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인지 일기중계인지 알수없는 기상대의 날씨정보 때문에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사람의 근심이라는 것이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이거나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가 대부분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걸어가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걸어가면 될것을...
청도 평양1리 미나리단지 근처에 차를 세우고 봄빛이 완연한 대지를 밟고 나선다.
배고픈 꽃 진달래는 피자마자 따먹히던 옛날을 잊고 화들짝 혼신의 힘을 다해 피었다.
오름길에 후다닥 도망치는 고라니 한쌍을 만났다.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녀석들이 인기척에 놀라 튀어나가는데 놀란 건 오히려 우리들이다.
길은 부드럽고 완만하게 이어진다. 온순한 아낙같이 편하고 친근하다.
선두는 창공님(계수나무 짝지), 산행대장은 애돌이, 후미대장은 계수나무, 나와 자운영은 대원이다.
소수정예부대에 긴급 투입된 핸섬가이가 청일점으로 여인들의 옹위를 받으며 앞장선 격이다.
선두의 발걸음이 딱 내 호흡에 맞다. 바람은 산산 불어오고 새들은 '어서 온나 어서 온나' 노래를 부른다.
급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오늘 걸어갈 능선을 한눈에 담으면서 나도 새들에게 즐거이 화답한다.
"아, 좋아라! 길도 좋고 사람도 좋아라! 오늘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축복이어라!"
청도 남산이 마주보이는 능선은 밤티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 화악산 정상(930m)으로 간다.
정상에서 윗화악산-아랫화악산-철마산으로 굽이치는 마루금이 아름답다.
부드러운 흙길이 대부분이고 악코스가 별로 없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사람도 이렇게 부드러워야 다른 사람이 편한데...
그러나 마냥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도 숨겨진 까칠함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강해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도 칭얼대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
고슴도치의 가시는 남을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다.
발아래 미나리 재배단지를 굽어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을 눈으로 더듬는다.
한재미나리는 도랑에 자생하던 미나리를 1992년 논에 옮겨 심으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본래 들판에서 자라는 미나리였지만, 논으로 옮겨 심으면서 개량종으로 변한 것이다.
우량종을 얻기 위해 파종 전에 열성 종자를 전부 솎아낸다는 한재미나리는 맛과 향이 뛰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봄 한철 미나리 판매로 얻는 순수익이 가구당 5천만원 이상이라고 하니 미나리밭이 금밭인 셈이다.
산 위에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도 미나리 한단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아삭하고 부드럽고 향긋한 맛, 과연 한재미나리였다.
원점회귀 산행 5시간. 내 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걸으라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앞으로 이 몸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더 나빠지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낡아빠진 이 기계를 한 10년만 더 썼으면 좋겠는데 가끔 자신이 없어진다.
누구에게 짐이 되기 전에,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전에 내 스스로 극복하고 인내하고 이겨내야 한다.
멀쩡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 긴 병에 효자 없는 법이니 아무쪼록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갈수 있기를.
띠동갑의 젊은 여자들과도 곧잘 어울리는 애돌이에게 인간관계의 비결을 물었더니
"내가 대접받으려고 하면 옆에 아무도 안와. 내가 갸들(젊은애들) 비위를 맞춰주니까 언니 언니하면서 좋아하지."
나를 낮추고 남을 대접하면 사람을 얻는다고, 상대방이 원하는 걸 살필줄 알아야 한다고, 져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만 일방적인 봉사는 하지 마라. 서로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해. 끝없이 잘해주면 오히려 얕보는 게 사람 심리니까."
늘였다 당겼다 안았다 풀었다... 어쩌면 인간관계를 잘 관리할수 있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말보다 통찰(洞察)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이규태 씨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생각난다.
말은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분위기로, 정황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람들. 나도 토종 한국인임에 틀림없다.
요즘 유행하는 유모어 중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3가지'가 있다고 들었다.
'스님 머리에 머리핀 꽂기, 자식 내맘대로 하기, 남편(아내) 사랑하기'란다.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인데 세번째가 압권이지 않은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압축한 그 한 마디에 폭소를? 아니면 고소를?
다시 태어나도 남편(아내)과 결혼하겠다는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나 이 말에 조금씩은 공감할 것이다.
애증의 세월을 건너오면서 서로의 가슴에 신뢰와 측은지심을 심어주지 못하면 '가장 어려운 일'을 겪게 될 터.
늙어가면서 좀 져주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그렇게 살아갈 일이다.
여성동지들의 오붓하고 즐거웠던 화악산 트레킹.
울밀선을 넘으며 받았던 북극성 님의 안부전화가 생강나무 꽃처럼 반가웠고
계수나무 낭군님의 건강한 얼굴도 활짝 핀 진달래처럼 반가웠다.
한재 미나리로 부자가 된 마을엔 고래등같은 사찰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절이나 교회가 늘어나는 것처럼 세상도 점점 화평해졌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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