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없는 복사꽃 상사병에 걸려 / 눈부신 햇살에 뒤틀리고 있다 / 모두 홀랑 벗었다

                                                                                                  <이생진 '홀랑 벗은 복사꽃>

 

 

 

 

 

숨이 멎을 듯했다. 홀랑 벗은 복사꽃을 보고 반색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밀한 욕망을 밝은 햇살 아래 거리낌없이 드러낸 저 솔직한 도화살(煞).

그 몰염치한 개화에 반해 한 시간 넘게 나무 곁을 맴돌았다. 너를 어쩌면 좋으냐, 어쩌면 좋으냐. 

 

 

 

 

돌아서서 새실새실 웃기만 하던 계집애 / 여린 봄날을 후리러 언제 집을 뛰쳐나왔는지 

바람도 그물에 와 걸리고 마는 대낮 / 연분홍 맨몸으로 팔락이고 있네

신산한 적막강산 / 어지러운 꿈자리 노곤히 잠드는 / 꿈 속에 길이 있다고

심란한 사내 달려가는 허공으로 / 언뜻 봄날은 지고 / 고 계집애 잠들었네 <홍해리 '복사꽃 그늘에서>

 

 

 

 

 

한 달 반만에 산에 갔다. 다친 무릎 시운전 삼아 조심조심 계곡길로만.

노란 피나물이 꽃 퍼레이드를 벌리고 있는 한듬계곡, 어제 내린 비로 숲은 더욱 청신해졌다.

 

 

 

 

저 아래서 몇 송이를 발견하고 사진 찍는데 10분, 더 올라가다 한 무더기 보고 찍는데 또 10분.

좀 더 올라가니 아예 길 양쪽으로 피나물 숲이다. 꽃에 엎어져서 발 빠른 일행들을 먼저 가라고 보내길 몇 번.

산벚꽃이 바람에 소소 날리는 숲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내가 본 산색이 저 빛깔 맞나? 카메라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구름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햇님 때문에 4월의 숲은 연두가 되었다가 초록이 되었다가 겨자색으로 변신한다.

 

 

 

 

올 봄엔 진달래도 제대로 못봤는데 느닷없이 철쭉을 만났다. 계절은 나를 앞질러 저만치 가고 있구나. 세상이 나를 앞질러 가듯이.

엎드려 사진을 찍다가 뱀 한 마리를 만났다. 녀석, 어제 비 맞고 몸 말리러 나왔나 보다.

 

 

 

 

뱀딸기꽃도 지천으로 피어있네. 경상도 말로 '천지 삐까리'로

 

 

 

 

지난 겨울 썰매를 탔던 곳인데... 역시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는 거였어.

 

 

 

 

나물 뜯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밭둑에서 산비탈에서 열심히 나물을 뜯어 한 배낭씩 지고 내려간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할줄 모르는 한심한 예편네. 황매가 날 보고 빈정대는 듯하다.

 

 

 

 

나이는 어디로들 드셨는지. 연두색 숲처럼 발랄해 보이는 우리편.

나보다 3시간 더 걷고도 나보다 먼저 하산지점에 와 있던 사람들... 나는 그저 '깨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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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보려고 새벽같이 나선 길, 자욱한 연무가 하루종일 시야를 가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지리산 최고 전망대라는 금대산 삼봉산과 더불어 또 하나의 전망대로 꼽히는 법화산(法華山, 992.4m).

희붐한 여명의 고속도로를 달려 엄천강이 발 아래 누워있는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상마을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사진은 하산길 도정마을 쪽에서 본 함양 독바위(왼쪽)와 천왕봉 실루엣, 안타까운 조망이다.

"봄 날씨가 꼭 이렇더라. 시야가 없어서 오늘 산행 꽝이네!' 투덜거렸더니

"발 밑이 질척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남편이 대꾸한다. 하긴, 봄산이 이 정도면 호강이지.

얼었던 산이 녹으면서 발 밑에 흙덩이가 달라붙으면 처치곤란인데 근심같은 그 흙덩이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부정보다는 긍정. 없는 걸 탓하기 보다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함양 독바위 아래 포근하게 깃든 세동마을 다랑논>

 

 

대기는 봄이지만 산야는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라한 나목들 속에 봄물은 오르고 있겠지만...

능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자꾸 사진을 찍어준다며 이리 서봐라 저리 서봐라 채근한다.

"카메라 좋은 거 갖고 계시네요." 인삿말로 건넸더니 "이게 본체만 350만원짜리여. 렌즈는 더 비싼거여~"

"예에... 어쩜 그렇게 비싼 카메라를 다 갖고 계세요? 부럽네요..." 좋은 일하는 셈치고 립서비스를 해준다.

나중에 그가 찍은 사진 정보를 보니 메뉴얼은 한장도 없고 전부 프로그램 모드다. 그 비싼 카메라로... 아깝다.

  

해발 천미터에 오르면서 히말라야 원정대처럼 입고 온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크트릭스를 비롯해 해외 유명 브랜드로 온몸을 휘감은 사람들, 모자부터 등산화까지 견적내면 기백만원이다.

지 돈 지가 쓰고 다니는데 누가 뭐랄까만, 십여년째 헌 배낭 메고 다니는 남편과 많이 비교된다.

새 배낭을 두고도 기어이 헌 배낭을 메고 나서는 남편이 야속할 때도 있다. 남들 눈에 '없어 보이는 것'같아 싫다.

나는 아직도 하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영원토록 하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일본 지진 소식 때문에 썩 마음이 편치 않은 하루였다. 자연재해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법화사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며 여쭈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겁니까?

 

암병동에서 남편과 함께 죽음에 맞서고 있는 P언니를 생각한다. 혈액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고 몇달째 입원중인 남편.

옆 병실에서 죽어 나가는 환자들을 수시로 보며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두 내외는

병실에서 마주보이는 영안실에 엠블란스가 드나드는 걸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단다.

"여보, 오늘 영안실에 들어온 사람은 아주 젊대요. 아이들도 아직 어리대요."

"그래, 우리 애들은 다 컸으니 그나마 다행이재."

언제 덮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서 그렇게 의연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신기하다.

"내가 저 사람 죽는 거 허락 안 할거야.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두고봐. 내가 운명과 맞붙어 이길 거야!"

언니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그래요 언니. 절대로 지지 말아요. 긍정의 강한 힘은 부정을 물리친대요.

 

 

 

 

 

봄 농사가 시작된 들에는 흙냄새가 고소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새 희망을 심는 사람들. 저들은 아마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를 찾아낼 것이다.

 

 

 

 

 

오르막에 엉치뼈가 무거운 것이 아무래도 산을 접을 때가 된것 같은데, 무릎이 부어올라 산을 끊어야 하는데...

이번이 마지막일까, 아니면 요 다음일까... 때로는 절망하며 때로는 오기를 부리며 산을 오른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걸으면 되겠지... 암만~

(사진은 그 비싼 카메라가 찍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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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보러 갔더니 꽃은 하마 지고, 시든 꽃잎만 뭇사람들 발길에 밟혔더라.

어즈버 눈꽃이여, 푸른 하늘에 산호처럼 피어있던 그 눈꽃이여. 내가 가면 언제라도 활짝 피어나지 싶었더니

낙심천만 하산하는 내 발걸음이 쇳덩이보다 무거웠니라.

 

 

 

외로운 내 그림자가 국망봉을 거쳐 구인사로 이어지는 소백의 주능을 담고 있네.

일행을 뒤에 두고 점심도 굶은채 허위허위 올라온 보람도 없이 정상엔 세찬 바람만 휘몰아쳤지.

소백산 똥바람은 여전하더만. 삽시간에 온 몸이 얼어붙고 사지가 경직되는 강추위. 나는 채 5분을 견디지 못했네.

 

 

 

캄캄한 새벽 별빛에 길을 물어 죽령에서 연화봉까지 입 한번 떼지 않고 걸었던 적도 있었고

비로봉을 내려서다 눈폭풍에 휘말려 구르다시피 걸었던 적도 있었네.

단양 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이 겨울 소백의 참 모습인데, 올 겨울 소백은 없다.

 

 

 

비로사 들머리부터 하마 맥이 빠지더라만, 주능선에는 설화가 만발했으리라 상상하고 걸었지 뭔가.

한해 한해 낡아가는 몸을 채근하며,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몇 년 더 써먹을 거 아니냐고 이를 앙다물었는데

꿈은 그저 꿈 자체로 아름답고 기대는 또 기대 자체로 아름다운 것. 눈길 11km를 어떻게 걸어왔나 몰라, 눈꽃도 없이 지루한 길을.

 

 

 

어젯밤 자정 무렵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생각하네.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핸드폰 주소록에서 내 이름이 맨 앞에 있어서 위로가 된다는 그녀.

드라마를 보며 울다가 내 전화번호를 눌렀다고, 언니가 있어서 참 좋다고... 아, 누구에겐가 위로가 되는 이름이라니!

나도 회신을 했다. '난 언제나 니 편이야. 넌 잘 될 거야. 행복하지 않으면 억울한 인생이잖아.'

 

 

 

나도 누군가에게 축원 받고 싶어. 내가 사랑한만큼 사랑받고 싶어. 진심을 거절 당하긴 싫거든.

겨울 소백의 똥바람을 맞고 정신이 번쩍 나네.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대로 내가 남을 대접했는가?>

 

 

 

화투라면 /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 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 패를) /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주제에 /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 데도 / 도무지 홍도의 순정으로 /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 패가 아닌 세상 / 잊어야 하는 데도 /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 당신은 분명 / 내 생애 최악의 똥 패인지 모릅니다

                                                                                                      <박이화 '똥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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