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부터 내 팬이었다는 여인과 겨울산에 올랐다. 오래전부터 나를, 아니 내 글을 좋아해주다니 참 고맙기도 하지.

공기 속에 살얼음이 낀듯 코가 시리게 알싸한 날씨.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한다.

긴장된 대기와 얼어붙은 바람을 헤치고 걷노라면 내 몸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나뭇가지 하나 까딱 않는데 얼굴엔 바람이 느껴진다.

 도통골 중간에서 대운산(742m)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제2봉을 거쳐 하산하기까지 5시간반.

말이 통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의 산행이란 얼마나 즐거운가. 동네 뒷산을 걷듯 편안한 마음이었다.

 

 

 

 

 

이런 저런 만남 중에서도 나는 글을 통해 만난 인연들을 각별하게 여긴다.

내 글을 보고 반했다는 사람도 만나고, 내가 반할만한 글도 만난다. 좋은 글을 만나면 작가의 다른 글을 찾아 읽게되고, 그의 팬이 된다.

하지만 굳이 사람을 만나려고 애쓴 적은 없다. 작품이 곧 인격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우리 모두 조금씩 다중인격체가 아니던가.

글을 보고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두려울 때도 있다. 그의 상상이나 기대에 내가 미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망해서 말없이 돌아서는 것까진 좋은데, 뒤에서 돌을 던지거나 음해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생각에 맞춰달라고 설득하는 사람도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넘치면 넘치는대로 봐주면 좋을텐데.

 

 

 

 

 

올해 한 사람을 잃었다. 마음 언저리에 작은 시냇물로 흐르던 사람을 먼 바다로 흘려보내기 쉽지 않았다.

노자 장자를 들먹이며 무애자유를 설파하던 사람이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걸 알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래도 참 좋은 시간들이 많았는데, 상처받은 내 마음이 안타까워 이런 저런 위로와 변명을 해봤지만 용서가 쉽지 않았다.

나만 모른척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나만 웃어주면 되는데. 아무 말없이 내가 사라져주면 되는데...

아니, 무엇보다도 내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 판단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했던가 보다.

어떤 보험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내야 인간관계가 원만한 게 아닐까. 때로는 모른척해주는 것도 지혜요 자비다.

중년들의 건배사로 요즘 '빠삐용'이 유행이라고 한다. '(모임에)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용서하라'는 뜻.

문득 나에게 주는 일갈(喝) 같아 정신이 번쩍 든다.

 

 

 

 

 

여인아, 7년 전 그 마음으로 오늘 내게 쏟아놓는 말들이 참 고맙고 이뻤다.

나이로는 내가 선배지만 인생 선배는 오히려 그대가 아닐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진심이 듬뿍 들어있는 그대, 

나만 바라보라고 고집하지 않을게. 내 방식대로 맞추라고 욕심 부리지 않을게. 내게 주는 그 마음으로 만족할게.

언젠가 내가 그대에게 실망을 주더라도 용서할 수 있기를.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할 수 있기를. 나 또한 그대에게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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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창 밖을 보니 안개가 짙게 깔렸다. 겨울 안개치고는 너무 짙다 싶어 창문을 여니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젯밤 염포산 일대에 산불이 났다는 보도를 들었는데 그럼 밤새도록 탔단 말인가? 숲을 태운 연기는 염포산 능선을 넘지 못하고 온 마을에 베일을 씌워놓았다.

날이 밝아오자 산림청 헬기들이 집 앞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 나르기 시작했다. 염포산은 우리 아파트 길 하나 건너에 있다. 정상까지 걸어서 40분.

 

 

 

 

 

밤새도록 수백명의 사람들이 불을 끄느라 아우성이었을텐데 무신경하게 잠을 자다니, 한심하고 어이가 없다.

매년 겨울 산불이 자주 나서 방화범에게 현상금까지 걸려있는데 여봐란 듯 또 다시 산불. 그것도 세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2주만에 산에 간다고 반가워라 했는데 갑자기 심란해진다. 사회가 불안하다. 지도층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봐라. 나라가 안 망하겠나.

 

 

 

 

 

내일 폭동이 나더라도 나는 오늘 산에 간다. 전쟁이 난다 해도 도망가지 않으리라. 지금 죽어도 호상 아닌가?

낙엽이 허벅지까지 쌓인 길을 걷는다. 물살을 헤치듯 낙엽살을 헤치고 간다. 그냥 이대로 나뭇잎에 묻혀도 좋겠다.

영산대학교 뒤 안적암에 차를 두고 주남계곡 따라 1시간이면 노전암에 이른다. 오늘은 노전암을 경유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1식20찬의 노전암 점심 공양.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밥상. 아니, 관심조차 없었던 절밥.

등산해서 12시쯤이면 대개 산 정상 근처에 있을 시간이니 그동안 절밥과는 거리가 멀었다. 십수년간 노전 앞을 지나다녔어도 공양은 처음이다.

짭짤한 밑반찬에다 깔끔한 나물, 신선한 해산물에다 부침개까지... 마늘 한톨 쓰지 않고 정성으로 간을 맞춘 음식에 마음의 허기까지 지웠다.

배고픈 중생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날마다 점심 공양을 베푸는 7순의 능인스님을 보고 문득 정일근 님의 시가 생각났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낮아 /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숫가락 높이 들고 /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 한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썪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떄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처럼 앉아 /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부처님 밥을 얻어먹고 밥값을 못 해서야 쓰겠나. 노전암 앞 지능선을 타고 정족산을 오르기로 했다.

코가 매운 날씨에 낙엽은 미끄럽고... 10여년 전에 딱 한번 올랐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았다. 해 떨어지기 전에만 하산하면 되겠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종교는 '편리교'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경전은 '순간경'

내 종교(생각)만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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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창 밖을 보고 등산을 결정했다. 전날 충주까지 문상 다녀온 옆지기를 깨워 배낭을 꾸렸다.

아침 노을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누워 있나. 어떻게 집에 있나. 오늘 같은 날 산에 안 가면 평생 후회하지 아마.

하양마을(밀양군 산내면)에서 운문산 남릉을 탈 거라던 산친구에게 부랴부랴 전화를 넣고 1시간만에 출발 준비 끝.

나는 초겨울 코 끝이 매운 날씨를 좋아한다. 청명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하늘, 볼 시린 바람...

 

낙엽이 너무 많은데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코스라 그랬을까, 산행대장이 길을 잃었다. 초입부터 거친 너덜을 20분 이상 오르더니

코가 땅에 닿을듯 가파른 비탈. 스틱도 소용없어 네 발로 기어 올랐다. 길 없는 길에 낙엽은 미끄럽기 짝이 없고...

 중앙능선에 올라서기까지 꼬박 2시간 이상 빨치산 산행을 했다. 근래 보기 드문 악전고투. 이젠 늙었는지 이런 고생이 싫다.

아침 노을이 참 좋았는데 산행 일진은 영 별로구만. 속으로 투덜거리다 정상 부근에서 쾌재를 불렀다.

세찬 바람이 연무를 쓸고 가버린 탓일까, 더없이 맑은 시야에 서쪽 멀리 지리산 주능선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정각산 너머 겹겹이 포개진 산그리매와 날개를 펴고 수많은 산들을 죽지로 감싸안은 듯 창공에 우뚝한 지리산.

오름길의 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영남알프스에서 저렇게 선명한 지리 주능선을 보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세상살이도 저랬으면 좋겠는데. 지리멸렬하게 살다가도 단 한번 해 뜰날 있었으면 좋겠는데.

산다는 게 재수요 복불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재수 좋아 살아 남은 날. 내가 잘 나서가 아니고, 다만 운이 좋아 살아남은 날.

스물한 살 꽃다운 청춘 하나가 제대를 하루 앞 두고 연평도에서 포탄을 맞았다. 그 건장하고 잘생긴 사나이가 왜?

운명은 왜?를 용납하지 않는다. 부르면 가야 한다. 순전히 운수 소관이다. 산다는 건 복불복(福不福)이다.

오늘 아침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고, 산정에서 지리 주능을 볼 수 있어 과분한 행복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똑딱이로 쭉 당겼더니 사진이 별로... 맨 뒤 스카이라인이 지리 주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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