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한가운데 안개자니를 만나러 간다. 서쪽으로 살짝 기운 햇살이 들녘에 황금빛을 바르는 오후 동해안을 따라 차를 달린다. 차창 밖으로는 일망무제의 바다가 따라오고, 긴 해안선 여기저기 보석을 뿌린 듯 사람 사는 마을이 불빛으로 살아난다. 쉼 없이 6시간을 달려 대관령 옛 휴게소에 닿은 시간이 밤 10시.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불을 밝히고 텐트를 친다. 영상 1도, 꽤 쌀쌀하다. 동계잠바를 꺼내 입고도 덜덜 떨린다. 폐쇄된 휴게소 건물 처마 밑에 3인용 텐트를 치고 주안상을 차린다. 브랜디 한병에 안주라곤 족발 뿐이지만 임금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시에라컵에 따른 한 잔의 브랜디는 향긋한 유혹으로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고 내려간다. 마치 첫사랑의 화인(火印)처럼. 뒷날 새벽 지퍼를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길 건너 산이 바알갛다. 하긴, 해발 840m 지점이니 가을이 벌써 찾아올 만도 하다.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아침을 먹고 서둘러 산행준비를 한다. 길 건너 단풍을 보고 나니 마음이 더 바빠진 게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안개자니-거리개자니까지 약 20Km. 백두대간 구간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평원을 지나간다. 들머리는 휴게소 바로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국사성황당에서 시작된다. 오전 8시 출발, 칼칼한 아침 공기가 나를 설레게 한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오르다 항공무선표지소를 만나 잠시 조망을 살핀다. 바로 건너편에는 능경봉, 그 옆으로 고루포기산, 저 멀리 용평스키장으로 유명한 발왕산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룬 산들을 한눈에 조망하니 가슴이 벅차다. 만산홍엽에다 시원한 눈맛에 발걸음이 가볍다. 선자령에 이르기 전 새봉 근처에서 잠시 뒤돌아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구름 사이로 금빛 햇살이 나오더니 역광을 받은 억새들이 눈부시게 빛난다. 하얗게 피어 절정을 이룬 억새꽃과 하늘의 서광, 마치 오늘의 산행을 축복하는 듯하다. 남쪽으로 광활한 초원지대를 보며 우측 능선으로 붙어 선자령 정상(1,157m)에 선다. 백두대간 능선의 웅장한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조망 또한 얼마나 기막힌지. 동쪽 발아래 경포호수와 강릉시가지가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동해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은 온몸을 날려버릴 듯하고 눈에 보이는 저 하늘 끝까지 온통 산, 산, 산이다.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 바람이 심하고 눈이 많기로 유명한 선자령은 한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20도 안팍. 영동지방 특유의 폭설은 3월초까지 골짜기에 1m 넘는 눈을 쌓아놓는다. 그 악천후가 이 아름다운 고원지대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일까.
완만한 평원과 목장지대가 끝없이 이어지는 길. 산친구 등자의 말처럼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살 것만 같은 이국적 풍경을 지나 곤신봉(1,131m)을 지나고 동해전망대에 이른다. 관광객들이 발아래 강릉 시가지와 동해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내지른다. 대관령 삼양목장에도 가을이 완연하다. 부드러운 구릉지대의 풀빛은 아직 푸른데 원시림을 이룬 숲지대는 누렇게 단풍 들었다. 재작년 여름 저 푸른 초원 위에서 풀을 뜯던 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요즘 목장에는 풍력발전기를 세우느라 번잡스럽다. 중장비와 대형 차량들이 드나들고 기계소리 기름냄새로 몸살을 앓고 있다. 60m 높이로 구릉 위에 서 있는 풍력발전기는 목장 풍경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빨리 이 구간을 벗어나고 싶다. 폴폴 먼지 나는 길을 따라 차량들이 지나갈 때마다 뒤돌아서 눈을 감는다. 매봉(1,173m)까지 다소 지루하게 걷는다. 눈맛은 청량하지만 길이 척박하여 싫다. 매봉 아래 샘터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는다. 대관령에서 여기까지 4시간 걸은 셈이다. 샘터 맞은편으로 대관령유기질비료공장이 자리하고 그 위로 황병산(1,407m)이 우뚝 솟아있다. 군사시설 때문에 정상 접근이 금지된 황병산 옆에 몸을 약간 낮춘 소황병산(1,328m)이 오늘 우리의 목적지다. 아니, 목적지를 앞둔 간이역이다. 샘터에서 얼핏 보기에 이삼십 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 소황병산이 왜 그리 멀기만 한지.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끝이 없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머리를 담근 채 해를 정면으로 안고 걷다가 마침내 초원을 가로질러 가기로 한다. 길을 버리고 초원을 걷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다. 오늘 나도 한 마리 소가 되어 드넓은 목장을 걸어보자. 배 고프면 풀을 뜯고 배 부르면 누워 자고. 아무도 나를 제지할 사람은 없다. 소황병산 정상은 대관령 목장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 그러나 나는 그 산에 관심이 없다. 안개자니 계곡으로 잠입하기 위해 6시간을 걸어왔을 뿐이다. 백두대간이 소황병산을 지나 노인봉으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소황병산 아래에서 안개자니계곡으로 스며든다. 갓 떨어진 낙엽이 켜켜이 쌓인 길, 아무도 밟지 않은 생 낙엽이 발아래 수북하다. 첫눈을 밟는 감흥이 이보다 나으리? 눈 위에 첫 발자욱을 새기는 것보다 낙엽 위의 첫 발자욱이 더 감미롭고 황홀하다. 바스락대는 나뭇잎 소리, 은은한 낙엽 냄새... 한발 한발 떼놓을 때마다 신비롭고 애잔하다. 이른 봄 언 땅에서 올라와 잎을 피우고 이 가을 아무도 몰래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이여! 융단처럼 깔린 낙엽을 밟고 안개자니 계곡에 들어선다. 길은 실낱같이 물줄기를 따라 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계류는 맑고 아름답다. 바야흐로 단풍이 절정이다. 선홍빛 단풍나무, 다홍빛 고로쇠, 진홍빛 붉나무. 물가의 나무들은 온 몸의 수액을 잎사귀로 보냈는지 색깔이 유난히 곱다. 똑같은 단풍잎도 순광보다 역광을 받을 때가 더 아름답다.
안개자니계곡은 노인봉과 황병산 사이의 골짜기에 해당된다. 지형이 마치 개가 누워 자는 것 같다고 구숙(狗宿), 우리 말로 ‘개자니’라는 지명이 붙었다. 황병산 방향의 계곡 안쪽은 ‘안개자니’ 진고개 방향의 바깥쪽은 ‘거리개자니(바깥개자니)’ 이름마저도 아름답지 않은가? 실개천같이 흐르던 물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풍부한 수량을 보이더니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를 만들어놓았다. 널찍한 암반 위를 비스듬히 누워서 흐르는 와폭, 여인의 은밀한 곳과 흡사한 모양의 옥녀폭, 활짝 펼쳐진 부채살처럼 시원하게 흐르는 부채폭... 가을이 절정을 이룬 숲속은 나뭇잎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영롱하다. 햇살 한 조각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뭇잎, 분홍으로 가슴 설레는 나뭇잎, 노랗게 장단 맞추는 나뭇잎. 저마다의 생김새로 저마다의 색깔로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두세 시간 안개자니 계곡을 통과하면서 비닐봉지 하나 보지 못하고 유리병 하나 발견하지 못한다. 라면 봉지 없는 골짜기, 깡통이 없는 골짜기, 그것이 안개자니계곡이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처녀림이요 원시의 비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숲이다. 유명 등산로와는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곳은 거리개자니 쪽에서 접근하는 길이 쉬워 보이지만 대부분 계곡 초입에서 놀다 돌아가기 때문에 안개자니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드물다. 거리개자니 입구 ‘노인봉민박’집이 이정표라면 이정표일까.
9시간을 내처 걸었는데도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다. 해발 1천 미터 내외의 완만한 길을 오래내린 덕분이고, 원시의 비경에 홀린 탓이다. 하산지점에서 택시를 불러 대관령휴게소로 다시 돌아온다. 오후 6시, 해가 설핏 기울고 있다. 오늘 저녁은 계방산 아래서 자기로 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를 쳐야 하리. 계방산 아래 야영장에는 시시각각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다. 장거리 운전 체질에다 야영이 몸에 익은 두 산친구는 호흡이 척척 맞는다. 내가 손댈 사이도 없이 풀밭 위에 그림 같은 집 하나 지어놓고 송어회를 먹으러 가잔다. 시리고 찬 물속에서 자라는 송어에다 ‘산’소주 한잔. 그러나 내 마음은 아직도 안개자니를 헤매고 있다. 구름 속에 올라앉은 듯 몽롱한 기분, 안개 속에 빠진 듯 혼미한 정신. 계방산(1,577m) 아래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유명한 이승복 생가터가 있다. 그 생가터 근처 야영장에서 달을 보며 잠드는 일이 내 일생에 또 있을 것인가?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는다. 묘한 흥분과 설레임, 두려움. 나를 탱탱한 긴장으로 몰아넣는 이런 감정들을 나는 사랑한다. 두어 시간 눈 붙이고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온다. 열나흘 새벽달은 중천에 떠있고 하늘에는 별꽃이 만발했다. 어쩌면 저리도 별이 크고 많은지. 가끔 장난스런 구름이 달을 가리면 주변 산들이 어스름한 실루엣으로 잠겼다가 구름이 걷히면 별 소나기가 쏟아지곤 한다. 새벽달이 지고나자 별빛은 더욱 영롱해지고 내 정신도 가을물처럼 맑아진다. 차 안에 침낭을 옮겨놓고 비스듬히 누워 별빛을 보며 음악을 켠다. 미명의 아침이 별빛을 감출 때까지 나는 계방산 아래 야영장에서 천국의 시간들을 보냈다. (2005년 10월15일)
'산으로 가야겠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것은 꿈이었을까? (0) | 2006.03.03 |
---|---|
바람보다 빠르게, 핏빛보다 붉게 (0) | 2005.10.30 |
가덕도 산행기 (0) | 2005.10.18 |
황매산 꽃불 (0) | 2005.08.07 |
팔공산에서 (0) | 2005.08.07 |