에 쓰러져 울 듯이 두 청년은 할머니에게 주절주절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이런 술주정은 퍽 주기적으로, 대개 월급날을 전후해서였으므로 할머니도 아마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기계소리와 차량과 사람들의 아우성소리가 모두 그치면 벽돌 한 장으로 격리된 나의 옆방에서는 어느새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그제야 나는 손을 뻗어 전등을 껐다.

20년 전 그 게딱지같은 집들은 지금 늘씬한 고층아파트 지대로 바뀌었다. 그 때 열 한 칸의 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제집 마련해서 남부럽잖게 살고있을 게다. 그 옛날 연탄 가스 맡아가면서 잠들던 방, 바람이 밤새도록 문을 흔들던 그 방, 샤워는커녕 재래식 화장실조차 줄을 서서 사용했던 그 집을 아마 죽도록 잊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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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등 불빛에 눈 먼 오징어가 줄줄이 올라온다.
오라, 벌써 가을이 드는구나.
방어진 항에는 퉁퉁 불은 젖가슴 같은 집어등을 수십 개씩 매단 배가 빼곡이 들어찼다. 뱃전에 널어놓은 오징어가 해풍에 다 마르기도 전에 만선이 되었다고 뱃사람들은 신바람이 났다.
“진수 엄마, 오징어 사러 안 가요?”
차임벨을 누르고 이웃들이 몰려온다. 아, 그렇구나. 벌써 시월이구나. 동해안의 오징어가 올해도 풍년이라지.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서 오징어잡이 배는 날마다 만선으로 돌아온다 하였고 방어진 항에는 오징어를 사려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눈부신 집어등 불빛에 현혹 당한 오징어는 상자 속에 넋을 잃고 누워 있다.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등을 보이며 나란히 누워 있다.
검푸른 바다 속을 헤매이며 찾아다니던 사랑이 결국 이것이었나? 그러나 두 번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안타까운 목숨.
풍어 소식은 바람난 과부 소문처럼 항구에서 도시로 삽시간에 퍼졌다. 오징어 철이 왔다고 이웃을 청해 몰려오는 사람들.
“오징어 사이소. 젤 좋은 거 한 짝에 만원임더.”
배에서 이제 막 내려놓은 싱싱한 오징어를 놓고 흥정이 벌어진다. 고만고만한 씨알이건만 좀 더 크고 싱싱한 오징어를 고르느라 사람들은 저마다 발길이 바쁘다.
이즈음 항구에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여인들이 있다.
“오징어 배 따이소.”
오징어 흥정이 끝나고 물건이 주인 앞에 오기도 전에 잽싸게 상자를 낚아채는 여인. 머리엔 수건을 쓰고 허리엔 고무치마를 둘렀다. 이름하여 오징어 배따는 여자.
허름한 시장 골목 한구석에 오징어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시작되는 그녀의 작업. 예리한 칼로 오징어 배를 가르고 먹통이 터지지 않게 내장을 꺼내는 그 민첩한 동작은 놀랍도록 빠르다.
먹물이 튄 얼굴을 소매로 훔쳐가며 오징어 한 상자를 장만해주고 그녀가 손에 쥐는 돈은 고작 천 원, 그래도 서로 손님 차지하느라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그녀들이 장만해준 오징어는 집집마다 빨랫줄에 널려 세상 구경을 한다. 말갛게 씻기운 몸을 햇살에 드러낸 채 거꾸로 매달려 바람구멍 난 눈으로 더듬더듬 세상을 본다. 아, 바람이 맑구나. 햇살은 갈치 비늘처럼 아름답구나.
한낮의 태양에 말랐다가 밤이슬에 녹으면서 오징어는 며칠만에 몸이 바싹 줄어든다. 그 사이 사람들은 오징어를 걷어들여 모양을 잡느라고 손으로 펴고 발로 밟고 수선을 피운다.
시월 접어들면서 방어진 전역에는 비릿한 오징어 냄새가 곳곳에서 풍겨온다. 항구 일대의 아파트에는 베란다에 줄줄이 오징어를 말리고, 주택가 빨랫줄에도, 심지어는 탱자나무 가지에도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집집마다 베란다에 널린 오징어 때문에 달착지근하고 비릿한 그 냄새가 방어진을 고요히 뒤흔드는 것이다.
마른 오징어를 찢어 쫄깃한 육질의 달착지근한 맛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방어진 항으로 달려간다. 고향의 부모님께, 가까운 친지나 지인에게 그 맛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가을 접어들면서 말린 오징어가 몇 축이나 되지만 돈이 아깝지 않다고들 한다. 오징어는 풍년이라 값이 싸고, 바람 좋은 날씨에 오징어 말리기는 쏠쏠한 재미가 있으니까.

방어진을 더욱 방어진답게 하는 여인, 방어진에는 해녀들이 산다.
방어진 해녀들은 본토박이보다 제주댁 들이 훨씬 많고 대개 나이 사오십 이상 먹은 여인들이다.
옛날엔 동해 전부가 그들의 터전이었는데 바다를 메우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점차 일거리를 잃었다.
돈이 궁해 전라도 해안으로 물질하러 떠나는 방어진 해녀는 3월에 가서 8월에 돌아오는 철새들이기도 하다.
타고난 운명처럼 물질을 생업으로 삼아온 그녀들은 뭍의 사람들과 쉬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며 산다.
새벽마다 바람 소리를 듣고 바다의 기상을 점쳐보는 여인들. 파도가 심해 바다가 뒤집히면 물 속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하루의 기도가 바다가 잔잔하게 해달란 것일 뿐.
일행들과 모여 바다로 향하는 해녀들의 얼굴엔 기쁨이 반짝인다. 두길 세길 바다 밑으로 자맥질하면서 비로소 편안해지는 그들의 가슴. 물밑에서 평화를 얻는 것은 제주 사람의 핏줄 탓일까.
여럿이 나가 해삼 전복을 많이 잡아 조합에 넘긴 날은 훌훌 털고 집으로 오지만 네댓이 물질하러 나간 날은 각자 잡은 것들을 이고 시장통에 나앉아야 한다.
시장 밖 한길 가에 고무 함지를 내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해녀들의 얼굴은 검붉게 익어 있다. 손바닥만한 전복 한 마리 팔면 오늘 저녁 소고기국을 먹을텐데. 애 태우지 않아도 해녀들의 고무 함지는 금방 비워진다. 자연산 해산물이 귀하다는 걸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리라.
방어진 해녀들은 곤궁하게 사는 사람보다 알부자가 많다고들 한다. 억척같이 물질해서 번 돈으로 마을에 땅을 사 두었다가 공장 들어서는 바람에 보상받아 부자 된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요즘의 졸부들 같지 않다. 사치는커녕 억척스러울 만치 검소하다. 잘사는 여자나 못사는 여자나 파도만 잠잠하면 언제라도 물질하러 바다에 나간다. 쉰이 넘은 나이도 아랑곳없다.
허리에 찬 납덩이 때문에 몸은 언제나 신경통에 시달리고 잠수병엔 이미 만성이 되었지만 쉬 고무옷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
섬사람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나온 해녀들은 자신들이 어머니에게서 배운 물질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다. 바다는 이제 더 이상 생활의 터전이 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매립지는 늘어나고, 남아 있는 한 조각 바다도 차츰 오염되고 있으니까.
방어진 해녀들은 종래엔 모두 전라도로 갈지 모르겠다. 철새가 되어 8월이면 방어진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해녀들이 떠나거나 말거나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뜨내기가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 때문이리라.
고향을 떠나 일을 찾아 흘러온 사람들은 언제라도 돈을 벌어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들의 품속엔 언제나 고향의 산하가 있다.
그래서 방어진은 언제나 타향이다. 유달리 향우회가 많은 것도 '객지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타향 객지 외로운 사람들끼리 향우회를 통해 동병상린을 나누는 것이 귀향처럼 행복한지도 모른다.
삼 년만, 오 년만 하던 게 십 삼 년, 이십 삼 년을 살게 되어 이젠 그만 방어진 사람이 다 된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 오징어 배따는 여자도 살고, 물질 다니는 해녀도 산다.
고향은 꿈속에서만 아름다운 것. 현실로는 이미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곳. 방어진 사람들은 올 가을에도 베란다 가득 오징어를 널어 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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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 일간지 머릿기사에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발표되었다.
교육환경, 녹지공간, 문화적 여건 등 '삶의 질'을 따져본 조사에서 울산은 71위로 전국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참 서운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정 붙이고 살면 다 좋아 보이는 건지 몰라도 나는 울산이 참 좋다. 문화의 불모지니 공해도시니 하는 말은 건성 들린다.
어쩌다 친척들을 만나면 "그 공기 나쁜 곳에서 어떻게 사니?" 하고 걱정들을 하는데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들에게 울산이 얼마나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인지 설명하느라 목이 쉰다.
공업단지로 지정되기 이전의 울산이야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았겠지만, 인구 백만의 현대화된 도시 울산 역시 정답고 사랑스럽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도심의 거리는 거리대로, 2교대나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지대는 공장지대대로 그 나름의 정겨움이 느껴진다.
옛 울산에 대한 향수에만 연연하여 오늘날의 울산을 척박하다고만 하지 말자.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울산이 비록 옛날처럼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인정이 넘쳐나는 곳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개척하고 그들의 인생행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엘도라도로.
그들은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땀 흘리며 고향의 형제들을 공부시키며 부모들에게 물질적인 효도도 실컷 했다. 그들에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 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뜻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은 멀리서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 울산에 살면서 울산을 흉보지 말자. 언제라도 돈만 벌면 이곳을 떠나리라고 생각지 말자.
내 청춘의 피땀을 바친 이 곳에서 뭔가 이루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 아버지의 땀 흘린 흔적을 보면서 자식들도 뭔가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울산에 대한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계제도를 공부했던 나는 H사에 공채를 통해 입사해 울산에 첫발을 디뎠다. 스물 세 살의 처녀 눈에 비친 울산은 얼마나 황량하고 서글펐는지… 20년 넘게 내륙에서만 생활해서인지 방어진의 바닷바람은 나에게 엄청난 위력으로 다가왔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던가, 퇴근해서 조선소 야드를 걸어 나오는데 등뒤에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과 함께 들려오던 용접공들의 걸쩍지근한 육두문자.
비바람 때문에 가뜩이나 졸아붙어 있던 내 가슴은 얼음처럼 차가워지면서 이런 다짐을 했었다.
"떠나야지. 이 무식하고, 몰인정하고, 비정한 곳을."
그랬다. 연일 휘몰아치는 바람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울산의 비문화적인 환경이었다. 어디 정 붙일 데라곤 없이 황량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었으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마시는 하루살이들의 집단서식지에 불과했다.
일요일이면 하루종일 동해를 내려다보며 나는 향수병을 앓았다. 나,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 그리운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다리는 내 고향 진주로.
당시 울산은 도시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급격히 발전을 거듭하느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주택이나 도로 여건과는 상관없이 유입되는 인구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으니, 사람답게 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몰랐다.
거대한 선박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도장공, 아름다운 용접불꽃을 바다로 떨어뜨리며 그의 젊음을 사르던 용접공, 쇳가루를 한 줌씩 마시면서도 잘살아 보자고 잔업이며 철야작업을 불사하던 그라인더공.
아아, 그때는 몰랐다. 그들의 땀이 얼마나 귀한 줄. 얼마나 뜨거운 줄.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라는 근사한 명칭은 그들에게 너무나 사치스런 치장이었다. 울산은 그들에게 단지 치열한 '삶' 그 자체였을 뿐이다.
나는 蔚山울산이 아니라 鬱山울산이라고 입버릇처럼 뇌었다. 연일 부는 바람처럼 거리는 무질서했고 정서적인 안정을 취할 곳이 없어 나는 무척 우울했다.
울산생활 만 1년만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마침 계열사에서 설계직 사원에 대한 전출 의뢰가 와서 스스럼없이 응하고 말았다.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울산을 떠났다.
아침마다 잘 닦은 양은냄비처럼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동해를 볼 수 없어도 좋았다. 나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鬱山울산을 떠났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나는 울산을 떠난 지 6년 후에 다시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혼기를 놓치고 서른 고개를 넘고 있는 노처녀에게 표적이 된 남자가 하필이면 울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12년, 나도 이제 어엿한 울산사람이고 내 아들의 고향도 울산으로 만들었다.
12년간 울산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토박이도 만나보고 객지 사람도 겪어보았지만, 나름대로 이 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다.
토박이들은 '객지 사람들이 울산을 다 버려놓고, 저희들은 돈 벌어 고향으로 가버리면 그만 아니냐'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간 '객지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어느새 객지사람들에게 울산은 제2의 고향이 되어있고, 2세들의 고향이 되어있고, 그래서 더 책임감 있게 울산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울산으로 왔지만, 그 이후로는 나는 한 번도 울산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정을 주고 사랑을 나누고 살면 어디나 좋은 곳이다. 내 마음의 빗장을 걸어놓고 언제나 떠날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이 도시가 얼마나 황량할까.
교통이나 환경, 교육적인 면에서 다소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는 우리 나라 대도시들이 거의 다 안고 있는 難題난제라고 생각된다. 산업화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훼손 당한 아름다운 자연과 각박한 인심도 이제 와서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울산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나쁜 도시로 손꼽히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나쁜 습성 중 하나가 문화적 사대주의와 자기비하 심리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를 나쁘게 얘기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국민성이 틀렸어' 따위의 자조와 지독한 지역이기주의들은 정말 버려야 한다.
울산이 살기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울산을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보았는지 궁금한 일이다.
울산은 도시 그 자체보다도 주변 여건이 좋다. 신라문화권에 속해 근교 구석구석에 유물 유적이 많고, 천 미터급 봉우리들이 즐비한 영남알프스 산맥들이 울산의 지붕을 이루면서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주전, 정자, 강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오염되지 않은 빛깔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름 한철 스킨스쿠버로 물 속에 들어가 보면, 사이판이나 괌이 부럽지 않다.
남의 도시, 남의 나라만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사는 울산을 바로 알고 사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쓴 물을 단물로'라는 말처럼, 이곳이 척박하다고 생각되더라도 내가 사랑을 가지고 노력하면 울산은 얼마든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수 년 내로 울산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남의 말을 좋게 합시다'가 아니라 '내 말도 좋게 합시다'로 바꾸고 내가 사는 울산을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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