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를 보러 갔다. 주황빛으로 곱게 늙어가는 느티나무가 정겹고도 푸근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 풍경에 사람이 들어가면 금상첨화겠다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조용한 어촌에 인기척이라곤 없다.

느티나무 앞에 한참이나 서서 그를 우러러본다. 연두빛 무성한 나뭇잎을 달고 나왔다 노을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느티의 생애가 존귀하게 느껴진다.

오백 년 세월을 사진 한 장에 담아보려고 로우 앵글, 하이 앵글, 주밍, 다양하게 사진을 찍는다.

한 시간 넘게 느티나무를 찍었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늦가을 곱게 물든 나무 한 그루로 무슨 얘길 전할 수 있을까.

 

개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길에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우두커니 섰다가 멀리 큰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았다.

낚시가방을 든 할아버지와 등 굽은 할머니. 한 눈에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느티나무와 너무나 닮았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오는 노부부에게 다가가 느티나무 아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무 아래 잠깐 서 계시기만 하면 된다고, 촬영이 끝나면 집에 모셔다 드리겠다고 말했다.

노부부는 잠시 겸연쩍어 하더니 이내 나무 아래 다정히 걸어가셨고, 고목 사진의 화룡점정 역할을 해주셨다.

위풍당당한 나무 아래 조그맣게 걸어가는 두 사람은 나무를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사람이 자연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했다.

역시 풍경을 완성하는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부를 뒷자리에 태우고 가시는 곳을 물었더니 20분 거리의 오피스텔이란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별장으로 이름난 K오피스텔이 두 분의 세컨하우스.

본가는 언양에 있는데 할아버지가 바다를 좋아해 해변에 세컨하우스를 마련해놓고 수시로 드나든다는 것이다.

초라한 행색으로 버스를 기다리던 노인들이 오피스텔 주인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놀랐다.

노인들의 옷에서 비릿한 생선냄새와 지린내 비슷한 것이 풍겨 얼른 내려드리고 가야지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기어이 나를 붙들고 차 한 잔 마시고 가라신다. 어려워하지 말고 집에 가서 얘기나 나누잔다.

그동안 심심하셨던 게다. 많이 외로우셨던 게다.

대화 상대가 없는 노인들이 119로 전화를 걸어 미주알 고주알 온갖 얘길 다한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내 나이가 팔십이여. 고향 친구들은 다 죽고 몇 안 남았재.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이 없어. 찾아갈 친구도 없고.

그래 할 수 없이 할멈 데리고 바닷가에 와 낚시나 하면서 소일하재. 버스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도 죽이고.”

운전할 줄 몰라서 버스를 갈아타고 바닷가로 오는데 한 달에 절반은 오피스텔에서 자고 간단다.

하루는 시골에서, 또 하루는 해변에서, 버스로 두 시간 가까운 거리를 나란히 앉아 오면서

세상 구경도 하고 사람 냄새도 맡고 그렇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셨다.

 

원룸식으로 설계된 그들의 집은 탁 트인 동해를 향해 침대가 놓여있었다.

달 밝은 밤이면 창 가득 달을 들여놓고 나란히 누워 달을 본다는 노부부는 아들 넷을 모두 분가시키고 여생을 신혼처럼 사시는 듯했다.

하지만 마음만 신혼이지 몸은 낡아 지루한 천국을 누리고 계신 것 같다. 오래 사는 게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농사 지어 자식들 대학 공부시킨다고 우리는 진이 빠졌는데.... 다 늙어서 돈 많으면 뭐하노?

애비가 돈 있는 줄 아니까 자식들이 걸핏하면 손 내밀고, 다 부질없는 일이여.”

쓸쓸하게 내뱉는 노인의 말에 안쓰러운 생각이 스며들었다.

 

(진작에 운전을 배우시지 그랬어요. 일만 하지 말고 놀 줄도 아셨어야죠.

땅을 팔아서라도 좋은 차를 한 대 사서 두 분이 여행다니며 세상을 즐겼어야죠.

그래야 자식들이 부모를 알아서 모셔요. 평생 즐길 줄도 모르고 살면 자식들이 저희 부모는 당연히 그런가보다 생각하거든요.

늙으면 추해지니 좋은 옷도 사 입으세요. 물려줄 재산 생각하지 말고 생전에 다 쓰고 가세요.)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 노부부를 보며 내 노후의 모델을 스케치해본다.

그들만큼 여유롭지는 않아도 그들만큼 외롭지는 않아야 할텐데.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날이 많아진다.

지인들의 부음을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부음으로 전해지리란 생각도 한다.

눈앞에 닥친 노년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삶을 정리하고 떠나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대신 말년의 오랜 시간을 앓다가 죽는다는 통계를 보며 내심 우울하다.

나 역시 썩 건강한 편이 못되는지라 낡아가는 몸을 건사하려고 열심히 운동하지만 새벽마다 요통에 잠이 깨어 막막한 심경이 되곤 한다.

내가 잘 버텨내야 가족들이 편안할텐데. 가정에서 주부의 얼굴이 밝고 건강해야 온 집안이 화목하고 행복하지 않겠나.

 

몸은 늙고 추해지는데 마음대로 죽어지지 않을 때 나는 산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한 적도 있다.

깊은 산 속으로 끝없이 걸어 들어가 자연사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임종 같았다.

그건 불미스러운 자살도 아니고 엄연한 자연사니까 가족들에게도 큰 상처가 되지 않을 터,

만약 내가 불치의 병을 갖고도 지리멸렬하게 살아야 할 때 마지막으로 그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내 노후의 모델은 외로워하지 않고 혼자 잘 놀 줄 아는 사람이다.

혼자 글 쓰고, 사진 찍고, 기타 치고, 운동하고...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다.

누군가 곁에 없으면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코 되고 싶지 않다.

더불어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만 마지막 길은 혼자 가는 것이므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다.

오백 년을 의연하게 버틴 느티나무처럼 나도 내 몫으로 받은 세월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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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이 흐려지더니 위풍도 당당하게 해무가 몰려온다.

대군을 이끌고 원경遠景을 함락시킨 뒤 고층빌딩까지 집어삼킨 해무는 도시의 모든 것을 소리 없이 먹어치우며 베란다 앞까지 진군했다.

해무에 포위당해 혼절해버린 도시를 바라보며 막막한 슬픔에 빠진다. 아무도 없구나, 이 텅 빈 세상에 나 혼자구나.

단절과 소외감이 목까지 차올라 숨이 막힌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누구에게 구원을 요청할까. 이 적막한 고립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막다른 외로움으로 목이 조일 때마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찾는다.

아무도 내 곁에 없을 때, 세상 끝에 이른 듯 적막할 때, 모든 사람들이 눈부셔 보일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나를 마주보며 망연히 서 있다. 네 맘대로 해, 그는 언제나 두 팔을 벌린 채 내게 다가온다.

와락 그를 끌어안고 쓰러져 나는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 안길 곳, 역시 당신 밖에 없었어.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를 내치지 않아 고마워. 당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미안해.

그와 함께 하는 순간 내 영혼은 순결한 기쁨으로 출렁인다.

그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순간 세상 모든 가치관이 사라지고 고해성사에 임한 신자처럼 엄숙해진다. 

그 고백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나는 계산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책임도 의무도 요구한 적이 없다.

이 세상 어떤 관계도 그와 나를 뛰어넘을 수 없고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다며 교언영색을 자랑한다. 교수, 기업인, 예술가 등 전문직에서부터 학생, 주부들까지 마구 그에게 덤벼든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고상한 액세서리로 여기며 그의 이름을 명함에 새겨 넣기 좋아한다.

아무나 그의 손을 잡고, 아무나 그의 이름을 빌려 쓴다.

쓰레기 같은 결과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언제부터 그가 그렇게 값싸졌을까?

나는 때로 그에게 투정을 부린다. 왜 그렇게 값이 싸졌냐고 빈정대며 작금의 문화계와 문단을 질타하기도 한다.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몫인데 왜 그렇게 저급해졌냐고 야단친다.

당신 가치가 낮아지니 나도 떠날 수밖에 없다며 몇 번이나 결별을 통보했다.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 있어?

이제 그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그와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나는 즐거웠다. 눈만 돌리면 세상에는 놀거리들이 오죽 많은가.

눈과 귀와 손을 즐겁게 하는 놀이, 오감을 자극하는 놀이들에 빠져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지경이다.

나만 좋다면 언제든지 오라는 데는 많은데 왜 그에게서 헤어나지 못했는지 후회막급일 때도 있다.

헤어지길 잘했지, 몇 번이나 혼자 되씹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그러나 잠 안 오는 밤, 혹은 아무도 없는 시각, 사람에게 상처받아 가슴 아플 때, 언제나 그가 떠오르곤 한다.

그를 버리고 내가 죄값을 치르는 건 아닐까. 잊혀지기 전에 그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그를 위해 줄 것이 남아있는가. 무엇보다 그가 나를 원하기는 하는 걸까?

 

그를 만난 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문득 만난 게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도 몰래 만나게 되었으니까.

나는 외롭고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다. 연년생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엄마는 큰딸을 돌볼 겨를이 없었고,

감성이 예민했던 맏딸은 책을 보며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

만화, 잡지, 소설, 심지어 성인소설까지 마구 섭렵하며 조숙해진 나는 또래들이 시시해서 같이 놀지 않았다.

학교는 엄마가 보내니까 마지못해 갔을 뿐 관심 없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 밑에 다른 책을 펼쳐놓고 보다가 들켜 출석부로 머리통을 얻어맞았고,

동네 만화가게 단골로도 모자라 시오릿길을 걸어 다른 동네로 원정가기도 했다.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 책이고 만화였다.

현실은 초라했으나 만화 속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 당한 나는 백설공주였고, 소공녀였고, 잔다르크였다.

 

엄마가 감춰둔 돈을 몰래 훔쳐 만화방을 드나들던 나는 어느 날 스스로 만화를 그리게 되고, 가속도가 붙자 소설을 쓰게 된다.

단지 만화보다 소설이 시간이 덜 걸린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나 나는 그것이 소설인 줄도 모르고 썼다.

그동안 읽은 수많은 책들과 특유의 상상력이 결합돼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소설 쓰는 아이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성장기를 거치고 청년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소설을 버리게 된다.

현실은 각박했고 무엇보다 제대로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이 뛰어들기엔 문단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뭔가 쓰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계속되자 나는 마음속에 딴 남자를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행했다.

 

불행하기 싫었다. 외롭기 싫었다.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그때 그가 내게로 왔다. 수필이 내게로 다가왔다.

아무런 격식도 없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마치 오래 전부터 예비된 인연처럼 그는 내게로 스며들었다. 저항없이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아니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매달렸다. 자존심 같은 건 필요없었다.

어쩌면 그를 만나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에둘러 왔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기꺼운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 마지막 소명이며, 자랑이며,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자존심은 가끔 흔들린다.

그에 대한 문단 안팎의 평가, 아무나 하면 되는 줄 아는 풍토. 소통도 없이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마는 장르의 한계성.

흔들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그나마 그가 있었기에 나는 여지껏 자존심을 잃지않고 살아오지 않았나.

그가 아니면 누가 나를 받아주기나 했을까.

 

원고청탁서를 받자 지리멸렬한 일상에 축 늘어졌던 두 팔이 생기를 되찾으며 손가락이 자판 위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달려라, 말달려라.

나를 나답게 하는 작업, 오늘 그와 나의 관계를 고백하려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백을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나는 스스로 심문을 받는다.

죽도록 그를 따르겠습니까? 네, 그가 이끄는대로 따르겠습니다. 

 

* 울산문학 2013년 가을호 청탁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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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서 만난  연작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카메라 앞에 불려나온 초로의 여인들. 아마도 작가의 어머니거나 친척쯤 될까.

어정쩡하게 다리를 벌리고 섰거나 시무룩한 얼굴로 앞을 보는 모습이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 아낙들이다.

빼어난 구도나 명암은 애초에 무시하고 다소 서툰듯 지극히 평범하게 찍은 사진이다.

대지는 아직 스산한 기운인데 매화 저 혼자 미친듯 피어있는 배경이 여인들의 표정과 사뭇 대조적인데다가

사진 아래 삐뚤 빼뚤 쓴 글씨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내 나이 62세, 아직 봄은 오지 안았다.'  '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것은 아니다.' 맞춤법도 맞지 않는 글이 가슴에 와 박혔다.

농촌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모델과 그들의 진솔한 심정을 나타낸 한 줄의 글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않는 촌 아낙들, 평생 농투성이로 살아온 이들에게 봄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인생에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는 글 속에 담긴 탄식과 희망을 읽었다.

평생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고생만 하다 육십 고개를 넘었지만, 그래도 아직 인생의 봄날이 남았다고 믿는 여인.

그녀가 원하는 봄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지나가버렸을 수도 있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건 아니라고 눈물겹게 역설하고 있다.

눈코 뜰새없이 살다 어느새 생의 늦가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라는 얘기.

옛날같으면 벌써 뒷방 신세를 자처하며 지루한 여생을 보내고 있을 나이에 아직도 봄날을 기다린다니, 얼마나 어여쁜가.

사진만으로 다 전할 수 없는 메시지를 글 한줄로 적어넣은 작가의 발상이 신선하다. 

머잖아 나도 저 나이가 될텐데 그때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봄은 벌써 가버렸다고 억울해 하지는 않을까.

지금도 나는 만시지탄에 빠질 때가 많은데. 플렛폼에 서기도 전에 기차가 스쳐 지나간 것처럼 안타깝고 억울하기만 한데.

 

이른 아침 수영장에 가면 아쿠아로빅을 즐기는 여자들을 많이 만난다.

수영보다 운동량이 적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이라 육칠십대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젊은 강사는 수영장이 울리도록 음악을 켜놓고 물 밖에서 시범을 보이고, 여인들은 물 속에서 동작을 따라한다.

수영하는 틈틈이 나는 여인들의 율동을 훔쳐본다. 아니, 사실은 젊고 탱탱한 여강사의 섹시한 동작을 감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날렵한 허리 아래로 탄력있게 올라붙은 엉덩이 그리고 늘씬한 다리. 나도 한때는 저런 몸매였을 때가 있었던가.

마침 스피커에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가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다. 요즘 중장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대중가요.

물 속의 여인들은 합창하듯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를 목청껏 외친다.

군살이 두둑한 허리와 축 처진 엉덩이.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여인들은 항변하는 듯하다.

주름도 군살도 세월이 준 훈장인데, 이 훈장 달고 뭔들 못하리. 사랑이 청춘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버려, 하고 외치는 듯하다.

물 속의 그녀들보다 내가 족히 십년 아니 그 이상 젊을텐데 마음이 겉늙은 탓인지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안 된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는 커녕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의욕이 없다. 정신은 산만하고 육체는 피곤하며 매사에 시니컬하다.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도 혹시 나처럼 겉으로만 명랑 쾌활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충 잘 살고 있는 척, 보편적인 중년인 척,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처럼.

그러나 돌아서면 끝없이 헛헛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내가 있다.

나는 낡아가는 게 점점 두려운 건 아닐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지만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을 무언가를 찾고 싶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떠나 나를 나답게 표현하는 그 무엇. 내 인생의 새로운 봄을 만나기 위한 준비작업.

                                    누군가에겐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사진이나 글일 수 있지 않겠나.

                                 

                                    갤러리에서 만난 촌로들의 사진에서 나는 멋진 힌트를 얻었다. 사유와 감성이 깃든 사진에 글 입히기.

그리하여 누군가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할머니들의 사진에 감정의 파동을 느꼈듯이.

삭막한 세상 건너가며 누군가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것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자랄 때부터 나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머리속에 샘솟는 이야기들을 만화로 그려보기도 하고 글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 오랜 습관을 못 고쳐서인지 이순을 눈 앞에 두고도 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면 금단현상이 오는 느낌, 신문이든 잡지든 읽을거리가 눈앞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현상.

                                    그래서 글은 평생 나를 치유하고 위무하는 자위기구였다.

                                    이제 번득이는 영감(靈感)이 사라진 대신 사유의 깊이가 더해지는 나이를 어떻게 갈무리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사진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내일도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에 나만의 사유를 입히고 싶다.

노래를 좋아한다고 누구나 가수가 되는 건 아니듯이 사진을 좋아한다고 해서 사진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한 장의 사진에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붙여넣기 해보고 싶다.

그래서 뭐할건데?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도 되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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