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웃 한 분이 양산에 일 보러 오셨다기에 시간 맞춰 함께 산에 들었다.

천성산 공룡능선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내 블로그 제목에 들어있는 '금봉암'도 둘러볼겸.

늦가을 천성산은 이제 서서히 동안거에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온라인으로 맺은 인연들이 현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애착이 간다.

혈연 지연으로 맺어진 피상적 인연보다 공감과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벗들에게 마음을 더 주게 된다.

세수 안한 얼굴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전가하지 않는...

좀 친해졌다고 해서 원치 않는 충고만 늘어놓지 않는다면 온라인 인간관계도 무난하지 싶다.

 

 

 

 

 

빈 암자에 발 소리를 죽이며 들어섰다가 쟁반 위에 핀 차꽃에 마음을 빼았겼다.

삐그덕~ 다실 문을 미는 소리에 지윤스님이 나오셨다. 아차, 소리내지 말고 살짝 다녀갈 걸...

스님은 참선에 드셨다가 바깥 소리에 깨셨을 거라. 문 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거라. 

(나 여기 있다. 속인들아, 삿된 생각일랑 말아라.)

제가 누굽니다 하면 모르실 것도 아닌데 참선중인 스님을 흔들어놓은 게 죄스러워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언젠가처럼 화엄벌이 한눈에 보이는 다실에 앉아 햇살을 등에 쬐며 차를 나눌 수 있는 날이 또 있을 게다.

 

 

 

 

 

손님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금봉암이 어떨지 나는 모르겠다.

하마 20여년 전,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던 그 옛날 금봉암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 썼던 졸고를 다시 올린다.

 

 

 

 

 

내 마음의 금봉암 / 배꽃

 

키 낮은 산죽이 정답게 몸을 비벼대는 산길을 걷는다. 하늘로 쭉쭉 뻗은 낙엽송 숲도 지나고, 천태만상의 인간 세상처럼 잡목이 우거진 길도 걷는다.
산을 오르면 어느새 가슴속에 알 수 없는 희열이 차 오른다. 티끌 세상 온갖 잡념은 점점 잊혀져 가고 산에 머무르는 그 순간만은 나도 자연이 된다.
언제나 저항 없이 나를 받아들여주는 산이 좋아 틈만 나면 산에 간다.다 버리고 싶으면서도 끝내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산은 말없이 포옹해준다.
「산은 말없음표로 억 년, 사람은 느낌표로 일 년」
내원사를 품에 안은 천성산, 하산 길에 들렀던 金鳳庵금봉암의 어느 하루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마른 잎이 수북수북 쌓인 비탈길을 낙엽스키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던 길에 만났던 암자.

통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으로 벽을 바른 작은 암자에는 碧栖籠벽서롱이라는 낡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인기척을 내도 소리가 없는 것이,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것일까?
햇살이 놀고 있는 작은 쪽마루가 앉기를 권하는 듯했지만 임자 없는 집에 선뜻 들어서기가 망설여져 주춤거리고 있는데, 신발장 위에 하얀 종이가 눈에 띈다.
'쌀은 부엌에 있고, 물은 암자 뒤에 있습니다. 먼 길 오셨으니 따끈한 차 한잔에 쉬어 가십시오.' 집주인의 필적 끝에는 두어 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추신으로 군불을 때면 방이 아주 따뜻하다는 말과, 녹차는 벽장에 넣어 두었다는 말까지 곁들여 있었다.

그리고 스님의 편지 옆에는 등산객들의 필적으로 보이는 편지 네댓 장이 나를 새로운 감동에 젖게 했다.
'등산길에 잘 쉬어 갑니다. 인연이 있어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비가 와서 스님 우산을 잠시 쓰고 갑니다. 맑은 날 돌려드리러 오겠습니다.'
'인도 가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부디 좋은 여행되시고 성불하십시오."

금봉암 빈 암자에는 듣는 사람 없는 얘기가 편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사람의 발길이 쉽지 않은 곳. 집주인은 문도 잠그지 않고 길을 떠났다.
오가는 사람이 쉬어 가라고 다구를 가지런히 차상 위에 올려놓고서. 그 믿음이 고마워서 누군들 나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집주인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는 찻물을 끓였다. 작설차를 마셨다.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 먼 계곡의 물소리. 어린 새들이 가늘게 칭얼대는 소리…
기우는 햇살도 잊어버리고 나는 금봉암에 마냥 앉아 있었다.

보름달이 한 번 떴다가 졌다. 산은 완전히 알몸이라 좋았다. 숲이 우거졌을 때는 산의 몸매를 볼 수 없지만, 옷을 벗어버린 겨울산은 산세를 확연히 드러낸다.
숨어 있던 바위와 골 깊은 계곡, 장쾌한 능선까지. 두 번째의 천성산 등반에서 나의 일행은 내원사에서 결재 중인 스님 두 분을 만났다.

도시락을 먹고 더운물을 마시던 중에 지나가던 두 비구니를 만나 인사를 나눈 것이다.
해맑은 얼굴의 童顔동안에 티없는 표정의 묘수스님은 금봉암에 군불 때러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비워 둔 암자지만 가끔 가서 청소도 하고 불도 지펴야 한다고.
우리는 금봉암의 내력을 얘기 들었다. 내원사의 부속 암자로 신라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토굴을 보수해 지은 작은 암자.

암자 뒤로 산을 조금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그 바위 속에서 석간수가 흘러 나와 식수로 쓰이는 곳.

금봉암 스님이 인도로 떠나기 직전에 어떤 여인이 암자를 찾아와 머리를 깎겠다고 하더란다.

자신은 속세에 염증을 느꼈으며, 미련도 후회도 없이 수도승이 되어 평생을 혼자 살고 싶다고 눈물로 애원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가만히 그녀를 달래어 부엌에서 공양주 일이나 거들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라고 타일렀다 한다.
아무 말 없이 며칠을 잘 지내던 그 여자는 그러나 닷새도 견디지 못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속세에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남았을까. 아니면 두고 온 인연들이 그리웠을까.

산사에는 가끔 머리를 깎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대개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는 경우가 많단다.
修道人수도인은 어떤 사명감을 띄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묘수스님은 말했다.
속인들은 현실을 도피해 산 속에 와서 일시적인 위안을 느낄 따름이지만 스님들은 수도생활이 자신의 운명임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다 받아주고 말없이 그 자리에 선 산처럼 수도인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세상살이 힘겨울 때마다 어디 절에나 들어가 숨어 살아볼까 하고, 마치 목가적인 생활을 꿈꾸듯 쉽게 얘기하던 일들이 부끄러워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 몫의 운명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는 왜 갖지 못했을까?

남의 포켓 속에 든 행복을 훔쳐보며, 언제나 덤으로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모든 걸 버리고, 또 잊어버리겠노라고 산사를 찾아왔다가 며칠을 못 견디고 떠나는 사람들. 나도 결국 그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일 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뜻 깊은 얘기를 나누고 우리는 음력 열 엿새 달을 보러 금봉암으로 오마는 약속을 했다.
인적 끊긴 암자의 대나무 평상에 앉아 만월을 완상하는 것도 운치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속세 사람, 더군다나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줄 것인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는 정월 열 엿샛날 금봉암을 찾았다.
겨우내 산비탈을 굴러온 낙엽이 수북수북 쌓인 길을 밟고 금봉암에 들어서니 활짝 열린 문이 우리를 반긴다.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루는 이제 막 닦은 듯 윤기가 돈다.
'군불을 지폈으니 따뜻한 방에 쉬어 가십시오. 저희는 공양주라 저녁 지을 시간이 되어 내원사로 돌아갑니다. '바삐 쓴 글씨 끝에는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었다.
좀 일찍 올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신발장 위를 보니 그 사이 또 두어 장의 편지가 적혀 있었다.

'마음이 괴로워 들렀다가 하룻밤 묵고 갑니다.'
'우산 갖다 드리러 왔습니다. 스님 오시는 대로 부산에 들러 주십시오. 전화 0000.'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산 속.
주인을 향한 대화는 오로지 편지로만 가능할 뿐인데, 불확실한 수신에 기약 없는 발신을 믿는 그들은 얼마나 선량한 사람들일까?
매캐한 연기가 스며드는 금봉암 군불 땐 방에 앉아 우리는 차 한잔을 마셨고 촛불을 밝혔다.
밤이 깊어지자 물소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달빛은 기어이 촛불을 껐다. 가만히 암자를 벗어나며 나도 한 장의 편지를 써 두었다.
'티끌 세상 때를 조금이나마 벗고 갑니다. 세상살이 힘겨울 때마다 다시 오겠습니다.'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엽살을 헤치며  (0) 2010.12.13
과분한 행운  (0) 2010.11.29
끝물  (0) 2010.11.14
만추의 차마고도  (0) 2010.11.09
주왕산 절골, 묵은 추억 속으로  (0) 2010.10.28

 

 

 

끝물 단풍 속으로 한 남자가 가고 있네. 곤고한 세상살이에 몸피가 더욱 줄어든 내 남자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소 떨어지는 나뭇잎, 이와 같이 우린 가리라. 허공으로 낙하하는 저 나뭇잎처럼 가비얍게 떠나리라.

마지막 정염이 타오르는 11월의 숲. 내 남자도 나도 11월의 생을 살고 있구나.

 

 

 

                                                                                                                                                        <11월13일 천성산 공룡능선에서>

                    

 

표충사 앞 매바위마을에 가면 '신랑한테 잘 하소' 할머니가 있다.

사람 그림자만 보이면 달려와 말을 붙이는 그 할머니, 혼자된 지 오래인지 사람이 무척 그리운갑다.

"새댁들아, 신랑한테 잘 하소. 참말로 잘 해야 된다 카이~" 눈물마저 글썽이며 당부한다.

8순 노인에겐 새댁으로 보이는 내 나이가 부러운 걸까, 든든한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게 부러운 걸까.

사람을 잃어본 사람만이 사람 귀한 줄을 알지. 그래서 자신에게 이르듯 다른 사람에게 당부하는 거야. 신랑한테 잘 하소!!!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분한 행운  (0) 2010.11.29
금봉암 Once more  (0) 2010.11.23
만추의 차마고도  (0) 2010.11.09
주왕산 절골, 묵은 추억 속으로  (0) 2010.10.28
아침가리 단풍멀미  (0) 2010.10.24

                                                

                                                                                                           <11월6일>

 

한 주일 사이에 산색이 완전히 변했다. 지난 주 그 시간 그 자리에 다시 서본 차마고도.

단풍은 절정인데 연무가 베일처럼 드리워 답답하다.

 

 

 

                                                                                                                                                                                <10월31일>

 

단풍이 다소 일렀지만 시야가 맑았던 지난주. 그러나 빛이 없어 쨍한 사진을 얻을 수 없었다.

한 자리에 앉아 30분을 기다렸는데 햇살은 기어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도도한 녀석 같으니라구.

 

 

 

 

 

 알고보면 세상사가 다 그런지도 몰라. 단풍이 좋을 때는 시야가 안좋거나, 시야가 좋은 날은 단풍이 일러.

단풍 좋은 날 빛도 좋은 자리에 설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가파른 산길을 서너시간 올라야 갈수 있는 저 자리에.

아서라, 시절인연 만나기가 그리 쉬운가. 마음 비우고 가다 보면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행운 같은 게 있겠지.

 

 

 

 

 

나이 들수록 순리(順理)를 생각하게 된다. 어거지로 살아온 세월이 후회스러울 때도 많다.

이제 내 앞으로 오는 건 내가 다 받아야지. 왜 내 몫이 이것 뿐이냐고 항변할 나이는 지났으니까.

 

 

 

 

 

 영험스러운 관음봉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역광의 실루엣에 연무까지 끼었으니.

살다 보면 그런 날도 많더라. 눈 위에 얼음 얼고, 그 위에 칼바람까지 휘몰아치는 날이. 눈 앞이 휘뿌연 날이.

 

 

 

 

 

지장전 문을 활짝 열어놓고 노스님은 아침 일찍 빨래를 하셨나보다. 해진 승복과 내의 한벌이 절 살림을 말해주는 듯하다.

9부 능선 절벽 위에 오두마니 깃든 암자에서 긴 겨울을 묵언수행하실 스님.

산다는 건 거룩한 일이다. 참 거룩한 일이다.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봉암 Once more  (0) 2010.11.23
끝물  (0) 2010.11.14
주왕산 절골, 묵은 추억 속으로  (0) 2010.10.28
아침가리 단풍멀미  (0) 2010.10.24
가을 눈밭에서  (0) 2010.10.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