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을 다시 만난 게 얼마만인가.

 불편한 몸을 버스에 구겨넣고 한밤을 달려 만나곤 했던 산이다.

죽령터널과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4시간으로 단축된 거리를 사뿐히 날아온 트라제와 SM7.

죽령터널을 넘자 설경이 펼쳐져 간밤에 눈이 내렸다는 걸 알았다.

'긴 터널을 지나니 온통 눈의 나라였다.'로 시작되는 소설 '설국'이 떠오른다.

 

  

교주님이 점지하신 새밭골(을전)은 사람 발길이 드물어서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성을 좇아 비로사 희방폭포 코스를 선택하기 때문에 새밭골의 아침은 고요 그 자체였다.

지난밤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다 깨다 선잠을 잤는데 이외로 날씨는 포근하다.

은행 털러가는 갱처럼 복면까지 두르고 출발했으나 올라가면서 하나씩 벗었다.

 

 

완만한 오름길에서 워밍업, 나무계단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설경이다.

묵은 눈이 아닌 새 눈이라 신선하다. 눈도 새 눈이 좋은데 사람도 새 사람이 좋을라나? 늘 산뜻하고 새로운 맛을 주는 사람.

나뭇가지엔 온통 상고대가 피었다. 그것도 방금 만들어진 상고대가 활짝.

'상고대'의 '상'이 서리(霜)인줄 알았는데 순수한 우리말이란다. 미루어 짐작하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이판 섬의 산호가 저리도 아름다울까, 아니면 푸켓 섬의 산호일까. 미스김이 사는 팔라우의 바다 속이 저리 아름다울까.

순록의 뿔도 만져보고 엘크사슴의 뿔도 만져본다. 그러다 기어코 입안에 넣어 본다.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상고대 맛은 흙 냄새와 나무 냄새가 느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들이 땅의 냄새를 안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마법의 숲을 유영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와~우! 이 순간을 영원히~~~

행복의 정의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름다운 걸 많이 볼수 있는 것도 행복이 아닐까.

오늘 눈 내린 숲길을 함께 걸어가는 님들과 함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너그러이 이해하는 사람들. 산을 닮아 넉넉하고 어질고 평화로운 사람들.

 

 

 

 

 

 능선에 올라서기 전에 완전무장하라는 교주님의 엄명이 내리셨다. 후덜덜 떨린다.

소백산 칼바람을 익히 아는 터라 더욱 공포스럽다. 이겨낼 수 있을까, 내 불완전한 몸이.

"옷 단단히 입으세요. 저쪽 동네는 딴세상이에요. 여기는 봄날이에요."

내려오던 사람이 하는 말에 더욱 기가 죽는다. 비로봉 쪽은 살인적인 바람이 휘몰아치겠지. 으~~~덜덜덜.

 

 

 정상공격조는 눈바람 속으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국망봉쪽으로 들어섰다. 정상 700미터 앞에서.

능선엔 눈이 제법 깊다. 시야가 트이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조망, 비로봉은 운무 속에 잠겨있고.

비로봉, 연화봉... 소백산에는 불교와 연관된 이름이 많은 것 같다. 비로자나불과 연화좌대. 

신선봉은 도가에서 연유된 이름이고, 국망봉은 마의태자의 눈물이 담긴 이름, 상월봉은 무엇일까?

 

 

 

 

풍경에 취해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하느라 시간이 자꾸 지체된다. 주범은 나와 우향이다.

희뿌연 눈바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이 은총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에 산호초가 일렁거린다.

눈에 담고 가슴에 담으면 되는데 증거를 남기려고 자꾸만 카메라를 꺼낸다.

 우리가 언제 다시 여기 서보겠나, 언제 또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만날 수 있겠나. 암묵적으로 서로 공감하고 있었다.

결국 그 때문에 늦은맥이재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국망봉에서 바로 내려가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고, 심설산행의 진미를 누린 즐거운 빌미가 되었다.

확신도 없이 눈 덮인 계곡길로 내려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지만

다년간 산을 누비고 다니며 본능이 산에 적응된 사람들이 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기로에 서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리라.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탄성이 터진다.

북쪽 사면이라 눈이 나뭇가지에 그대로 남아있고 땅에 쌓인 눈도 날것 그대로다.

반질반질한 눈길이 아닌 우리가 처음 밟는 길. 처녀림에 들어선 듯 흥분을 가눌길 없다.

장난스럽게 밀치며 나둥그라지며 노루처럼 토끼처럼 산새처럼 의의계곡을 타고 내려왔다.

꿈이 아닐까? 아침에 본 몽환적인 설경도. 푸른 하늘에 일렁이던 산호도, 지금 걷고 있는 푹신한 이 눈길도.

 

 

군데군데 얼어붙은 계곡을 살얼음 딛듯 조심스레 지났다.

"크레바스 조심! 빠지면 자일이 없어서 못 건져준다!"얼음에 뚫린 구멍을 보며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우향 머리카락으로 자일 만들면 되잖아요." 긴장을 유머로 풀어가며 얼어붙은 계곡을 건넌다.

동화 속의 라푼첼이 생각난다.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타고 성으로 올라간 왕자님은 가시밭에 떨어져 시력을 잃었지.

 라푼첼의 눈물로 되살아난 왕자님. 사랑과 용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묘약인 게야.

 

 

장장 8시간의 산행을 끝내고 새밭골로 돌아오니 해가 설핏 기울었다.

무릎 부상 이후 8시간 산행은 기록갱신이다.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심설산행을 날씨 덕분에, 일행 덕분에.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이렇게 멋진 사람들을 만나나.

차에 오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눈 내린 마법의 숲이 연신 눈 앞에 어른거렸다.

지난 한해의 악운을 소백산이 말끔히 치유해주는 느낌이었다.

 

 

 

 

<사진은 3인 합작(질고지님, 우향님, 그리고 이화)>

 

 

  <비로봉-국망봉 갈림길에서 // 산행 중에 만난 단양 산꾼이 찍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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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영장에서 왠지 몸이 무겁다 했더니 저녁 무렵부터 재채기가 터지기 시작했다.

내일 산에 가야 하는데... 날씨 춥다는데... 잠은 안 오고... 어쩌지 어쩌지... 밤새 뒤척였다.

그러나, 지난 주 지리산으로 혼자 내뺀 게 미안해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지끈지끈 맹맹, 아무래도 감기란 넘이 덤벼든 것 같다. (감기야, 너 본지 참 오래다.)

 

 

원동천을 끼고 달리다 함포마을 지장암 쪽으로 올라가 물맞이폭포를 만났다.

예상보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다.

원동천이 흘러 낙동강과 만나는 풍경, 그리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그러나 오늘은 그 풍광에 깊이 심취할 수가 없다. 몸이 오슬오슬 춥고 콧물이 흐른다.

 

 

토곡산은 영축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온 능선 끝에 있어 영남알프스 종주의 기점이나 종점이 되곤 한다.

원동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넓고 큰 산, 암릉도 많아 다소 거칠고 험한 편이다.

바위산으로 유명한 용골산과 매봉으로 이어지는 종주 코스가 토곡산 등산의 백미로 꼽힌다.

근육질의 남자처럼 우람하면서도 풍광이 아름다워 여성적인 맛을 지닌 산이다.

 

 

서북능선을 밟은 게 서너 번쯤 되나보다.

발 아래 굽이치는 낙동강을 보는 재미로 비교적 토곡산은 자주 오게 되니까...

그러나 어느 때보다 오늘 산행은 힘들다. 고관절이 결리고 다리가 안따라올라온다. 천근만근이다.

모처럼 동반산행인데 웃는 얼굴로... 웃는 얼굴로... 최선을 다한다.

(제발, 무사하게 끝내도록. 쓰러지지 않도록... 신음 소리 안 내도록.)

 

 

몇년 전만 해도 사람 발길이 뜸하던 서북능선에 길이 반들반들 나 있다. 길은 수월해졌지만 걷는 재미는 덜하다.

정상 20분 전에 등자표 떡국으로 점심을 먹는데 나무잎을 씹는 것 같다. (먹어야 해. 먹어야 걸어. 먹어야 살아.)

등에선 식은 땀이 흐르고 머리는 지끈지끈, 정신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허방을 짚을 듯하다.

점심 먹으며 외친 오늘의 명언 한 토막. '미워하면서 닮아가고, 싸우면서 정든다.' 부부가 그렇다는 얘기다.

 

 

창원에서 온 가이드 산행팀을 만났는데 어디로 내려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가고 있단다.

참, 나도 한때는 저랬지. 산 이름만 보고 따라다닐 때가 있었지.

오로지 앞만 보고 다닐 때가 있었지. 어쩌면 그때가 더 순수하고 용감했을까?

  

 

너무 힘들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래도 웃는다. 속으로 끙끙 앓는다.

정상까지 3시간 이상 걸렸는데... 아, 2시간만 더 참자. 2시간이면 안 내려가겠나. 추락만 조심하면 되겠지.

사명감에 이빨을 앙다문다. 오슬오슬 추워서 거위털잠바를 벗을 수가 없다. 

 

 

석이봉 쪽 하산길, 그 아래 빛나는 낙동강.

그러나 내 다리는 더욱 휘청거리고 발길마저 허둥댄다.

쉬어갑시다~~~ 마침내 낙엽 위에 누워버렸다. 아, 이대로 둥둥 떠내려갔으면 좋겠다.

 

 

죄책감과 채무감으로 무장한채 산에 온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으려나.

  자신이 썩 가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남편에게 부실하다는 것에 나는 늘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갖고 있으면 되는데  아무한테나 솔직하게 말 하다 보니 남들도 모두 나를 부실하게 보는 것 같다.

너무 솔직하면 늘 손해본다. 아무래도 나는 위선보다 위악적이다. 적어도 가정사에 대해서는.

오늘 등산을 지리산에 대한 면죄부로 생각하고 온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며칠 전에 영화관 앞 매점에서 만난 어떤 아가씨가 생각난다.

"롯데백화점을 폭파시켜버릴까요?" 멀쩡한 행색으로 카운터 앞에 서서 영화 대사를 외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던 그 여자.

종업원이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자 짙은 선그라스를 살짝 치켜올리며,

"아니면 현대백화점을 폭파시켜버릴까요?" 재치있는 종업원이 이내 손을 저으며 "아니, 폭파시키지 마세요."했더니

세련된 옷차림의 그 젊은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햅버그 하나를 먹고 나갔다.

과대망상증 환자일까?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미치지 않고 살고 있는 우리들이 비정상 아닌가 몰라.

그 여자 얘길 하면서 하산길에서 미친듯 웃어제꼈다. 남들이 보면 실성한 것으로 보일만큼... 나중엔 눈물이 났다.

 

 

 함포마을로 원점회귀한 시간이 4시25분. 만 6시간 걸렸네...

삼랑진 역앞에서 매생이 해물탕으로 목구멍을 지졌다. 얼었던 몸도 녹이고, 마음도 풀어놓고.

에고 에고, 참았던 신음을 뱉었다. 으으으으... 신열이 오르고 덜덜 떨린다.

무리였어. 아무래도 무리였어. 그래도 죽자 사자 기어올라간 내가 가상치 않은가?

내일 아침 내가 눈을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극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잠이 안와서 목욕하고 진정제 먹고 그래도 잠이 안와서 산행기를 쓰고 있다.

죽일 넘의 감기. 니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함 해보자!

(에고, 죽겠다. 새벽 2시다... ㅠ.ㅠ)

 

                                                         < 이 사진은 보너스... 연이틀 산불이 나서, 집앞 저수지에서 헬기가 물을 실어 나르는 걸 찍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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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上)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이고, 무주(無住)란 머무름도 없는 자리라는 뜻이지요.

중생은 재앙의 자리인 부귀영화에 머물려고 하고, 스님은 머물 곳도 없는 법(眞理)의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는 데 차이가 있지요."

<정찬주 '암자로 가는 길' 중에서 지리산 上無住庵 스님 말씀>

 

 

'내가 세상에 와서 뭐 하나 제대로 해놓고 가는 일이 있겠나...' 실상사 뜰을 거닐면서 문득 그런 자책이 일어났다.

두 아이를 데리고 부처님 전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여인을 보면서 생긴 자책이다.

아들에게 반듯한 가르침도 주지 못하고, 남편에게 알뜰한 사랑도 쏟지 못한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다.

한번 다녀가는 이 세상을 왜 이렇게밖에 못사는 건지. 끊임없이 서로를 외롭게 하고, 초라하게 하고 아프게해야 하는지.

'왜 멀리 떠나와도 변하는 게 없는 걸까, 인생이란' - 김영하의 말처럼 실상사까지 와서도 나는 침울하다.

정신 차리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해 떨어지고 어두울텐데, 나는 아직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가족산행이 무산되고 두어군데 전화를 넣었는데 흔쾌히 수락해준 산친구 등자. 두시간도 못돼 배낭을 챙겨 내 차에 동승했다.

신년 벽두, 갑자기 산에 가자는 제의에 선뜻 동의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더군다나 산행 경력이 만만찮은 마니아가.

산이 뭔지 제대로 모를 때 그녀를 만나 지리산 종주도 함께 했고 한겨울 덕유산 종주를 비롯해 소백 치악 설악 등 수많은 산들을 다녔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우리에게 늘상 꽃피고 새우는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몇 번의  비바람을 맞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가 이즈음 다시 만났다.

1대간9정맥 완주를 눈앞에 두고있는 그녀에게 7암자 길은 피크닉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누구보다 듬직하고 사랑스럽다.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조망공원에 섰으나 역광의 지리산 연봉은 어둡기만 하다.  사진은 지리산 자연휴양림 일부.

근처에 뱀사골, 한신, 백무동계곡이 있어 여름엔 피서객들이 많을듯. 한겨울 고즈녁한 산속에서 묵어가는 건 더 좋은 일일테고...

 

 

등자표 먹거리를 민박집 방바닥에 쏟아놓는다. 묵은 김치, 누룽지, 쌀, 돼지고기, 초코파이, 마늘지, 멸치, 감자라면, 복분자술, 커피...

돼지고기 수육 안주에 복분자 술 두어잔으로 불콰해진 얼굴, 나의 도반은 말했다.

"어떤 년들은 연애도 잘도 하는디 우리는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그냐? 남의 인생 뭐라고 할거 엄써. 다, 지 쪼대로 살믄 되는겨."

순천 사투리로 술술 풀려나오는 그녀의 입담은 당할 사람이 없다. 억세고 당차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보드랍고 여리기 짝이 없는 여자.

장거리로 멋진 산행을 하고 오면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한시간씩 수다를 떨곤 한다. 넘치는 감동을 누구에겐가 전하고 싶어서.

이쁜 것 좋은 것 혼자 알고 간직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등자처럼 누구에게 주고싶어 안달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기꺼이 그녀 편이다.

 

 

약수암 들머리를 찾아 임도 알바 10여분, 되돌아와 다시 들어선 갈림길에서 벌통 연립주택(?)을 만났다.

지리산 7암자 지도만 한장 들고 나선 길,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부실한 게 이외로 많다는 걸 실감한다.

사진 위주의 정보가 대부분이다 보니 정확한 거리나 소요시간도 들쭉날쭉하고, 들머리 시그널도 드물다.

연이틀 계속되던 맹추위가 아침에 약간 누그러진듯 하였지만 지리산 북쪽 자락이라 역시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다.

완전무장으로 산행을 시작했으나 20분도 안돼서 겉옷을 하나씩 벗는다. 복면도 벗고, 겉장갑도 벗고, 티셔츠 바람으로 올라간다.

사랑이 진실하면 저절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입었던 모든 격식을 하나씩 벗는다. 모두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해 사랑에 실패한다.

 

 

45리터 배낭이 빵빵하도록 짐을 지고 나의 도반은 눈길을 앞서간다. 영하 15도의 소백산에서 내 신발에 아이젠을 신겨주던 친구.

오늘은 내 다리를 걱정하며 짐이란 짐은 저 혼자 다 지고 간다. 내게 남은 건 카메라와 한 병의 물.

실상사에서 약수암까지 1시간. 지도상에는 여기서 삼정산 능선이 시작되는데, 순간적으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능선길로 붙어볼까 싶었다.

그러나 약수암 옆길로 치고 올라가다가 길을 놓쳐 또 알바, 마음을 고쳐먹고 삼불사 가는 길로 돌아왔다. 햇살은 우리 몫이 아니었나보다.

약수암은 폭격 맞은 것처럼 어수선해서 눈길 둘 데가 없다. 중창불사 중이라 건축 자재들이 절 마당에 어지러이 널려 있다.

 

 

 삼불사 가는 길이 어쩌면 그리도 멀고 험한지. 도마마을을 지날 때 잠시 햇살을 보곤 2시간 가까이 응달이 계속된다.

한평생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노파와 잠시 길동무가 되었는데 '소속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날씨가 풀려서 산에 나무하러 간다는 노파는 자신이 복이 없어 이렇게 사는 거라고 순한 눈빛으로 말했다. 순명하는 그 눈빛이 아름답다.

가파르고 험한 길, 눈은 점점 깊어지고... 누군가 딱 한 사람 오늘 우리 앞을 지나간 발자국이 있을 뿐이다.

지붕 위에 소복하게 눈을 이고 있는 삼불사는 멀리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짐승 털이 입에 들어가면 성불하지 못한다 했는데...

그러나 시주돈을 훔쳐가는 도둑이 들끓는 세상이니 맹견에다 CCTV까지 동원할 수 밖에.

 

 

출발해서 3시간만에 햇살다운 햇살을 만났으니 지리산 계곡이 깊긴 깊은가 보다.

삼불사까지 3시간 이상, 울퉁불퉁 돌길에 눈이 덮여 있어 쿳션이 됐는지 다리가 생각보다 가볍다.

문수암까지 다시 한시간을 걷는데 아이젠을 찰까 말까 여러번 망설인다. 눈은 깊지만 오르막이라 견딜만하다.

지리산 암자들 중 조망이 탁월하기로는 문수암만한 곳이 몇 없지 싶다. 천왕봉은 살짝 가려지고 하봉이 보였지만

저 멀리 북덕유와 한가운데 수도-가야 주능선, 오른쪽으로 매화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다.

 

 

 옆 모습이 꼭 사람의 얼굴을 닮은 기이한 바위, 문수암.

 

 

문수암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난다. 상무주에서 넘어온 일행은 아이젠을 신고 중무장한 옷차림이다. 내리막에 고생 꽤나 하겠다. 

아침에 삼정산 능선으로 붙었다가 암자길로 내려왔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역시 부처님은 우리 편.

문수암을 지나자 길은 더욱 가파르고 험해져 아이젠을 신는다.

상무주암 직전,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 1시가 가깝다.

머무름도 없는(無住) 높은(上) 경지의 진리란 무엇일까. 상무주암에 홀로 계시는 노스님은 그 경지를 깨치셨을까.

반야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무주암은 오래전부터 막대 두 개가 외부인의 출입을 경계하고 있었나 보다.

 

 

지리산 주능 북쪽의 삼정산 정상을 밟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쪽으로는 하봉에서 반야봉까지, 서쪽으로는 고리봉에서 만복대를 거쳐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릉까지 다 보인다.

만복대 아래 정령치가 눈에 들어오자 나의 도반은 백두대간의 추억을 떠올리며 환호성을 지른다.

설악의 진면목을 보려면 점봉산으로 가야 하듯이 지리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삼정산에 와야 하는 거였구나. 그랬었구나.

사람도 바짝 다가가는 것보다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삼정산은 지리산의 명성에 가려 등산객들보다 사찰 순례길로 사랑받는다.  

 북쪽 끝자락의 실상사와 동쪽 사면의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9부 능선에 있는 상무주암과 영원사, 도솔암을 잇는 7암자길.

그러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눈길로 하루만에 다 밟기는 어려웠다. 겨울해는 짧고, 마을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으니...

 

 

영원사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도인(?)

산죽이 우거진 숲길에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바위 위에 가부좌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가 이르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양지쪽에서 손톱을 깎고 계신 노스님께 도솔암 가는 길을 물었더니 영원사에서 한 시간을 가야 한단다.

지금까지 7시간을 걸었는데 도솔암까지 왕복하면 1시간반...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곱게 포기한다.

택시를 불러놓고 비탈진 눈길을 걸어내려 오다 보니 개울 건너 도솔암 가는 길이 조붓하게 보인다.

발은 아래로 내려가고 눈은 그 길에 붙잡혀 있다. 저기서 연하천까지 불과 4.7킬로미터... 그립다!

 

 

음정마을까지 걸어갔더라면 중간에 퍼질러 앉아 울 뻔했다.

갤로퍼 택시가 겨우 올라오는 가파른 눈길, 2만원에 실상사까지 우리를 실어다 준 기사님이 남자천사 같다.

 기우는 햇살이 스며드는 임도에서 마지막 사진 한장.

 

 

 실상사에서 네비를 입력하니 울산까지 3시간 10분으로 나왔는데, 차가 얼마나 밀렸는지 4시간 반이 걸렸다.

눈길 7시간을 걷고 장거리 운전을 했더니 온몸이 뒤틀리고 피곤하다.

그러나, 듬직한 도반이 곁에 있어 짜증을 참을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나보다 더 피곤할 것이다.

차가 밀릴 때 장난처럼 셔터를 눌렀다. 지루한 길이 다소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숲 속에 두고 온 도솔암이 아무래도 눈에 밟힌다. 언젠가는 가리라. 혼자라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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