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비탈진 반그늘에 하얗게 깔린 바람꽃을 보고 싶어 나섰다가

꽃 대신 작은 폭포와 저수지를 발견했다.

자신이 사는 곳을 ‘물층지’라고 알려준 한 남자가

산 속 외딴집에 홀로 살고 있었다.

바람꽃을 찾아 헤매고 있는 두 여자를 불러 세운 그 남자는

놋화로가 놓여진 방에서 사주 관상에 수상까지 봐주었다.

“당신은 고독한 사주야! 예술가 기질이 많네!”

(누구나 돌아서면 고독하지. 기질만 있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


아침부터 소주를 큰 잔에 따라 마시는 걸 보니 알콜 중독인가?

물층지 일대에 수만 평의 논밭과 임야를 갖고 있다는 그 남자.

그러나 무엇에 쓰랴. 사람들이 떠나버린 그 땅을.

5대째 마을에 살아 온 그 남자는 왜 혼자 폐허에 남게 되었을까.

일에 파묻혀 술에 찌들어 그의 몰골은 미치광이 같다.

커다란 화살나무가 서 있는 흙 마당의 괴목으로 만든 테이블은

그 남자의 기이한 몰골과 어쩌면 그리 닮았는지.

물층지 계곡 깊숙한 땅에 파라다이스를 이루고 싶어 하는 남자.

신념은 거룩하지만 현실이 너무 남루한 것 같아 가슴 아프다.


계곡 깊숙이, 폭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폭포가 있었다.

높이 4~5미터 정도, 두 갈래 물줄기가 암반을 타고 내려온다.

그 아래 아담한 소(沼)가 푸른 물을 담고 있다.

그 남자는 여기 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나보다. 촛농과 과일 몇 개.

폭포 상류는 푸른 저수지. 지도상에 ‘어물동소류지’ 혹은 '물청천소류지'로

표기된 걸로 봐서 어물리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문득 스치는 영감처럼 3년 전의 기억 한 토막이 번쩍 살아났다.

마골산 참샘에서 이 저수지로 내려왔다가 원점회귀했었는데...

 

                                                                                            

<2월13일>

3년전의 기억을 좇아 길을 나선다.

마골산 정상에서 참샘 가는 길은 군부대를 돌아 절반은 임도, 나머지는 토끼길.

언젠가 여름에 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을 찾다가 숲이 우거져 돌아갔었지.

그해 길을 놓친 지점에서 또 헤매다가 마침내 실낱같은 길을 발견했다.

가파른 내리막 끝에 만난 협곡은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어수선하다.

무너진 절개지와 큰물에 휩쓸려 내려온 나무들이 계곡을 가로막고 있다.

돌멩이를 밟고 때로는 나무를 타 넘으며 계곡 탐사 1시간여.

어느 순간 눈 앞이 탁 트이면서 저수지가 나타났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수면은 빙판처럼 깨끗하고 고요하다. 바람 한점 없는 이 적막-


저수지 사면을 타고 제방 둑길을 건너 어물리로 내려가는 길과 만난다.

이제 막 봉오리를 내민 오리나무 새순들이 사랑스럽다.

어물리 일대 농업용수로 쓰이는 저수지의 큰 물줄기는 두 가닥.

요즘 같은 가뭄에도 만수위를 유지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물줄기 하나를 타고 내려왔으니 돌아갈 땐 나머지 물줄기를 타보자.

저수지 오른쪽을 끼고 가파른 사면을 기어올라 다시 계곡으로 접어든다.

다래 넝쿨이 휘늘어지고 고사목이 쓰러져 있는 길.

먼저 내려온 계곡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올라가는 길은 아름답다.


 

                                                                    <역광이라 사진이 어둡다-어물동 소류지>

 

‘낮은 산이 낫다’는 책을 쓴 남난희가 생각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참 좋다."

삶의 질곡을 빠져나와 낮은 산 밑에 깃들어 살며

산을 버려서 산을 얻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내려온 길이 협곡이었다면 올라가는 길은 툭 트인 편이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계곡을 1시간쯤 치고 오르자 ‘약사암’이 나타났다.

늙은 보살에게 물으니 마을 이름이 ‘산두골’이란다. 

드문드문 보이는 폐가 외에 사람 사는 집이라곤 몇 채 없다.

산두골 대밭을 지나 아침에 길을 찾아 헤매던 지점까지 원점회귀.

어물동소류지를 이루는 두 줄기의 계곡을 완전히 탐사한 꼴이다.

들머리에서 날머리까지 6시간 넘는 무장공비 산행,

그러나 작은 성취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마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방어진 일대의 전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오래된 나무를 보면 존경스럽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도 어찌 저렇게 당당하고 편해보일 수 있는지.

어쩌면 한 자리에서 저리도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자신을 비운 삶이기에 저렇게 넉넉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들이 부러운 것이다. 그들을 닮고 싶은 것이다.“

             <남난희 ‘낮은 산이 낫다’중에서>

 

 

                                                                <2월11일 산두골에서 찍은 복수초 >                         

                                                         

                                                           <봄비에 환호하는 염포산, 베란다에서 줌렌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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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히 보이는 천문대를 두고 얼마나 돌고 돌아 갔던 길인지.

생각하면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몰라.

돌고돌아 결국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

 

절골 들머리에 서 있는 '별빛마을' 이정표.

이름마저 이쁜 그 마을에는 밤마다 별이 쏟아져 내리겠지.

구들장을 쪼개 쌓은 듯 비슷한 두께의 돌들이 탑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나

갈미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임도를 두고 길없는 길을 헤쳐나가는 재미란!

 

                                                                            <갈미봉 내림길>

 

버겁지 않을만큼 적당한 경사에 적당한 바람, 적당한 기온.

다리 길이만큼 준족을 자랑하는 남정네들이 휑하니 달아나거나 말거나

콤파스 짧은 다리로 최선을 다해 갈미봉(789m)에 이른다.

잔설이 남아있는 내림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작은보현산으로 갈라지는 지점(832봉)을 찍는다.

 

 

                                                                                                   <전망터에서 본 작은보현산>

 

포항과 영천의 시경계를 이루는 능선. 이름값 하느라 바람이 꽤 차다.

귀를 싹둑 자르고 콧날을 날름 베어가는 눈바람에 나도 몰래 자라목이 된다.

버젓한 임도를 두고 숲길로 숲길로 숨어든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낙엽이 가슴속에 희열로 차오른다.

 

천문대 근처 응달진 눈길을 걸을 땐 사그락사그락 눈 밟는 소리.

가는 채에 친듯 입자 고운 눈들이 길 위에 곱게 깔려있다.

천문대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기룡산. 산세가 험하지 않고 능선이 

편안해 보인다.

 

 

유성우가 내리는 밤이었을까?

어느 사진작가가 찍은 명작이 천문대 전시실에 걸려있다.

 

 

 폭설에 묻힌 보현산 천문대. 역시 전시실 벽에서.

 

                                                                              <연무 너머 저 멀리 팔공산이 보이고...>

 

보현산에 따로 시루봉이라는 명칭이 있는줄 몰랐다.

천문대 오른쪽으로 시루봉 정상석(1,124m)이 서 있는데

옛날에 할미꽃 캐러 왔던 기억이 살아난다.

유난히 자주색 할미꽃이 많던 그 일대가 시루봉이란 말이지?

역시 아는만큼 보는 거야...

희뿌연 연무 저 멀리 아득히 솟은 팔공산,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고 싶다.

 

                                                                                                                        <기룡산>

 

팔공산을 조망하며 법룡사로 하산하는 길은 겨울해만큼 짧았다.

10시 등반 오후3시반 하산-내 사전에 없는 기록이다.

산 허리를 자른 임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겨울 보현산은 결코 보배롭지

않았지만 오늘 산행이 기억에 남는 것은 하산주의 그 달콤한 맛 때문이리라.

허리 굽은 할머니가 손수 담갔는지

옛날 엄마 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동동주에다

땅에 묻은 김치를 금방 꺼내 썰어주는 그 투박함이 얼마나 살가웠는지.

 

과분하게도 천문대 전시실 현관에서 따뜻한 점심을 먹은데다가

하산주까지 향기롭게 마셨으니 오늘 일진이 좋은 편이다.

감독도 없고 코치도 없이 여유롭게 산행하고 풍족하게 마셨으니

얼치기 산꾼의 하루가 이만하면 족하다 하지 않으리?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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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무중(五里霧中)의 고속도로를 달려 늦가을 대둔산(878m)을 만난다.

 단풍객들이 휩쓸고 간 등산로는 밤새 남자에게 시달린 술집 여자같다.

 어지러이 흩어져 짓밟힌 낙엽 위에 홈리스들의 모습이 겹치는 건 왜일까?

 생기 없는 하늘, 잎 떨군 나무, 을씨년스런 바위들이 '귀곡산장' 분위기다.

 철 지난 바닷가는 쓸쓸한 낭만이라도 있지, 안개 낀 대둔산은 스산하기만 하다.

  

 

 그래도 눈 돌리면 골격 좋은 암릉이 눈 앞에 즐비하니 이 아니 즐거우리?

 산 넘어 산, 그 산 넘어 또 산. 시야가 멀어질수록 흐려져 마침내 하늘과 하나되는 산.

 눈 앞의 암릉미보다 나는 먼 산의 흐린 실루엣을 더 좋아한다.

 람보같은 근육미를 자랑하는 암릉도 좋지만, 어깨를 맞대고 이어지는 순한 능선길도 좋다.

 

 

 

 까마귀만 날았으면 틀림없이 귀곡산장인데...

 오늘 소품에서 까마귀가 빠졌어.

 

 

 올망졸망 이어지는 바위능선. 눈맛이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은 철재 사다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슬아슬한 절벽에 거의 수직으로 설치한 다리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산이 불쌍하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찢기고...나 또한 너를 밟고 있으니 어찌 하리?

 

 저녁 뉴스에서 지리산 천왕봉 일대에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케이블카 놓으면 천왕봉까지 1시간에 갈수 있으니 많은 국민들이 즐길수 있어 좋단다. 

 개발지상주의가 만연한 세태에 흥분을 넘어 서글픔을 감출 수 없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고 보면 좋겠다. 제발.

 

 산이 높지 않아 깊은 맛은 없지만 낙조대에서 마천대로 이어지는 암릉이 멋드러지다.

 천년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저 바위처럼 변함없는 신념 하나 가지고 싶다.

 그 신념에 기대어 남아있는 날들을 보내고 싶다.

  

 

극과극은 통한다고 했지.

빨강은 노랑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고, 노랑은 빨강으로 인해 더 아름답다.

사람의 인식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모자란 나로 인해 잘난 네가 돋보이고, 잘난 나로 인해 못난 네가 더 아름다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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