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에 철쭉이 한창일 거라고, 꽃 보러 가자는 친구가 있으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
청명한 날씨, 청량한 공기, 지리산의 이틀은 맑고 밝고 아름다웠다.
언제봐도 탐스러운 반야봉의 복숭아 같은 엉덩이.
左 노고단, 右 만복대, 지리 능선의 실루엣이 미명 속에 잠겨있다.
법계사 적멸보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세존봉.
날씨는 덥고, 짐은 무겁고... 탐욕을 지고 오르는 중생의 얼굴에선 땀 비가 내렸다.
울산 출발 8시. 중산리 도착 11시반. 칼바위 지나 점심을 먹고 바로 올라쳤더니 숨이 턱에 차고 속이 메스꺼웠다.
에라, 이 우매한 중생아. 짐 줄이자는 심산으로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녀?
사진은 법계사 삼층석탑. 자연석 위에 기단 없이 탑을 올린 형태로 고려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
주능선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천왕봉 근처엔 진달래도 남아있고...
십수년 전, 내 생애 첫 지리산 종주하던 날.
15키로의 배낭을 짊어지고 17시간을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산이 뭔지도 모르고 산에 듬볐던 얼치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새벽달이 장터목에 놀러왔다.
화려한 암릉도, 놀랄만한 경치도 없지만 지리산은 넉넉한 그 품새로 수많은 사람들을 품는다.
설악의 화려한 봉우리보다 지리의 장엄한 산세가 나는 더 좋다. 설악같은 사람보다 지리같은 사람이 편안하다.
제석봉을 지날 때마다 긴머리 처녀 산꾼 얘기가 생각난다.
야간산행을 즐기던 그 처녀가 제석봉 고사목 위에 올라 새벽달을 보고 있는데 장터목에서 등산객 둘이 올라오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처녀는 등산객이 제 앞에 올 무렵 나무에서 풀쩍 뛰어내렸는데..... 남자 둘이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렸다. 귀신이줄 알고....
오늘 천왕봉엔 5월의 나무같은 청춘들이 산 아래 세상과 즐거운 교신을 나누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 정상석을 바꾸지 않는 건 참 마음에 든다.
등산객이 흘린 음식에 맛들인 다람쥐가 천왕봉 정상을 요리조리 넘나든다.
하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가슴곰도 겨울이면 등산객에게 음식을 조르는 실정이니...
지리산 풍경에 악센트를 넣어주는 구상나무 고사목.
구상나무는 반야봉 일대에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지리산 주능선에 널리 퍼져있는 편이다. 가문비나무와 함께.
해발 1900고지에 얼레지가 피어있을 줄이야!!!
남녘 산 기슭엔 3월에 피고 진 저 꽃을 6월의 지리산에서 만날 줄이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 언제 어느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에서>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국립공원 일대는 흙길이 사라지고 돌길로 포장되고 있다.
길 가에 포기포기 야생화가 피어있던 옛길이 그립다.
국토의 70%가 산이라지만, 큰 산에 와보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90%가 산 아닐까?
미명의 산 그리메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장터목산장에서 1박하고 제석봉에서 일출을 만났다.
천왕봉까지 왕복 2시간 거리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꼭 천왕봉에서만 일출을 봐야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제석봉 고사목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고사목이 없다면 지리산에서 제석봉은 아무 매력 없는데...
아침 햇살에 서서히 살아오르는 6월의 지리산.
고산지대 특유의 청량한 공기 덕분에 밤잠을 설쳤는데도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철쭉과 고사목이 어우러진 풍경. 그 뒤로 겹겹이 이어지고 포개지는 산 그리메.
산이 날 에워싸고 /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박목월>
서쪽으로 (중산리-천왕봉-장터목-세석-거림) 진행하는 동안 반야봉은 시야에서 떠나질 않고...
붉은 철쭉보다 연분홍 철쭉을 더 좋아하는 저 친구. 그 마음도 아직 연분홍일까.
개구리 한 마리가 바위에 납작 엎드려 있다. 푸른 하늘로 멋지게 도약할 듯한.....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을 제법 만났다. 지리산 종주에 나선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대간꾼도 더러 보였다.
배낭 보면 감이 온다. 저 사람이 날나린지 산꾼인지 산귀신인지.
무거운 카메라 메고 지리산에 덤비다니, 니캉 내캉 간이 부었나보다.
산장에서 날밤새고, 뒷날 일출 보러 갔다 오고... 지친 기색도 없이 잘도 걷더라.
떨어진 꽃잎을 밟기 미안해서 발 끝을 놓기 어렵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
귀룽나무 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날려 땅을 뒤덮은 구간도 있다.
세석평전 부근, 산자락을 노랗게 수놓은 동의나물. 그 속에서 마지막 처녀치마 한 떨기도 만났다. 야광나무 꽃도 활짝, 왜갓냉이 꽃도 활짝.
산길에서 만난 꽃들은 먼 길에 지친 발을 가볍게 해준다. 나도 누군가에게 산길에서 만난 꽃이 되어줘야지. 암, 그래야지.
마지막 진달래가 나도 좀 봐달라고 해시시 웃고 있다. 저 아래는 마천, 백무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아스라한 정상. 사는 것도 때론 그렇지. 지나고 보면 어떻게 살아냈나 싶은 것이...
연분홍 철쭉과 초록의 숲에 에워싸인 세석대피소. 휘파람새가 따라오며 울었다. 있다 가요. 놀다 가요. 꽃이 이리 좋은데!
바래봉은 바래봉대로, 황매산은 황매산대로, 저마다 철쭉의 매력이 다르다.
빛깔이야 그쪽 꽃들이 화려하지만, 아늑한 평원에 넓게 펼쳐진 세석 철쭉은 지리산만의 매력이다.
넷이 가기로 했다가 단둘이 갔다. 저 친구마저 기권했더라면 나 혼자 다녀올 수 있었을까?
엄마 생각에 대원사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저 물 속에 엄마랑 함께 몸을 담그고 놀았는데. 그때 엄마의 표정까지 눈 앞에 선한데.
그 맑고 깨끗하던 물, 폭포 소리를 내며 흐르던 물...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오다가 우리를 마중나온 제부(우리집 셋째딸 남편)를 만났다.
지리산 야전사령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부는 모처럼 처형에게 봉사할 기회가 생겨 즐거워하는 눈치다.
중산리까지 제부 차를 타고 가다 점심도 얻어 먹고 내친김에 대원사 갈림길까지 에스코트도 해주고... 이래 저래 즐거운 지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