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러 산에 가긴 처음이다. 왕복 10키로,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내겐 만만찮은 거리였다.
지난 가을 이후 제대로 된 등산을 못해본 지 오래였다.
만성 허리병과 무릎 통증에 시달리면서 산을 꿈꾼다는 건 '택도 없는 사랑'
산을 완전히 접고 있다가 꽃쟁이들의 유혹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5년만에 만나는 고사목. 비바람 눈보라 견디며 저렇게 몇 년을 더 서 있으려나?
더덕인줄 알았는데 꽃쟁이들 의견은 분분했다. 만삼이라거니, 소경불알이라거니...
잎을 씹어보니 알싸한 더덕 향기가 나는데... 그냥 더덕으로 해삐까?
산친구 등자가 엊그제 키나발루로 떠나면서 하는 말,
"남들이 해외원정 갈 땐 돈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막상 내가 가게 되니까 자랑스럽네 ㅎㅎ"
자랑스럽고 말고!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체력이 있을 땐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나니 체력이 안 되네 ㅠ.ㅠ
그 많던 산친구들 모두 어디로 갔나? 문득 발을 멈추고 돌아보니 내 뒤에 아무도 없더라.
모두 각자의 길을 갈 뿐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겠지. 잠시 길동무는 될수 있어도 영원한 도반은 흔치 않아.
산친구들 떠난 자리에 꽃친구들이 다가온 건 행운이라 해야겠고.....
백두산에 핀다는 구름송이풀.
가야산 정상 부근 바위 틈에 핀 백리향.
향기가 백리를 간다는데... 중국사람들 뻥도 알아줘야 하지만 한국 사람들 뻥도 못 말리지 ㅎ
네귀쓴풀, 푸른 주근깨가 다닥다닥 앉은 그 얼굴이 앙징스럽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산정엔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다른 나무들의 간섭을 안 받고 햇볕을 맘껏 쬐어 꽃이 싱싱하고 아름답다.
산오이풀, 백리향. 진범, 긴꼬리풀, 산이질풀, 물매화까지 활짝 피어 나를 까무라치게 했다.
나도 저런 폼으로 암릉을 걸을 때가 있었지. 나도 한때 자작나무를 탔다니까!!!
물매화만큼 이쁜 나의 꽃친구, 덕분에 내 몸을 시험가동할 수 있었네.
그대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산을 접을 수도 있었는데.....
가야산 정상(왼쪽)을 보며 나는 왜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아람브라궁전이 생각났나 몰라.
기타 명곡으로 알려진 아람브라궁전 지붕이 꼭 저런 모양일 것 같은.....(난 아직 유치하다 ㅎㅎ)
바람개비같은 단풍취 꽃. 저 모델에 반해서 꽃쟁이들은 일어설 줄을 몰랐다.
산쟁이들은 산만 보고 가지만 꽃쟁이들은 꽃만 보고 간다.
덕분에 중간중간 퍼질러 앉아 쉴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 내겐 은혜로운 동행이다.
광각렌즈를 빌려준 꽃쟁이 건우아빠. 심신이 두루 건강한 사람같아 신뢰를 느꼈다.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백두대간을 종주한 아빠.
수백억대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보다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남겨주는 부모가 더 훌륭한 게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