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어등 불빛에 눈 먼 오징어가 줄줄이 올라온다.
오라, 벌써 가을이 드는구나.
방어진 항에는 퉁퉁 불은 젖가슴 같은 집어등을 수십 개씩 매단 배가 빼곡이 들어찼다. 뱃전에 널어놓은 오징어가 해풍에 다 마르기도 전에 만선이 되었다고 뱃사람들은 신바람이 났다.
“진수 엄마, 오징어 사러 안 가요?”
차임벨을 누르고 이웃들이 몰려온다. 아, 그렇구나. 벌써 시월이구나. 동해안의 오징어가 올해도 풍년이라지.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서 오징어잡이 배는 날마다 만선으로 돌아온다 하였고 방어진 항에는 오징어를 사려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눈부신 집어등 불빛에 현혹 당한 오징어는 상자 속에 넋을 잃고 누워 있다.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등을 보이며 나란히 누워 있다.
검푸른 바다 속을 헤매이며 찾아다니던 사랑이 결국 이것이었나? 그러나 두 번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안타까운 목숨.
풍어 소식은 바람난 과부 소문처럼 항구에서 도시로 삽시간에 퍼졌다. 오징어 철이 왔다고 이웃을 청해 몰려오는 사람들.
“오징어 사이소. 젤 좋은 거 한 짝에 만원임더.”
배에서 이제 막 내려놓은 싱싱한 오징어를 놓고 흥정이 벌어진다. 고만고만한 씨알이건만 좀 더 크고 싱싱한 오징어를 고르느라 사람들은 저마다 발길이 바쁘다.
이즈음 항구에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긴 여인들이 있다.
“오징어 배 따이소.”
오징어 흥정이 끝나고 물건이 주인 앞에 오기도 전에 잽싸게 상자를 낚아채는 여인. 머리엔 수건을 쓰고 허리엔 고무치마를 둘렀다. 이름하여 오징어 배따는 여자.
허름한 시장 골목 한구석에 오징어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시작되는 그녀의 작업. 예리한 칼로 오징어 배를 가르고 먹통이 터지지 않게 내장을 꺼내는 그 민첩한 동작은 놀랍도록 빠르다.
먹물이 튄 얼굴을 소매로 훔쳐가며 오징어 한 상자를 장만해주고 그녀가 손에 쥐는 돈은 고작 천 원, 그래도 서로 손님 차지하느라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그녀들이 장만해준 오징어는 집집마다 빨랫줄에 널려 세상 구경을 한다. 말갛게 씻기운 몸을 햇살에 드러낸 채 거꾸로 매달려 바람구멍 난 눈으로 더듬더듬 세상을 본다. 아, 바람이 맑구나. 햇살은 갈치 비늘처럼 아름답구나.
한낮의 태양에 말랐다가 밤이슬에 녹으면서 오징어는 며칠만에 몸이 바싹 줄어든다. 그 사이 사람들은 오징어를 걷어들여 모양을 잡느라고 손으로 펴고 발로 밟고 수선을 피운다.
시월 접어들면서 방어진 전역에는 비릿한 오징어 냄새가 곳곳에서 풍겨온다. 항구 일대의 아파트에는 베란다에 줄줄이 오징어를 말리고, 주택가 빨랫줄에도, 심지어는 탱자나무 가지에도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집집마다 베란다에 널린 오징어 때문에 달착지근하고 비릿한 그 냄새가 방어진을 고요히 뒤흔드는 것이다.
마른 오징어를 찢어 쫄깃한 육질의 달착지근한 맛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방어진 항으로 달려간다. 고향의 부모님께, 가까운 친지나 지인에게 그 맛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가을 접어들면서 말린 오징어가 몇 축이나 되지만 돈이 아깝지 않다고들 한다. 오징어는 풍년이라 값이 싸고, 바람 좋은 날씨에 오징어 말리기는 쏠쏠한 재미가 있으니까.

방어진을 더욱 방어진답게 하는 여인, 방어진에는 해녀들이 산다.
방어진 해녀들은 본토박이보다 제주댁 들이 훨씬 많고 대개 나이 사오십 이상 먹은 여인들이다.
옛날엔 동해 전부가 그들의 터전이었는데 바다를 메우고 공장이 들어서면서 점차 일거리를 잃었다.
돈이 궁해 전라도 해안으로 물질하러 떠나는 방어진 해녀는 3월에 가서 8월에 돌아오는 철새들이기도 하다.
타고난 운명처럼 물질을 생업으로 삼아온 그녀들은 뭍의 사람들과 쉬 어울리지 못하고 그들끼리 한 세계를 이루며 산다.
새벽마다 바람 소리를 듣고 바다의 기상을 점쳐보는 여인들. 파도가 심해 바다가 뒤집히면 물 속이 보이지 않으니 그저 하루의 기도가 바다가 잔잔하게 해달란 것일 뿐.
일행들과 모여 바다로 향하는 해녀들의 얼굴엔 기쁨이 반짝인다. 두길 세길 바다 밑으로 자맥질하면서 비로소 편안해지는 그들의 가슴. 물밑에서 평화를 얻는 것은 제주 사람의 핏줄 탓일까.
여럿이 나가 해삼 전복을 많이 잡아 조합에 넘긴 날은 훌훌 털고 집으로 오지만 네댓이 물질하러 나간 날은 각자 잡은 것들을 이고 시장통에 나앉아야 한다.
시장 밖 한길 가에 고무 함지를 내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해녀들의 얼굴은 검붉게 익어 있다. 손바닥만한 전복 한 마리 팔면 오늘 저녁 소고기국을 먹을텐데. 애 태우지 않아도 해녀들의 고무 함지는 금방 비워진다. 자연산 해산물이 귀하다는 걸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리라.
방어진 해녀들은 곤궁하게 사는 사람보다 알부자가 많다고들 한다. 억척같이 물질해서 번 돈으로 마을에 땅을 사 두었다가 공장 들어서는 바람에 보상받아 부자 된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요즘의 졸부들 같지 않다. 사치는커녕 억척스러울 만치 검소하다. 잘사는 여자나 못사는 여자나 파도만 잠잠하면 언제라도 물질하러 바다에 나간다. 쉰이 넘은 나이도 아랑곳없다.
허리에 찬 납덩이 때문에 몸은 언제나 신경통에 시달리고 잠수병엔 이미 만성이 되었지만 쉬 고무옷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
섬사람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 나온 해녀들은 자신들이 어머니에게서 배운 물질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다. 바다는 이제 더 이상 생활의 터전이 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매립지는 늘어나고, 남아 있는 한 조각 바다도 차츰 오염되고 있으니까.
방어진 해녀들은 종래엔 모두 전라도로 갈지 모르겠다. 철새가 되어 8월이면 방어진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해녀들이 떠나거나 말거나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뜨내기가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 때문이리라.
고향을 떠나 일을 찾아 흘러온 사람들은 언제라도 돈을 벌어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들의 품속엔 언제나 고향의 산하가 있다.
그래서 방어진은 언제나 타향이다. 유달리 향우회가 많은 것도 '객지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타향 객지 외로운 사람들끼리 향우회를 통해 동병상린을 나누는 것이 귀향처럼 행복한지도 모른다.
삼 년만, 오 년만 하던 게 십 삼 년, 이십 삼 년을 살게 되어 이젠 그만 방어진 사람이 다 된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 오징어 배따는 여자도 살고, 물질 다니는 해녀도 산다.
고향은 꿈속에서만 아름다운 것. 현실로는 이미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곳. 방어진 사람들은 올 가을에도 베란다 가득 오징어를 널어 말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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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 일간지 머릿기사에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발표되었다.
교육환경, 녹지공간, 문화적 여건 등 '삶의 질'을 따져본 조사에서 울산은 71위로 전국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참 서운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정 붙이고 살면 다 좋아 보이는 건지 몰라도 나는 울산이 참 좋다. 문화의 불모지니 공해도시니 하는 말은 건성 들린다.
어쩌다 친척들을 만나면 "그 공기 나쁜 곳에서 어떻게 사니?" 하고 걱정들을 하는데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들에게 울산이 얼마나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인지 설명하느라 목이 쉰다.
공업단지로 지정되기 이전의 울산이야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았겠지만, 인구 백만의 현대화된 도시 울산 역시 정답고 사랑스럽다.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도심의 거리는 거리대로, 2교대나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지대는 공장지대대로 그 나름의 정겨움이 느껴진다.
옛 울산에 대한 향수에만 연연하여 오늘날의 울산을 척박하다고만 하지 말자.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은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울산이 비록 옛날처럼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인정이 넘쳐나는 곳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개척하고 그들의 인생행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엘도라도로.
그들은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땀 흘리며 고향의 형제들을 공부시키며 부모들에게 물질적인 효도도 실컷 했다. 그들에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 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뜻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은 멀리서 그리워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 울산에 살면서 울산을 흉보지 말자. 언제라도 돈만 벌면 이곳을 떠나리라고 생각지 말자.
내 청춘의 피땀을 바친 이 곳에서 뭔가 이루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 아버지의 땀 흘린 흔적을 보면서 자식들도 뭔가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울산에 대한 기억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계제도를 공부했던 나는 H사에 공채를 통해 입사해 울산에 첫발을 디뎠다. 스물 세 살의 처녀 눈에 비친 울산은 얼마나 황량하고 서글펐는지… 20년 넘게 내륙에서만 생활해서인지 방어진의 바닷바람은 나에게 엄청난 위력으로 다가왔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던가, 퇴근해서 조선소 야드를 걸어 나오는데 등뒤에서 휘몰아치는 세찬 바람과 함께 들려오던 용접공들의 걸쩍지근한 육두문자.
비바람 때문에 가뜩이나 졸아붙어 있던 내 가슴은 얼음처럼 차가워지면서 이런 다짐을 했었다.
"떠나야지. 이 무식하고, 몰인정하고, 비정한 곳을."
그랬다. 연일 휘몰아치는 바람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울산의 비문화적인 환경이었다. 어디 정 붙일 데라곤 없이 황량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었으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마시는 하루살이들의 집단서식지에 불과했다.
일요일이면 하루종일 동해를 내려다보며 나는 향수병을 앓았다. 나,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 그리운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다리는 내 고향 진주로.
당시 울산은 도시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급격히 발전을 거듭하느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주택이나 도로 여건과는 상관없이 유입되는 인구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으니, 사람답게 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몰랐다.
거대한 선박에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던 도장공, 아름다운 용접불꽃을 바다로 떨어뜨리며 그의 젊음을 사르던 용접공, 쇳가루를 한 줌씩 마시면서도 잘살아 보자고 잔업이며 철야작업을 불사하던 그라인더공.
아아, 그때는 몰랐다. 그들의 땀이 얼마나 귀한 줄. 얼마나 뜨거운 줄.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라는 근사한 명칭은 그들에게 너무나 사치스런 치장이었다. 울산은 그들에게 단지 치열한 '삶' 그 자체였을 뿐이다.
나는 蔚山울산이 아니라 鬱山울산이라고 입버릇처럼 뇌었다. 연일 부는 바람처럼 거리는 무질서했고 정서적인 안정을 취할 곳이 없어 나는 무척 우울했다.
울산생활 만 1년만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마침 계열사에서 설계직 사원에 대한 전출 의뢰가 와서 스스럼없이 응하고 말았다.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는 울산을 떠났다.
아침마다 잘 닦은 양은냄비처럼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동해를 볼 수 없어도 좋았다. 나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鬱山울산을 떠났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나는 울산을 떠난 지 6년 후에 다시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혼기를 놓치고 서른 고개를 넘고 있는 노처녀에게 표적이 된 남자가 하필이면 울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12년, 나도 이제 어엿한 울산사람이고 내 아들의 고향도 울산으로 만들었다.
12년간 울산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토박이도 만나보고 객지 사람도 겪어보았지만, 나름대로 이 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다.
토박이들은 '객지 사람들이 울산을 다 버려놓고, 저희들은 돈 벌어 고향으로 가버리면 그만 아니냐'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간 '객지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어느새 객지사람들에게 울산은 제2의 고향이 되어있고, 2세들의 고향이 되어있고, 그래서 더 책임감 있게 울산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울산으로 왔지만, 그 이후로는 나는 한 번도 울산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정을 주고 사랑을 나누고 살면 어디나 좋은 곳이다. 내 마음의 빗장을 걸어놓고 언제나 떠날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이 도시가 얼마나 황량할까.
교통이나 환경, 교육적인 면에서 다소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는 우리 나라 대도시들이 거의 다 안고 있는 難題난제라고 생각된다. 산업화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훼손 당한 아름다운 자연과 각박한 인심도 이제 와서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울산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나쁜 도시로 손꼽히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나쁜 습성 중 하나가 문화적 사대주의와 자기비하 심리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를 나쁘게 얘기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국민성이 틀렸어' 따위의 자조와 지독한 지역이기주의들은 정말 버려야 한다.
울산이 살기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울산을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보았는지 궁금한 일이다.
울산은 도시 그 자체보다도 주변 여건이 좋다. 신라문화권에 속해 근교 구석구석에 유물 유적이 많고, 천 미터급 봉우리들이 즐비한 영남알프스 산맥들이 울산의 지붕을 이루면서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주전, 정자, 강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오염되지 않은 빛깔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름 한철 스킨스쿠버로 물 속에 들어가 보면, 사이판이나 괌이 부럽지 않다.
남의 도시, 남의 나라만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사는 울산을 바로 알고 사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쓴 물을 단물로'라는 말처럼, 이곳이 척박하다고 생각되더라도 내가 사랑을 가지고 노력하면 울산은 얼마든지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수 년 내로 울산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남의 말을 좋게 합시다'가 아니라 '내 말도 좋게 합시다'로 바꾸고 내가 사는 울산을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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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위에 세월의 눈금을 매겨 놓고 사람들은 새해가 왔다고 기뻐한다. 날마다 뜨고 지는 해가 오늘따라 새로울 것도 없건만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새해 첫날의 일출을 보려고 제주도로 날아가고, 설악산을 오르고, 석굴암으로 달려간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제주 앞바다의 해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것도 아니고, 대청봉의 풍광 또한 어제와 달라질 것은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사람 마음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아니, 달라지고 싶을 뿐이다.
가장 구체적인 새해의 모습은 새 달력과 새 가계부와 새 수첩일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없다면 무엇으로 새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시간의 단위로 새해가 밝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고 사람들은 새로운 각오를 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비록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지라도 결심하고 계획하는 순간만은 진지하다.
신년 벽두에 한 해의 라이프사이클을 그려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희망적으로 보인다.
묵은 수첩의 주소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다 보면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롭다. 작년 초에 적었던 이름이 1년 사이에 이름이 희미해진 사람, 한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던 사람… 그러나 어느새 묵은 수첩에 전화번호로만 남아 있다.
거미가 자신의 체액으로 거미줄을 짜듯이 우리는 인연의 그물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그 인연의 거미줄에 얽혀 울고 웃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새해 새 수첩에 옮겨 적은 이름들을 보며 곰곰 생각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심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일까? 수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새 수첩에 변함없이 옮겨 적을 수 있는 이름이 얼마일까? 그들의 수첩에 내 이름은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누구에겐가 의미 있는 이름으로 남고 싶다. 누군가의 이름을 내 수첩에도 영원히 남겨 두고 싶다. 이 세상에 와서 그런 참인연 하나쯤은 맺어두고 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1월 1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 첫 출발을 뜻깊게 시작하고 싶어서 정초에는 언제나 산에 가리라 계획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지리산 눈등반이나, 향적봉에서 남덕유산을 잇는 능선 종주는 얼마나 장쾌할까.
그러나 번번이 나의 1월은 전혀 뜻깊지 않게 시작되곤 한다. 고작해야 묵은 수첩의 전화번호를 새 수첩에다 옮겨 적는 걸로 시작되는 소시민적인 새해 아침. 묵은 가계부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새 가계부를 펼친다. 호화찬란한 표지 그림처럼 일년의 내 살림살이가 마냥 풍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만 올해도 예년처럼 치열한 숫자와의 전쟁이겠지…
단 한 번 기억에 남는 1월 1일이 있다.
신혼 초, 집도 차도 없을 때였다. 남편은 50cc짜리 스쿠터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주전에서 정자를 거쳐 경주에 이르는 해안선을 달렸다. 엷은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는 수세미로 닦은 양은 냄비처럼 빛났고 푸르게 얼어붙은 하늘엔 간간이 구름이 흘렀다.
그런데 추령재를 넘을 때부터 흐려지던 하늘이 어느 샌가 눈을 뿌리기 시작해 우리가 통일전 앞에 이르렀을 땐 흰눈이 도로포장을 하고 있었다. 남산 팔각정 전망대까지 눈 덮인 산길을 오르며 나는 가슴에 차 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잎 진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순백의 精靈정령들.
아, 瑞雪서설.
어쩐지 올해는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고 나를 위해 축복된 시간이 마련될 것만 같다. 알 수 없는 희망이, 가능성이, 꿈이 보이는 듯도 했다.
오래오래 눈 속에 서 있다가 하산할 때는 구르듯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겨울 해는 짧아 어느새 눈바람 속으로 어둠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날씨 때문에 직선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얼마쯤 달리다 보니 눈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조금 더 달리니까 금방 또 비로 바뀌는 것이었다. 화려한 눈의 세계에서 한순간 빗속으로 急轉直下급전직하 미끄러진 느낌이었다.
온몸은 차가운 빗줄기에 흠뻑 젖었고 시린 손과 다리는 이를 딱딱 마주치게 했다. 남편의 등에 찰싹 붙어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보려 했지만 바람까지 합세한 겨울비는 살 속으로 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흠뻑 젖은 채 반쯤 얼어서 집에 돌아온 우리는 연탄 아궁이를 활짝 열어 놓고 뜨거운 물을 있는 대로 뒤집어썼다. 그 날 이후 만 사흘을 둘이 꼼짝 않고 드러누워 앓았더니 옆방에 세 든 사람들이 연탄가스 마신 줄 알고 구급차를 불렀다.
신년 벽두에 앓아 누웠던 그 해는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적금이 끝난다든지, 몇 년 후엔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겠다든지 하는 작은 꿈에 큰 희망을 가졌으므로, 다음 해 또 다음 해를 기다리는 기쁨도 컸다.
열 일곱 살 땐 도저히 내가 스물 다섯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는데 나는 어느새 중년에 들어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적금 타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매사에 적당히 만족하면서 살고 모험이나 도전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었다.
가끔 가난했던 시절의 사랑이, 꿈이, 희망이 절실하다. 뭔가 모자랐고 늘 허기졌던 젊은 시절이 차라리 치열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된다.
일생을 가난하게, 모자라게 허기져서 사는 것이 영혼의 富부를 위해서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부질없는 욕망에 들떠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면 안타깝고 서글플 때가 있다.
올해도 묵은 수첩의 이름들을 새 수첩에 옮기는 것으로 새해가 시작될까. 가계부의 화려한 겉표지에 주눅들며 한 해가 지나갈까.
아니지, 올해는 정말 겨울 지리산엘 가는 거야. 눈 덮인 능선을 따라 노고단의 운해를 보고 반야봉의 낙조에 물들어 보자.
가난했던 시절 차가운 겨울비에 뼈 속까지 적시면서도 사랑 하나로 가슴이 훈훈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그래 올해는 꼭 가는 거야.
눈 덮인 산으로.
무구한 영혼들이 하얗게 기다리는 그 곳에 가서 내 눈을, 내 마음을 헹구고 와야지. 올해의 시작은 어쩐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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