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주능선과 통도사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조망터. 나는 왜 여기서 연암선생의 호곡장(好哭場)이 생각났나 몰라.

열하일기의 백미로 손꼽히는 큰 울음터는 요동벌판이었지만 나는 이 자리가 정녕 큰 울음터 같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어도 누구에게 들리지 않고 속이 시원할 듯한 곳, 나의 호곡장! 

 

 

 

 

 

통도사를 멀찌감치 안고 한 바퀴 도는 통도사둘레길을 2년만에 밟았다. 길은 예전보다 미끈해지고 완만해졌다.

산 속에서 MTB 동호인들을 만나 카메라가 신이 났다. 길도 좋겠다, 모델도 멋지겠다, 더 이상 뭘 바랄까.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칠정에 매여서, 한바탕 울음을 울만큼 살아보지 못한 삶은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한 생이냐.

한 번도 어린애처럼 감정이 다하도록 참된 소리를 질러 보지도 못하고 자기의 욕망에 사로 잡혀 울던 울음의 거짓이라니.

부끄럽구나, 한바탕 통곡할 만한 장소 하나 갖지 못하고 먹고 사는 일에 목매달고 사는 삶이라니.‘

 

 

 

 

너희들은 매일 울잖니? 아니, 웃는 거라고? 인간들이 가소로워 웃는 거라고?

 

 

 

 

역광의 강아지풀도 울고 있네. 아니, 흐드러지게 웃고 있네.

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질러 눈부시게 웃고 있네.

 

 

 

 

이끼낀 바위에 붙어 세찬 물줄기를 견디는 젖은 낙엽.

저리 모질게 살아 남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서바이블 게임인지도.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월재에서  (0) 2012.07.31
나는 나일 뿐  (0) 2012.03.12
한 템포 느린  (0) 2011.12.26
지리산 가을 안부  (0) 2011.10.24
햇귀  (0) 2011.10.03

 

 

코끝이 시린 날씨에 산을 올랐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고 귓볼이 빨개지는 날씨를 나는 좋아한다.

열흘 전 캐나다에서 돌아온 아들은 며칠 사이에 라식수술을 받고 학교 앞에 방을 얻어 이사도 했다.

집에 쉬러 온 녀석을 끌고 산을 오르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날이 있겠노' 싶다.

 

 

 

 

달랑 세 식구. 줄도 빽도 없지만 초라하지도 서글프지도 않다.

부부 인연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자식 인연 또한 하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에게는 말도 몇 마디 안 하는 녀석이 아버지와는 두런두런 얘기도 잘 한다.

포항제철의 역사가 어쩌구 저쩌구, 우리나라 축구가 이렇고 저렇고...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래도 나는 아들이 문학이나 예술 장르를 선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발이 땅에 닿아있어야 한다. 나는 한평생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방랑과 방황 사이를 오가며 여기까지 왔다.

 

 

 

 

살아가노라면 /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 높은 곳으로 / 보다 높은 곳으로,

쉼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조병화 '나무의 철학'>


 

 

 

아들은 대학 가면 4촌, 군대 갔다 오면 8촌, 장가 가면 사돈의 8촌이라던가.

그래도 그 4촌 8촌이 우리에겐 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사돈의 8촌이 되더라도 끝없이 사랑할 수밖에.

 

 

 

 

아이고, 어느집 아들내민지 몰라도 오늘같이 추운 날 파도잡기 하다 바닷물에 빠졌네.

철없는 여친이 크리스마스 이벤트 해달라고 하디? 대낮에 무슨 폭죽이니?

남의 아들 흉볼 거 없어. 내 아들도 아마 저런 짓 무수히 하고 다닐거라~ ㅎ

3시간 산행하고 해안으로 내려오니 바다는 하얀 뜨게실로 레이스를 만들어 백사장에 활짝 펼쳐놓았다.

 

 

 

 

동지를 갓 지난 지금은 한겨울. 그럼에도 계곡 물 속엔 봄 기운이 스며있다.

3G에 더듬더듬 다가갔더니 세월은 4G로 재빠르게 도망가고... 늘 한 템포 느린 인생이여~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나일 뿐  (0) 2012.03.12
나의 호곡장(好哭場)  (0) 2012.01.30
지리산 가을 안부  (0) 2011.10.24
햇귀  (0) 2011.10.03
돌배나무 아래 신불샘은 흐르고  (0) 2011.08.29

 

 

 

 

 

3년전 추억을 되밟아 지리산 7암자길을 걸었다. 흐린 날씨였지만 시야가 깨끗해 조망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단풍시즌이라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지만, 내 눈에 담아온 지리의 조망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문수암 부처님께 감사를, 나를 믿고 따라온 도반들께 감사를...  삼라만상에 감사를 느낀 1박2일이었다.

 

 

 

 

 

 

지리산국립공원 내에는 20여개가 넘는 사찰과 암자가 있는데 삼정산 기슭에 그 중 3분의 1쯤 되는 7개의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산 아래부터 실상사,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 영원사, 도솔암이 차례로 나타나는데 불자들에겐 성지순례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 봉정암처럼 반들반들한 길이 아니고 거친 돌길과 가파른 깔딱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고행의 길이다.

 

 

 

 

 

 

함양에서 오도재를 넘어가면 지리산조망휴게소가 나타난다. 지리 주능선이 한눈에 다가와 '헉!' 숨을 멈추게 되는 곳.

곱창같은 오도재 길에는 쑥부쟁이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여행블로거로 유명한 K씨는 서암정사를 '하늘정원'이라고 불렀다. 그의 블로그 메인 스킨이 서암정사의 가을풍경이다.

한국전쟁때 지리산에서 희생된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서암정사는 자연석 암반에 불상을 새긴 모습이 특이하다.

10여년에 걸쳐 조성된 신비한 석굴법당이  장엄한 華嚴(화엄)의 세계를 펼쳐보인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ㅠ.ㅠ)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는 벽송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았다는 유명한 절이다.

400년간 한국 불교 최고의 조정이었던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는 바람에 전소되고 말았다.

그 유명한 도인송과 미인송이 절 뒤로 우뚝한데  낮잠을 즐기는 개는 사람 소리에 눈도 떠보지 않는다. "개~뿔!!!"

 

 

 

 

 

 

 

 

 

지리산 오지 두지터의 1박은 내게 여러가지 감회를 주었다.

가락국의 왕이 신라군에 쫒겨들어와 숨어살면서 군량미를 쌓아두었다는 곳, 그래서 얻은 지명이 두지터라지.

적군에게 쫒기던 구형왕의 얼굴 위에 빈라덴과 카다피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는 법, 그러나 한번도 흥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민초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

 

 

 

 

 

 

 

 

민박집에서 한밤에 하늘을 봤더니 세상에나! 오십평생 그렇게 맑고 초롱초롱한 별은 처음 봤다. 

머리 위에 천체지도 한 장이 좍 펼쳐진 느낌이랄까. 모든 별자리들이 다 나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저 별 하나 하나는 또 다른 세계일 것이니,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우주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약한 존재란 말인가?

 

 

 

 

 

 

두지터의 상징 담배창고. 십수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처럼 좀 더 낡고 삭았을 뿐.

천왕봉 근처에서 1박하고 칠선계곡으로 내려오며 두지터를 처음 만났을 때, 저 건물은 근사한 카페였다.

차와 음악이 있던 공간에 세련된 여주인도 있었는데... 민박집 여인이 그때 그 여인인지 아닌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등산객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두지터는 지리산에서 차가 다닐 수 없는 유일한 오지다.

 

 

 

 

 

 

외풍이 심한 방에 보일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잠을 설쳤다. 새벽내내 먼데서 개 짓는 소리는 들려오고...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두지터의 아침을 떠나 도마마을로 이동했다. 삼불사를 거쳐 문수암으로 가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을 보니 스님은 벌써 내복을 꺼내 입으셨나 보다.

 

 

 

 

 

 

 

 

 

 

 

 

골재를 채취하면서 대형 석불을 함께 조성하고 있는 마천 석재 공장. 언제부턴가 초대형 불상이 유행인갑다.

교회도 대형화되고 불상도 자꾸 커지는데 세상 인심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게 아이러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수암 조망. 맨 뒤로 가야산 정상의 바위 불꽃이 선연하다.

 

 

 

 

 

 

문수암 주불 관세음보살께 3배를 올렸더니 도봉스님이 반가워라 하시며 차를 권한다.

7순의 스님은 등산용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채 천진난만한 얼굴로 무를 내오신다. 산비탈 밭에서 손수 기른 무.

속세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번거롭고 싫을텐데 살갑게 맞아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문수암 해우소 너머 산너울. 한겨울 눈 덮인 풍경이 정말 멋진데...

 

 

 

 

 

도마마을에서 문수암 들머리까지 찾아들어가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젖은 낙엽이 깔린 비탈을 치고 올라갔으니 4륜구동이 아닌 다음에야 차가 미끄러질 밖에.

진창에 박혀 미끄러운 차를 후진시켜 차분하게 안전지대로 이동시킨 옆지기. 역시 당신은 해결사야~

 

 

 

 

상무주암 스님이 가꾸는 산비탈 밭에는 갖가지 채소들이 단풍보다 이쁘다. 지리 주능선엔 겨울이 깃드는데...

 

 

 

 

 

 

3년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들어오지 말라고 가로지른 저 두개의 막대가 야속하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며 큰 소리로 떠들고 사진을 찍어대니 귀찮기도 할 것이다.

 

 

 

 

 

 

설악을 한눈에 보려면 설악이 아닌 점봉산으로 가야 하듯이. 지리산을 한눈에 보려면 삼정산이 좋다.

삼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지리 주능선 조망은 360도 산의 파노라마다. (사진 왼쪽 뒤, 반야봉)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삼정산은 뱀사골의 동쪽 산록에 해당되며

삼정산이란 이름은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하정,음정,양정이란 세 마을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하산길, 낙엽에 길은 희미하고 날은 어둑신한데 끊임없이 웃고 즐거워하는 나의 도반들.

삼불사로 하산하는 길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는데, 부처님 가피로 6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신의가 두터우면 어떤 상황도 두렵지 않다.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굳게 믿었다.

 

 

 

 

 

 

도마마을로 하산하니 아침에 길을 가르쳐준 할머니가 밭에 주저앉아 콩타작을 하고 있다.

7순의 나이에도 밭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함이 부럽고, 생면부지의 이방인을 염려하는 그 마음이 고맙다.

 

어둠이 깃든 함양 읍내로 나와 그 유명한 어탕국수를 먹었다.

민물고기를 갈아 만든 어탕에 국수 사리를 넣은 그 음식은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호곡장(好哭場)  (0) 2012.01.30
한 템포 느린  (0) 2011.12.26
햇귀  (0) 2011.10.03
돌배나무 아래 신불샘은 흐르고  (0) 2011.08.29
꽃보다 사람  (0) 2011.05.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