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던가, 태백의 대덕산에서 만난 솔나리에 홀딱 반한 적이 있었다.

눈부시게 성장(盛裝)한 귀부인처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조차 느껴지던 그 꽃.

여름이 오면 언제나 그 꽃이 거기 피어 있을까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지난주 금대봉 산행에서는 보질 못했다.

 

 

여름 휴가로 온 동네가 텅 비었는데 혼자 집에 있기 싫어서 솔나리산행을 제의했다.

"솔나리 아직 남았으까? 오데 폈으꼬?"

"사자봉 정상 근처에 가면 아직 있을꺼로?"

 

 

운무가 걷히기 시작하는 영남알프스.

저 광활한 풍경 속에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솔나리도 있단 말이지. 이 아니 행복한가?

 

 

에게게 요 녀석들, 새끼 꿩다리. 오랜만에 햇볕 쬐려고 가녀린 다리를 한껏 들어 올리네.

능선에는 애기원추리, 말나리, 산오이풀... 노각나무 하얀 꽃도 아직 남아 피고 있다.

 

 

밀양 얼음골 왼쪽, 용아A능선 타고 올라 사자봉 찍고 너덜겅으로 내려오는데 6시간반.

꽃 사진 찍는다고 시간을 많이 허비한 건 사실이지만 여름산행으로는 만만찮은 코스다.

악코스로 유명한 루트지만 푸른 하늘 흰 구름이 있어서 행복했고, 솔나리를 만나서 행복했다.

아니, 함께 꽃을 보며 환호하고 웃어주는 일행이 있어서 더 행복했다.

 

 

 친구야, 1대간9정맥 끝내고 나면 영남알프스 일대나 다니자.

먼 산, 높은 산,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더냐? 낮은 산이 낫다고 남난희가 가르치지 않더냐?

 

 

가을이면 억새가 파도치는 사자평. 누군가는 저기서 빈 소주병이 내는 휘파람소리를 들었다고 하던데.

나는 숲속에서 휘파람새 소리만 들었다네 휘리리 휘리리 휘리리 ~~~

샘물산장에서 마신 낮술 한 잔에 하늘은 저 멀리 새파랗게 달아나고 말았다. 용용 죽겠지 약 올리면서.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방치된 산성 아래 나리꽃 저 혼자 붉다.

이런 풍경 하나로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가 상쇄된다.

저 산성마저 없었더라면, 머나먼 길이 얼마나 억울할 뻔했나.

 

 

산 위에서는 동강을 보았고 하산해서는 남한강을 보았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던 동강은 댐 건설을 반대하던 환경단체들이

동강 홍보를 위해 레프팅을 시작하면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급기야 똥강이라는 오명까지 썼는데...

 

 

여름산으로 오르기엔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계족산(鷄足山890m).

육덕(肉德) 좋은 아낙처럼  푸짐한 남한강이 발치에 있건만 산이 높지 않으니 계곡도 물도 볼품없다.

  

 

 그래도 숲 속에서 온갖 여름꽃을 만나 큰 위안이 되었다.

백선 무리를 그렇게나 많이 보기는 처음이다. 더군다나 벌레 먹지 않은 싱싱한 꽃을!

사진에 실패한 이유는 어이없게도 가이드를 자청하는 쌀집아저씨 때문이었다.

혼자 걷고 싶어 일행을 앞질러 나갔더니 기어코 뒤따라와서는 바싹 붙는다.

 

 

 

 "아저씨, 저 사진 찍으면서 천천히 갈테니까 먼저 가세요."

"여자 혼자 가는 거 절대로 못봅니다.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산악회가 책임져야 하거든요."

아... 씨... 좀 내버려두지 젠장!!! 과잉친절이 얼마나 상대방을 괴롭히는지 모르고...

옆에 지켜서 있으니 사진이 되나. 그래서 내가 포기했다. 나만 포기하면 세상이 편하다.

 

 

새벽 일찍 혼자서 안내산행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니나노판인줄 몰랐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노래방을 돌리는가 싶더니 맨 뒷좌석에서는 아침부터 술판이었다. (그것도 여자들이!)

오늘 하루가 심상찮구나 생각했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관광버스 업계도 번창할 것이고...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정안산성.

 둘레 770여m에 폭 4m, 성벽 최고높이는 무려 11m를 넘는다.

성곽은 동남쪽 높은 곳에서 서북쪽 낮은 지대를 향해 사다리꼴로 내리뻗은 모습이다.

이 석성의 존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왕검성'이라고도 부른다.

 

 

급경사지를 활용해 성 외벽은 수직으로 높게 쌓고, 안쪽은 낮게 쌓았다.

서문 일대를 제외하고 성벽들은 견고한 모습으로 고답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저 성벽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으리,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으리.

  

 

  축복
                             도종환

이른봄에 내 곁에 와 피는 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였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였다
그 절망 아니였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당금질이였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읽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던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기대하고 갔던 산이 참 보잘것 없을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견고한 산성 아래 지천으로 피어있는 나리꽃만 아니었다면 오늘 산행은 꽝이었을 게다.

초록 숲 사이로 걸어가는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산을 사랑하겠지.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 것. 내 생각이 언제나 가장 옳다고 우기지 말 것!

 

 

여기가 북문이었나, 서문이었나? 저 멀리 계족산 정상.

 

 

 그나마 고마운 건 옆자리에 앉은 여인네였다.

한국 100대 명산을 밟고 있다는 그 여인은 50대 중반의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날렵하게 잘 걸었다.

"나 혼자 차 타고 오기 어려우니까 아무 산악회라도 오는 거지요. 음주가무는 나도 질색입니다."

둘이 화장지를 말아 귀마개를 끼우고 소음을 견뎌냈다. 전우애 비슷한 걸 느꼈다.

 

 

하산해서 핸드폰을 켰더니 오랫만에 반가운 문자가 들어와 있다.

<노을 보며 바닷가 퍼질러 앉아 이슬 내려 젖은 옷 달빛에 말려가며 술 한잔 하고 싶소. 그대랑>

두어달 전 만난 뒤로 소식이 없었던 친구, 많이 바쁘다더니 왠일일까?

<계족산에 왔다우. 영혼이 고독하면 산으로 가라 하길래 ㅎ>

장난스런 내 회신에 이어진 그녀의 답신은 그러나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육신마저도 고독하면 어디로 가야지요? 그대 시간 나는 날 불러주오.>

 

 

아, 나는 이런 솔직함이 너무 반갑다.

누군가에게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될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조만간 그녀와 함께 먼길을 떠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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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알프스의 백미를 보러 간다.  쳐다만 봐도 눈이 황홀한.

한동안 휴식년제에 묶여 있었고, 위험구간이 많아 안내산행도 드물었다.

 

 

                                                                                                                     <토끼봉 정상>

 

                                                                                                                                  <사진: 울산오바우>

 

 

 안내산행 따라나선지도 몇년만인지. 오늘 함께 가는 산악회는 놀랍게도 30대 젊은 여성이 산행대장이다.

멘트도 씩씩하고 안내도 깔끔하다. 음주가무 절대금지, 하산주 없음. 쿨해서 마음에 든다.

06시 울산 출발, 10시 현지 도착. 코스는 운흥리(보은)-토끼봉-상학봉-묘봉-북가치-운흥리 5시간 코스.

  

 

토끼봉을 향해 올라가다가 그 유명한 '울산오바우' 일행을 만났다.

빨간 리본에 손으로 쓴 듯한 '울산五바우' 시그널은 언제나 미답의 길에 달려있곤 했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걷고 있는 영남알프스 일대의 숨은 길들을 그들이 거의 개척했는지도 모른다.

길 없는 길에서 그들의 시그널은 길이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 적잖은 안도감을 주었다.

십 수년 전 처음 본 그 빨간 리본과 필체가 변치 않는 것이 어찌나 믿음이 가는지, 한번쯤 꼭 만나고 싶었다.

훤칠한 외모에 날렵한 몸매, 하나같이 준족들이다. 내 상상에 100% 부응하는 산꾼들이다.

 

 

곳곳에 개구멍바위, 아찔한 수직벽, 때로는 레펠코스!

토끼봉을 시작으로 상학봉, 묘봉까지 아기자기한 암릉이 이어진다.

  

 

토끼봉 정상 세레머니 ^^*

이런 데 오면 꼭 이런 포즈 취하는 사람이 있거든~

 

 

속리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끝이 상학봉. 벌써 저기 가 있는 사람들은 뭐야???

 

 

 상학봉. 갓 구워낸 식빵 같다.

여기서 점심을 먹었어야 했는데 선두가 어디 있는지 몰라 주린 배를 참고 걸었다.

나이 들면 먹는 게 힘이라더니, 배꼽시계가 12시를 넘자 점점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다.

배낭에 있는 찹쌀떡을 꺼내 먹을 생각도 못했다.

먹고 나면 더 못 걸을까봐, 행여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기다릴까봐.

 

 

지나온 길 뒤돌아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이다.

인생도, 사랑도, 인연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네. 눈물나도록 아름다웠으면 좋겠네.

 

 

6시간 가까이 소변 한 번 안봤다면 말 다 했지. 얼마나 땀을 흘렸으면.

위험구간 곳곳에 자일이 깔려있고 우회로도 있어서 생각보다 무섭진 않다.

문제는 유산객(遊山客)이 몇몇 끼어있어 종종 다른 사람들의 진로 방해가 됐다는 사실. 

배에서는 쪼로록 소리, 땀으로 기진맥진한 몸. 헥헥헥...

 

 

바위 사이 좁다란 흙길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저 아래는 아득한 절벽.

추락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저 길을 내려오고 있네...

 

 

드디어 묘봉. 저것이 묘할 妙인지 토끼 卯인지... 아니면 고양이 猫?

뒤로 보이는 것이 관음봉 넘어 문장대로 가는 능선이다.

 

 

천길 벼랑 위에서 하계를 굽어보며 밥 먹는 즐거움이라니.

답답하고 우울한 세상에 이런 행복조차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리.

 

 

저 녀석 봐라. 아무리 봐도 강아지가 풀 뜯어먹는 먹는 모습 같네.

 

 

묘봉에 도착하니 선두는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젊고 활달한 기상. 나도 한때는 저런 모습이었을까? 터져나갈 듯한 몸매와 싱싱한 얼굴, 아름답다!

 

                                                                                                                                          <물구나무 아저씨가 찍어준>

 

나 없는(?) 사이에 안내산행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젋은 여성이 산악회를 이끌며 장거리산행을 가이드하는 모습이 아주 좋아보였다.

오늘 속리산 북서릉의 묘미를 만끽한 것만큼 울산오바우를 만난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관록이 묻어나오는, 큰 산처럼 넉넉한 인품이 느껴지던 님들,

우리 어느 산에서 다시 만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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