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을 다시 만난 게 얼마만인가.
불편한 몸을 버스에 구겨넣고 한밤을 달려 만나곤 했던 산이다.
죽령터널과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4시간으로 단축된 거리를 사뿐히 날아온 트라제와 SM7.
죽령터널을 넘자 설경이 펼쳐져 간밤에 눈이 내렸다는 걸 알았다.
'긴 터널을 지나니 온통 눈의 나라였다.'로 시작되는 소설 '설국'이 떠오른다.
교주님이 점지하신 새밭골(을전)은 사람 발길이 드물어서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성을 좇아 비로사 희방폭포 코스를 선택하기 때문에 새밭골의 아침은 고요 그 자체였다.
지난밤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다 깨다 선잠을 잤는데 이외로 날씨는 포근하다.
은행 털러가는 갱처럼 복면까지 두르고 출발했으나 올라가면서 하나씩 벗었다.
완만한 오름길에서 워밍업, 나무계단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설경이다.
묵은 눈이 아닌 새 눈이라 신선하다. 눈도 새 눈이 좋은데 사람도 새 사람이 좋을라나? 늘 산뜻하고 새로운 맛을 주는 사람.
나뭇가지엔 온통 상고대가 피었다. 그것도 방금 만들어진 상고대가 활짝.
'상고대'의 '상'이 서리(霜)인줄 알았는데 순수한 우리말이란다. 미루어 짐작하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이판 섬의 산호가 저리도 아름다울까, 아니면 푸켓 섬의 산호일까. 미스김이 사는 팔라우의 바다 속이 저리 아름다울까.
순록의 뿔도 만져보고 엘크사슴의 뿔도 만져본다. 그러다 기어코 입안에 넣어 본다.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상고대 맛은 흙 냄새와 나무 냄새가 느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들이 땅의 냄새를 안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마법의 숲을 유영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와~우! 이 순간을 영원히~~~
행복의 정의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름다운 걸 많이 볼수 있는 것도 행복이 아닐까.
오늘 눈 내린 숲길을 함께 걸어가는 님들과 함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너그러이 이해하는 사람들. 산을 닮아 넉넉하고 어질고 평화로운 사람들.
능선에 올라서기 전에 완전무장하라는 교주님의 엄명이 내리셨다. 후덜덜 떨린다.
소백산 칼바람을 익히 아는 터라 더욱 공포스럽다. 이겨낼 수 있을까, 내 불완전한 몸이.
"옷 단단히 입으세요. 저쪽 동네는 딴세상이에요. 여기는 봄날이에요."
내려오던 사람이 하는 말에 더욱 기가 죽는다. 비로봉 쪽은 살인적인 바람이 휘몰아치겠지. 으~~~덜덜덜.
정상공격조는 눈바람 속으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국망봉쪽으로 들어섰다. 정상 700미터 앞에서.
능선엔 눈이 제법 깊다. 시야가 트이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조망, 비로봉은 운무 속에 잠겨있고.
비로봉, 연화봉... 소백산에는 불교와 연관된 이름이 많은 것 같다. 비로자나불과 연화좌대.
신선봉은 도가에서 연유된 이름이고, 국망봉은 마의태자의 눈물이 담긴 이름, 상월봉은 무엇일까?
풍경에 취해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하느라 시간이 자꾸 지체된다. 주범은 나와 우향이다.
희뿌연 눈바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이 은총처럼 펼쳐졌다. 푸른 바다에 산호초가 일렁거린다.
눈에 담고 가슴에 담으면 되는데 증거를 남기려고 자꾸만 카메라를 꺼낸다.
우리가 언제 다시 여기 서보겠나, 언제 또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만날 수 있겠나. 암묵적으로 서로 공감하고 있었다.
결국 그 때문에 늦은맥이재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국망봉에서 바로 내려가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고, 심설산행의 진미를 누린 즐거운 빌미가 되었다.
확신도 없이 눈 덮인 계곡길로 내려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지만
다년간 산을 누비고 다니며 본능이 산에 적응된 사람들이 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기로에 서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리라.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탄성이 터진다.
북쪽 사면이라 눈이 나뭇가지에 그대로 남아있고 땅에 쌓인 눈도 날것 그대로다.
반질반질한 눈길이 아닌 우리가 처음 밟는 길. 처녀림에 들어선 듯 흥분을 가눌길 없다.
장난스럽게 밀치며 나둥그라지며 노루처럼 토끼처럼 산새처럼 의의계곡을 타고 내려왔다.
꿈이 아닐까? 아침에 본 몽환적인 설경도. 푸른 하늘에 일렁이던 산호도, 지금 걷고 있는 푹신한 이 눈길도.
군데군데 얼어붙은 계곡을 살얼음 딛듯 조심스레 지났다.
"크레바스 조심! 빠지면 자일이 없어서 못 건져준다!"얼음에 뚫린 구멍을 보며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우향 머리카락으로 자일 만들면 되잖아요." 긴장을 유머로 풀어가며 얼어붙은 계곡을 건넌다.
동화 속의 라푼첼이 생각난다.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타고 성으로 올라간 왕자님은 가시밭에 떨어져 시력을 잃었지.
라푼첼의 눈물로 되살아난 왕자님. 사랑과 용서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묘약인 게야.
장장 8시간의 산행을 끝내고 새밭골로 돌아오니 해가 설핏 기울었다.
무릎 부상 이후 8시간 산행은 기록갱신이다.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심설산행을 날씨 덕분에, 일행 덕분에.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이렇게 멋진 사람들을 만나나.
차에 오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눈 내린 마법의 숲이 연신 눈 앞에 어른거렸다.
지난 한해의 악운을 소백산이 말끔히 치유해주는 느낌이었다.
<사진은 3인 합작(질고지님, 우향님, 그리고 이화)>
<비로봉-국망봉 갈림길에서 // 산행 중에 만난 단양 산꾼이 찍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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